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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최초의 개업 의사 박일근은 누구인가?

[근대 의료의 풍경·72] 양의 원조 박일근?

<매일신보> 1936년 1월 12일자 "양의(洋醫) 원조 박일근 씨" 기사(제71회)를 찬찬히 읽어보자. 이 기사의 내용은 대체로 객관적 사실에 잘 부합하여 사료로서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박시제중(博施濟衆) 신농유업(神農遺業) 등의 간판을 걸은 한약방은 멧백년 전부터 나려온 것이라 이미 중국에서 조선으로 그 의술이 들어온지도 오래이엇스나 생사람의 갈비를 끈어내거나 또는 창자를 끈어 다 죽어가는 사람을 살이게 되는 즉 재생의 은인이라고까지 이르는 양의(洋醫)는 조선에 들어온지 불과 40여년 박게 아니 된다. (…) 명치(明治) 31년, 즉 38년 전 4월에 조선인으로서 비로소 병원 간판을 걸고 개업을 한 이가 잇스니 그는 현재 도렴동 3번지의 2호 제생의원이라는 간판을 걸고 65세의 노령이것만 아즉도 젊은 의사 지지 안케 꾸준이 환자를 다루고 잇는 박일근 씨이다.

이 기사에 의하면 박일근이 처음 의원을 개원한 것은 1898년 4월이다. 1899년 <황성신문>의 제생의원 광고에도 1898년에 의원을 개설했다고 나온다. 이것들을 종합하면 박일근이 뒤에 언급할 염진호와 함께 한국인으로서는 가장 먼저 근대 서양식 의원을 개원한 것은 틀림없다고 여겨진다. 1936년의 <매일신보> 기사는 근대 서양의학을 "생사람의 갈비를 끊어내거나 또는 창자를 끊어 다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게 되는, 즉 재생의 은인이라고까지 이르는" 것으로 묘사하여 외과 시술을 그 특징으로 여기고 있다.

▲ <황성신문> 1899년 3월 7일자(왼쪽), 8월 4일자(가운데), 8월 17일자(오른쪽). 이 광고에 따르면 박일근은 제생의원을 1898년 (4월) 중서 수진동(1936년에는 종로서 뒷골목으로 지금의 청진동 "욕쟁이 할머니집" 근처로 생각된다)에 개원했고 이듬해 8월 10일(음력 7월 5일) 모교(毛橋) 남로(南路) 동변(東邊) 두 번째 집(현재 모전교 네거리 남동쪽 무교동 1번지 효령빌딩 근처)으로 옮겼다. 이 당시에는 의원과 약국을 혼용하고 있었음도 볼 수 있다. ⓒ프레시안

(기자) 내지에서 어느 의학교를 마추섯나요 (박) 그 당시는 의학교는 업섯습니다. 각처의 의학강습소가 잇엇지요. 나는 웅본현 의학강습소(熊本醫學講所)를 맞추엇습니다. (…) 28세 때에 졸업을 하고 바로 조선으로 와서 현재 종로서 뒤골목인 청진동에서 1년간 개업하다가 무교정 4번지에다 역시 지금과 가티 제생의원이라는 간판을 걸고 영업을 하엿습니다. (…) 내가 영업을 시작한지 5년 후에 김익남 씨라는 분이 개업을 하고 6년 후에 박종환 씨, 그후 8년 만에 안창호(안상호의 오기) 씨 등이 순서로 사설 병원을 설치하섯지요.

박일근은 이 기사에서 자신이 유학할 당시에는 일본에 정규 의학교가 없어서 큐슈(九州)의 구마모토 의학강습소를 졸업했다고 말했다. 1899년 <황성신문> 광고에 의하면 박일근은 1889년부터 1897년까지 8년 동안 구마모토에서 의학을 공부(勤工)했다. 박일근의 말이 사실일까?

박일근이 유학했다고 하는 1880, 90년대에 도쿄에 도쿄(제국)대학 의학부, 지케이의원(慈惠醫院) 의학교 등이, 지방에도 오사카(大阪)와 교토(京都) 의학교 등 정규 의학 교육 기관이 여럿 있었다. 그리고 1890년대 말에는 일본 정부가 학력을 인정한 양의(洋醫)가 무려 2만 명이나 되었다. 따라서 당시 일본에 정규 의학교가 없었다는 박일근의 말은 사실과 다르다.

그러면 구마모토는 어땠을까? 구마모토의 의학 교육 기관은 흥망성쇠를 거듭했다. 1871년 7월 관립(국립) 의학교 겸 병원이 세워졌다가 1875년 폐교했으며, 1878년부터 1888년까지는 현립(縣立) 의학교가 있었다. 그리고 다시 1896년 2월에 사립 구마모토 의학교가 개설되어 1904년에 의학전문학교로 승격되었다(지금의 국립 구마모토 대학의 전신이다). 따라서 박일근이 유학했다는 기간의 대부분에는 의학교가 없었던 셈이다.

어쨌든 박일근은 1898년부터 1938년까지 꼭 40년 동안 (양)의사로 활동했다. 지금까지 밝혀진 바로는 한국인으로는 최초의 근대식 의사인 셈이다(한국계 미국인 필입 졔손 서재필을 제외하고). 정부는 박일근의 의사 자격을 인정했을까? 대한제국의 직접적인 관련 기록은 발견된 것이 없지만 의사 자격을 인정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조선총독부는 박일근의 학력을 인정하지 않아 의사 면허증 대신 의생(醫生) 면허증을 주었다. 그렇다고 세상 사람들이 박일근을 의사로 인정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뿐만 아니라 1911년 조선총독부 의원의 일본인 의사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일제 시대 가장 대표적인 의사 단체인 "조선의학회"에서도 박일근을 회원으로 받아들였다. 박일근은 일제 시대에 법적으로는 의사가 아니었지만 사회적으로는 큰 지장 없이 의사로 활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 <조선총독부 관보> 1914년 2월 13일자(왼쪽)와 1938년 5월 13일자(오른쪽). 박일근은 <의생 규칙>에 의거해서 의생 면허증(제7호)을 받아 1938년 4월 제생의원을 폐업할 때까지 24년 동안 의생으로 활동했다. 8년 동안 의학교 교장으로 재직했던 지석영은 의생 면허 제6호였다. ⓒ프레시안

▲ <조선의학회 잡지> 제9호(1914년 2월 14일 발행)의 "조선의학회 회원 명단." 1911년 4월에 창립된 조선의학회는 일본인 의사들을 중심으로 조선인 의사들도 참여한 일제 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의사 단체이다. 박일근은 적어도 1916년까지 조선의학회 회원이었으며 그 뒤에도 박일근의 회원 자격이 변동되었다는 기록은 발견하지 못했다. 반면 박일근은 경성에서 개업한 일본인 의사들이 1905년에 설립한 경성의사회에는 조선인으로는 최초로 1911년 봄에 가입했다가 1914년 8월 의사가 아니라는 이유로 제명되었다. ⓒ프레시안

(기자) 그때 경성의 병원은 몃개나 되엇습니까 (박) 내가 개업한 후 2, 3년 만에 대한병원(大韓病院) 즉 현 성대의원(城大醫院,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부속의원)이 잇섯슬 따름입니다. 가장 원조의 병원은 제중원이지요. 내가 개업을 하고저 조선에 와보니 10년 전에 설립되엇다고 하는 것을 들엇습니다.

박일근이 언급한 대한병원은 1899년 내부(內部)가 설립한 병원, 즉 광제원을 말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박일근은 1885년에 세워진 제중원을 일본에 가기 전에는 몰랐고 귀국 후에야 알게 되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어떤 동기와 계기로 일본까지 가서 "신"의학을 공부했는지 의아하다.

(기자) 선생이 개업 당시에 약갑은 얼마식이나 바드섯습니까. (박) 1일분에 그때 돈 두 양인데 지금 4전이엇지요. 그리고 진찰요는 한푼도 밧지 아니 하엿습니다. (…) 그 시절은 모든 물가가 그러케 싸고 또 생활 정도도 엿터스니까요. 그리고 그 당시 약갑도 싼 관게이지만 엇지나 사람들이 밀리는지 여간 밥부지 아니 하엿습니다. (기자) 지금은 경긔가 엇더십니까. (박) 다소의 시대지(時代遲)의 감이 잇다고들 하야 그다지 큰 재미는 못 보아도 소일감은 넉넉합니다. 나는 아즉도 자신이 잇스니까요.

이와 가티 문답을 하는 시간 30분간은 되엇는데 환자가 3, 4명이나 와서 기다림으로 실례를 말하고 떠나왓다.


일제시대에 소학교(초등학교) 초임 교원의 봉급이 대략 30원(圓)이었으니 하루 약값 4전은 지금 돈으로 2000원쯤 될 것이다. 이 기사에 따르면 박일근의 초창기 제생의원은 밀려드는 환자로 성황을 이루었다.

▲ <매일신보> 1936년 1월 12일자에 실린 박일근(朴逸根)과 제생의원 사진. 박일근은 무교동에서 25년 이상 개업을 하다 정확히 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도렴동(현재 외교통상부 청사 근처)으로 이전했다. 이 사진에 의하면 제생의원에서는 소아과, 내과, 안과 그리고 화류병(성병) 환자를 진료했다. 의료인에 대한 통제가 강화된 일제 시대에도 "의생" 박일근이 "의사"로 활동하는 데에 별 지장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의생과 의사의 차이는 무엇이었을까 하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가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프레시안

박일근은 의사로 활동하는 한편 집에서 어린 학생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교육 활동도 벌였다. 구체적으로 누구를 대상으로 어떤 내용을 가르쳤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애국계몽운동이 활발해지기 훨씬 전인 1899년에 이미 그런 활동을 한 것으로 보아 상당히 의식 있는 사람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 <독립신문> 1899년 7월 8일자. 양약국 하는 박일근이 집에서 글을 가르쳤다는 내용이 언급되어 있는 기사이다. ⓒ프레시안

박일근이 학생 교육에 관심이 많았다는 사실은 <황성신문> 1908년 4월 14일자 기사로도 뒷받침된다. 자신이 사는 미동에 봉명학교가 세워지자 그에 극력 찬성한 박일근은 학교 임원과 학생들을 무료로 치료해 주고 학교의 청결을 위해 석탄산수를 제공하겠다고 제의했다는 것이다. 또한 일제 시대인 1913년에는 정동공립보통학교에 비품과 교기(校旗)를 기증하여 총독부로부터 목배(木杯)를 수여받기도 했다.

1924년 7월 12일 종로경찰서장은 경성지방법원 검사정(지검장 격)과 경무국장(경찰청장 격)에게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가 조선 내에 비밀 조직을 설치하려는 것과 관련하여 그 동안 수사한 내용을 보고(京鐘警高秘 제8953호의 2)했다. 대한통의부는 1922년 남만주 지역에서 활동하던 조선인 민족주의자들이 만든 대표적인 무장 독립운동 연합 단체로 평안북도 삭주와 강계의 경찰주재소를 습격하는 등 모두 20여회의 무장 투쟁을 수행했다. 그리고 통의부는 경성지국 등 조선 내에도 조직을 설치하려다 일제의 고등계 경찰에게 적발되었다. 종로서장이 보고한 내용 중에는 "의사 박일근"도 조직원 용의자로 들어 있었다. 실제로 박일근이 통의부와 관련된 활동을 했는지를 뒷받침하는 다른 자료가 없기 때문에 사실 여부를 판단하기는 힘들다. 앞으로 연구가 더 필요한 부분이다.

▲ 경성 종로 경찰서 고등계 비밀문서(京鍾警高秘) 제8953호의 2 "대한통의부 선내(鮮內) 기관 설치의 건"(1924년 7월 12일자). 박일근, 예동진(芮東進), 백대진(白大鎭), 권중국(權重國) 등이 의심 인물로 지목되어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구체적인 증거는 없지만 매우 의심스러운 것도 사실이며, 엄밀히 사찰 중"이라고 보고한 것으로 보아 결정적인 단서는 확보하지 못한 상태였다. ⓒ프레시안

(사진 설명에서 언급된 백대진은 이에 앞서 1922년 월간 <신천지>의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이 잡지에 "일본 위정자에게 고함"을 게재하여 일제를 비판하다 6개월 징역형을 받은 바 있었다. 백대진은 일제 시대 내내 대체로 친일적인 행각을 보였는데, 이 무렵에는 다른 모습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박일근은 이 당시 예동진과 함께 대동단 기관지인 <대동신보(大同新報)>에 관여하고 있었는데, 이 보고서에 언급된 <대동민보(大東民報)>와 관련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박일근과 비슷한 무렵 근대 서양식 의원을 개원한 사람으로는 염진호(廉鎭浩)가 있다. <독립신문> 1899년 3월 10일자에는 "남대문 밧게셔 약국하는 렴진호 씨의 의슐이 고명하야 병인들이 신효를 만히 본 일은 이왕브터 일흠이 잇섯거니와 근래에 각색 양약과 각죵 병치는 긔계를 만히 구하야 놋코 병인들을 보아 치료하는데…"라는 기사가 실려 있다. "이왕부터"라는 것이 정확히 언제를 가리키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1898년부터는 남대문 밖에 약국 또는 진료소를 차려놓고 환자를 보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한 달 뒤인 4월 13일자 기사에도 "념씨의 의슐이 고명한 일은 이왕에도 만히 들엇거니와"라고 되어 있다.)

▲ <독립신문> 1899년 3월 10일자. 염진호의 진료 활동을 소개한 기사이다. 염진호는 이 기사가 나가기 전부터 신식 의술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오전에는 집(약국)에서 환자를 보고 오후에는 왕진을 다닌다고 되어 있다. ⓒ프레시안

그리고 <제국신문>에는 1899년 10월 16일부터 11월 18일까지 26회에 걸쳐 다음과 같은 광고가 실렸다.

남문밧 이문골 아래 양약국하는 렴진호가 병인의 래왕이 멀다하는 고로 황토현 신쟉로 안에 벽돌집에다 약국을 또 셜시하엿는대 오젼은 문밧게셔 병을 보고 오후에는 황토현 벽돌집에셔 병을 보오니 쳠군자는 래림하옵소셔. 시의제생당(施醫濟生堂) 렴진호 고백

염진호가 황토현(지금의 광화문 네거리 근처. 당시는 남대문 방향으로 가는 길이 없어서 세거리였다)에 약국(진료소)을 하나 더 열었다는 이 광고를 통해 염진호의 약국이 성황을 이루었음을 짐작할 수 있으며, 이전 기사들에는 없었던 옥호(屋號)가 시의제생당임이 밝혀져 있다.

염진호의 의술이 매우 뛰어났음을 말해주는 기사는 더 있다. <황성신문> 1900년 1월 26일자는 서양인 의사 여러 명이 치료했지만 효과를 보지 못한 독일 상인 고샬키(Gorshalki)의 다리 부위 총상을 시의제생당 "의사" 염진호가 탄환을 뽑아내고 치료하는 중이라고 보도했다. (정동에 있던 고샬키 상회는 모카 커피, 건포도, 푸딩, 러시아 캐비어, 훈제 연어, 잼 등을 수입해서 판매했는데, 금계랍(키니네)도 주요 상품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면 염진호는 어디에서 근대 서양 의술을 배웠을까? 그가 별도로 의학을 공부했다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는다. 다만 1894년 9월 제중원의 운영권이 에비슨에게 이관되기 전까지 구리개 제중원에서 주사로 근무했던 경력이 눈에 뜨인다. 주사 중에서 진료 조수 역할을 한 학도(學徒)였는지는 알 수 없다. 염진호가 제대로 의학을 공부했다면 의술이 어느 정도가 되었을까?

비록 정규적인 의학 교육을 받지는 않았지만 박일근과 염진호 등이 1898년경부터 근대 서양 의술을 시술하고 있었다. 그만큼 근대 의술이 한국인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 최초의 정규 의학 교육 기관인 의학교가 세워진 것은 바로 그 무렵이었다. 시대적 요청의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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