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화담은 조선 최고의 도사다. 전우치의 도술 스승일 정도로 도력이 높았다. 물론 조선 시대 소설 <서화담전>과 <전우치전>에 나오는 이야기다. 하지만 소설이 인기를 끌면서 소설 속의 도사 서화담은 현실 대중들의 가슴을 파고들어 하나의 신화가 됐다. 마치 실존 인물인 신라의 학자 고운 최치원이 가야산으로 들어가 불사의 존재인 신선이 됐다고 믿어진 것처럼.
도사 서화담은 실존 인물인 조선 중종 때의 학자 화담 서경덕을 모델로 삼은 것이다. 황진이, 박연폭포와 함께 송도(개성) 삼절의 하나로 꼽힐 정도로 명망이 높았고 당대 민중들의 추앙을 받았던 인물이다. 그를 전능한 도술을 부리는 신화적 존재로 만든 것은 민중들의 열망이다. 현실 세계의 온갖 부조리를 초월적인 존재가 개선해 주기를 바라는 열망이 '실재'하는 도사 서화담을 창조해 낸 것이다.
개성에 도사 서화담이 있었다면 통영에는 도사 백운선생이 있었다. 실존 인물이면서 도술을 부려 민중들의 응어리를 풀어주었던 신화적인 이야기의 서사가 아주 흡사하다. 신화학자 조셉 캠벨은 "신화는 사회가 꾸는 집단적인 꿈"이라 했다. 도사 서화담도 도사 백운 선생도 당시 민중들의 간절한 꿈이 만들어낸 신화일 것이다.
통영에는 백운선생이 살았던 집이 남아 있다. 그곳이 백운서재다. 백운서재는 조선 시대 말엽의 학자 백운 고시완(1783∼1841) 선생이 통영의 아이들을 교육 한 서당이었다. 지금도 해마다 8월 말 정일(丁日)에 제사를 모신다.
▲ 백운선생이 학동들을 가르치던 서당. ⓒ강제윤 |
도술로 폭정을 일삼던 통제사를 징벌하다
조선 시대 삼도수군통제사는 통영의 지배자였다. 백운선생이 살던 시대, 폭정을 일삼던 통제사가 기생들을 끼고 미륵산 기슭에 봄나들이를 나갔다가 잔뜩 취해 통제영으로 들어오는 길이었다. 춘궁기라 백성들은 굶주리며 보릿고개를 넘는 중인데 통제사 행렬은 나발까지 불며 판데목에 이르렀다. 백운서재 뜰 앞 연못을 통해 이 모습을 지켜보던 백운선생이 화를 참지 못하고 부적을 써서 주문을 외우며 연못에 던졌다. 그 순간 통제사가 타고 가던 말발굽이 땅에 달라붙고 술에 취한 통제사는 말에서 굴러떨어져 버렸다. 백운선생이 징벌을 내린 것이다. 통영 사람들은 대게 통제영을 이야기할 때 자랑스러운 역사만 상상하지만, 그 이면에는 관리들의 탐학과 폭정에 시달리는 백성들의 뼈아픈 역사도 있었다. 이 신화는 사관이 기록하지 않은 백성의 역사를 구전으로 기록한 것이다.
당시 통영에서는 해마다 봄, 가을에 한 번 씩 군점 행사가 열렸다. 이때는 삼도수군통제영 휘하의 장졸과 전함 수백 척이 점호를 받았다. 강구안 앞바다에서는 대포 소리가 진동하고 학익진이 펼쳐지는 등 해상 훈련하는 수군의 모습이 장관이었다. 고성, 거제, 진주, 산청, 남해 등지에서까지 구경꾼들이 몰려와 통영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이때는 서당에서 공부하던 학동들도 구경을 가고 싶어 안달했다. 그 마음을 안타깝게 여긴 백운 선생은 학동들을 뜰 안의 연못가로 불러낸 뒤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연못 수면 위에 강구안에서 펼쳐지는 수군들의 점호 모습이 그대로 비쳤다. 연못의 물을 스크린 삼아 생중계한 것이다. 그래서 학동들은 강구안에 가지 않고도 서당에서 수군 점호를 볼 수 있었다고 전한다.
주역에 달통했다는 백운선생에 대한 이야기는 백성들에 의해 신비적으로 채색되어 신화가 됐다. 백운선생이 기거하던 백운서재는 충무교와 통영대교 초입 두 다리가 갈라지는 부근에 있다. 찻길에 작은 이정표가 하나 있으나 찾기는 쉽지 않다. 이정표 앞에는 세 갈래 길이 있는데 어느 골목으로 들어가야 할지 안내판이 없다. 헤매다 결국 동네 주민에게 물었다. 포도 상자를 들고 오던 노인 한 분이 따라오라신다. 골목 초입에서 멀지 않다.
백운서재 입구는 주차할만한 곳이 없다. 그러니 찾아가려면 걷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이 낫다. 도천동 지구대 입구에 하차해 통영대교 방향으로 걸어오면 길가에 이정표가 보인다. 백운서재 2길로 가지 말고 '아트씽크 도배공장 직영 도매 집' 간판이 보이면 거기서 10미터쯤 직진하다 오른쪽 골목을 따라 올라가면 백운서재 1길 14호란 집이 나온다. 그 집 왼쪽 골목을 따라 조금만 더 오르면 정면에 보이는 기와집이 백운서재다.
백운서재 울타리는 오래된 돌담이다. 성벽처럼 쌓은 돌담은 이끼가 끼어 한껏 고풍스럽다. 몇 개의 계단을 올라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왼편에 백운암, 오른쪽은 관리사인지, 사람들의 주거 흔적이 보인다. 백운선생이 학동들을 가르치던 백운암 건물은 작고 소담한 세 칸 기와집이다. 좌우 양쪽에 방 두 칸, 가운데는 대청마루다. 백운암 왼편에는 연못이 있다. 백운선생이 스크린 삼아 세병관 열병식을 생중계했던 그 연못이다. 연못 위 영모재는 백운선생 추모사당이다. 연못 옆 돌담 아래는 샘이 있다. 이런 보물 같은 집이 시내 한복판에 숨어 있었다니! 절로 감탄이 나온다. 마당에는 동백나무 고목 두 그루. 동백열매가 잔뜩 매달려 있다.
▲백운 서재는 입구부터 상서로운 기운이 감돈다. ⓒ강제윤 |
신화는 늙지 않는다!
사람의 인기척이 들리자 관리사에서 노인 한 분이 나오신다. 노인은 이곳에 산지 벌써 18년째다. 옛날 어린 학동들 글 읽는 소리로 가득 찼을 서당은 지금 텅 빈 절간처럼 고요하다. 한산도가 고향인 노인은 젊은 시절 포항과 통영에서 잠수부로 이름을 떨쳤고 "뭉티기 돈"을 벌었었다. 월급쟁이들이 보통 1만 원씩의 봉급을 받을 때 그는 잠수해서 전복이나 소라, 고동 따위를 건져 올려 매달 30-40만 원씩의 큰돈을 벌었다.
하지만 "남의 말만 듣고 장어잡이 배에 투자했다"가 실패한 뒤 백운서재 관리인으로 들어와 살았다. 관리인으로 들어올 때는 마을 노인 회장으로부터 한 달에 10만 원씩이라도 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는데 지금껏 단 한 번도 수고비를 받아본 적이 없다고 하소연이다. 잘 관리해 온 만큼 수고비를 드리는 것이 마땅한 도리가 아닐까 싶다. 도 지정 문화재이니 관청에서 챙겨야 하지 않겠는가.
노인은 관리인으로 들어온 때부터 단 한 차례도 거르지 않고 매달 음력 초하루 날이면 제사를 모신다. 삼색 과일과 막걸리를 사다 정성껏 배례한다. 백운 선생에 대한 존경과 믿음이 지극하다. 노인은 근래에 참 신기한 일을 겪었다. 서재 안에 샘이 있는데 가뭄에도 단 한 번 물이 마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영모재 신축 공사를 한 뒤 물이 말라버렸다. 노인은 부정을 탔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목수들이 집을 짓다가 휴가를 다녀왔는데 휴가 때 개를 잡아먹은 이야기를 하더란다.
절뿐만 아니라 사당에서도 개고기는 금기시된다. 그런데 개고기를 먹은 목수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추모사당을 지으며 개고기 이야기를 해서 부정을 탔다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면 백 년도 넘게 마르지 않던 샘이 마를 까닭이 없다고 노인은 믿는 것이다.
▲ 노인이 부정을 타서 물이 마르게 됐다고 믿는 우물. ⓒ강제윤 |
"할아버지가 노하지 않았나 생각이 들더라고요."
할아버지는 백운선생을 말한다. "설마 선생은 도인이셨는데 그 정도도 용서 못 하실 정도로 옹졸한 분이겠어요" 하는 소리가 목구멍까지 솟아올랐지만, 다시 삼키고 반론하지 않았다.
백운선생에 대한 이야기는 모두가 극적인 전설이다. 노인은 개구리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열병식 생중계 스크린이었던 저 연못에는 개구리들이 살고 있다. 그런데 여기 개구리들은 개굴개굴 요란스럽게 울지를 못한다고 한다.
"얄궂게 작게 울지 크게 못 웁니다. 원래 비단개구리는 소리가 상당히 요란하거든요."
개구리들이 말더듬이처럼 제대로 울지 못하게 된 데는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하루는 학동들에게 글을 읽히는데 개구리들이 하도 시끄럽게 울더란다. 백운선생이 대빗자루에 불을 붙여 연못에 띄웠다. 그러자 개구리들의 울음이 잦아들었다. 그래서 그 개구리 떼의 후손들은 지금까지도 울음소리를 제대로 못 내게 된 것이란다. 백운 선생은 더 이상 이승에 없지만, 노인의 믿음은 확고하다. 신비를 믿는 이들에게 신비란 언제나 현존한다. 신화는 늙지도 않는다!
▲ 백운서재의 수호신(?)일까? 서재 입구를 지키는 길고양이. ⓒ강제윤 |
□ <섬학교> 6월 답사 안내 강제윤 시인이 이끄는 인문학습원 <섬학교>가 6월 답사를 떠납니다. 일시 : 1일~2일 / 장소 : 매물도·소매물도 ☞ 자세한 답사 내용 보기 : 한려수도의 비경 소매물도·매물도 기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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