당시 일반적 관례대로라면, 의학교 교관은 김명식, 유병필, 손진수 등 성적순으로 임명해야 했다. 그런데 연유는 알 수 없지만 이례적으로 5등 졸업인 김교준이 맨 처음으로 교관이 되었다. 김명식 등은 호열자병(虎列刺病, 콜레라) 방역원, 임시위생원 위원 등 임시직에 임명되었을 뿐이다. 김교준이 명문가 출신이어서 특혜를 받았던 것일까?
▲ <관보> 1902년 7월 12일자. 제1회 졸업생 명단이 성적순으로 나와 있다. "유필(劉珌)"은 유병필의 오기이거나 개명(改名) 전의 이름으로 생각된다. ⓒ프레시안 |
유병필은 다재다능한, 한 마디로 재사(才士)였다. 1909년 출판사 의진사(義進社)에서 창립 1주년 기념으로 교육대가(敎育大家)를 선정하는 여론조사를 한 결과 유병필은 안창호, 지석영 등에 이어 6위로 선정되었다. 유병필은 의학교와 대한의원의 교수라는 본업 외에 대중강연회의 인기 연사로 활약했으며, <대한자강회 월보>와 <기호흥학회 월보> 등 애국계몽운동 단체의 기관지들에 "행정의 위생"과 "생리학" 등 주로 위생, 의학에 관한 글을 연재해서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의학교와 대한의원에서 일반인 대상의 강연을 하는 경우에도 그것은 대개 유병필의 몫이었다.
▲ <황성신문> 1909년 11월 3일자. 의진사(義進社)가 실시한 "사회에 중망이 있는 교육대가" 선정 여론조사에서 유병필은 6위로 선정되었다. 선정 방법은 의진사가 출간한 책 뒤의 투표지에 독자들이 적어 낸 것을 집계하는 방식이었다. ⓒ프레시안 |
유병필은 의학교 교관 시절인 1907년초 당시 일본에서 해부학 책으로 가장 평판이 높았던, 도쿄 대학 의학부 조교수 이마타(今田束, ?~1889년)의 <실용해부학(實用解剖學)>(이 책은 저자가 사망한 뒤에도 계속 인기를 끌어 1904년에는 14판이 출간되었다)을 번역하여 펴냈다. 이 책은 완역본은 아니고 의학교의 일본인 교사 고다케가 간추린(撰) 것을 유병필이 번역한 것이었다. 원본의 평가가 좋아서였던지 세브란스 병원의 김필순(金弼淳, 1878~1919년)도 한 해 전인 1906년에 번역본을 펴낸 바 있었다.
또 유병필은 1908년 3월에 출간된, 이상익(李相益)이 역술(譯述)한 <세계문명산육신법(世界文明産育新法)>(1908년 3월)을 교열했다. (유병필은 의학교에서 일반 여성들에게 위생, 임신, 육아법을 교육하는 등 산육(産育)에 관심이 많았다.) 이 책은 <황성신문>에 26회나 광고가 실릴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광고 문안은 "문명의 진화는 교육에 재(在)하니 태육(胎育)과 산육(產育)은 교육의 기본이라 고로 내외국 제 대가의 육아 방법을 적요(摘要)하야 순 국문으로 역술하왓사오니 일반 사회에 해득키 편이한지라 자녀를 애중하시는 동포는 구람(購覽)하심 무망(務望)"이라 되어 있어 당시 계몽운동의 분위기를 잘 나타내고 있다.
▲ 1908년 3월 종로고금서해관(鍾路古今書海舘)에서 출간한 <세계문명산육신법>. ⓒ프레시안 |
유병필은 1909년 대한의원을 사직한 뒤에는 5월에 신설된 삼흥학교(三興學校, 안중근이 1906년에 설립한 삼흥학교와는 다른 것이다)의 부교장을 지냈다. 그리고 1910년에는 구세의원(救世醫院) 진찰부장, 중외의약신보(中外醫藥申報) 사장 일을 맡았다. 구세의원은 정인호(鄭寅琥)가 개설한 약방 겸 의원으로 유병필은 그곳에서 고용 의사로 일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중외의약신보 역시 의학교 후배인 장기무(張基茂)와 약방주(藥房主) 이경봉(李庚鳳, 1909년 11월 30일 사망)이 1908년 8월에 설립한 것으로 유병필은 고용 사장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로 보아 유병필은 능력은 많았지만 자산은 없었던 듯하다.
▲ <황성신문> 1910년 8월 23일자 "구세의원(救世醫院) 광고." 유병필은 대한병원 전 교수, 육군 군의, 중외의약신보 사장, 구세의원 진찰부장으로 소개되어 있다. ⓒ프레시안 |
또한 유병필은 1910년 대한의사총합소(大韓醫士總合所)의 총무 일을 보면서 이 단체가 운영하는 동서의학원(東西醫學院)에서 근대 서양 의술을 가르치기도 했다.
▲ 유병필이 <중외의약신보(中外醫藥申報)> 사장으로 있던 1913년 무렵의 모습. <신문계(新文界)> 1913년 7월호에 의약신보 사장이라는 직함으로 게재된 사진이다. 필자가 찾아낸 것으로는 유병필의 유일한 사진이다. ⓒ프레시안 |
1910년 경술국치 전 대한제국 시기에 유병필은 의사, 의학교육자, 애국계몽운동가 등으로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일제가 주도하여 설립, 운영한 대한의원의 교수를 지낸 데에 대해 의혹의 눈길을 줄 수도 있지만 이 무렵까지는 특별히 문제되는 활동은 발견되지 않는다. 하지만 일제 시대에는 뚜렷이 굴절된 삶을 살았다. 유병필은 여러 친일 단체에 관여했으며, 1924년 4월에는 역시 의학교 교관을 지낸 장도 등과 함께 경기도 평의회원에 선임되기도 했다.
유병필은 1916년 11월 29일 결성된 대정친목회(大正親睦會, 회장 조중응)에 윤치호, 안상호 등과 함께 평의원으로 참여했다. (대정친목회는 1920년 3월 <조선일보>를 창간했다.) 또한 1919년 11월 16일 설립된 대동문화사(大東文化社)에서는 임시 사무 처리 및 규칙 제정 위원을 맡았다. 대동문화사는 덕성 함양, 윤리 존중, 지식 교환 등을 취지로 내걸었지만 실제로는 3·1운동으로 고조된 민족정신을 호도, 훼손하기 위한 단체였다.
특히 대중들의 공분을 자아낸 유병필의 행위는 1924년 3월 25일 "독립사상과 사회주의를 공격하며 총독부를 원조하여 그의 시정을 돕자"라는 내용의 선언서를 발표하고 관민일치 시정개선, 대동단결 사상선도, 노자(勞資)협조 생활안정 등의 강령을 제정, 채택한 각파유지연맹(各派有志聯盟) 선언에 참여한 것이었다. 이때 유병필은 유문환(劉文煥), 김중환(金重煥)과 함께 교풍회(矯風會)의 대표로 이름을 내걸었다. 이런 행동은 반민족적일뿐만 아니라 반민중적인 것으로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이었다.
▲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 1924년 4월 26일자. 유병필은 독립신문 기사가 대변하고 있는 민중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알고 있었을까? 알았더라도 그는 무지한 조선 민중을 자신의 계몽 대상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유병필뿐만 아니라 구한말의 많은 계몽운동가들이 일제에 투항한 자신을 온갖 이유로 변명하고 포장했다. 그들은 사실 계몽의 주체가 아니라 대상이었다. 오늘날은 어떨까? ⓒ프레시안 |
▲ <경성일보> 1928년 1월 16일자. 경기도 평의원 유병필이 1월 14일 오후 8시 (청진동 자택에서-<매일신보> 1월 16일자) 뇌일혈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한성의사회 회장을 지낸 경력도 소개되어 있다. <일본의적록(日本醫籍錄)> 1928년판에 의하면 유병필은 사망 전까지 종로통에서 보성의원(普成醫院)을 개업했다. ⓒ프레시안 |
▲ <조선총독부관보> 1928년 5월 9일자. 유병필이 사망하여 의사면허증(제8호)을 반납했다는 기사이다. 여기에는 사망일이 1928년 1월 15일로 되어 있는데, 내용의 구체성으로 보아 <경성일보> 기사의 1월 14일이 맞는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총독부관보> 1928년 2월 2일자에도 1월 14일로 나와 있다. ⓒ프레시안 |
유병필의 훼손된 삶은 일제 시대에 들어 뚜렷해졌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1909년 3월 의술개업인허장을 받는 과정에서부터 드러나기 시작한다. (의술개업인허장에 관해서는 뒤에 상세히 다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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