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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유학생의 '기구한' 운명, 목숨 잃고 패가망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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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유학생의 '기구한' 운명, 목숨 잃고 패가망신!

[근대 의료의 풍경·70] 日 유학생의 진로

갑오·을미개혁 정부가 사범학교, 외국어학교, 소학교에 앞서 가장 먼저 설립한 근대식 교육기관은 법관양성소였다(제7회). 조금 의아스럽기도 하지만, 그만큼 신식 교육을 받은 법관이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친일적인 개혁 정부는 주로 일본을 참조하여 단기간에 많은 근대식 법령을 제정했다. 따라서 새로운 법령에 의해 소송과 재판을 담당할 사법관의 수요가 많이 생겼던 것이다.

법관양성소의 성격은 "생도를 범모(汎募)하여 규정한 학과를 교수하고 졸업 후에 사법관으로 채용할 만한 자격(자)을 양성하는 곳"(<법관양성소 규정> 제1조)이었다. 그리고 제11조에 "졸업증서를 영유(領有)하는 자는 사법관에 채용함을 득한다"라고 다시 양성소의 위상과 목적을 분명히 했다.

수학 기간을 6개월로 정한 것(제8조)은 그만큼 새로운 교육을 받은 사법관을 단기간에 배출해야 하는 당시의 다급한 사정을 잘 말해 준다. 또한 학과목과 수업 시간(주당 총 13.5시간)이 법학통론(3시간), 민법 및 민사소송법(4.5시간), 형법 및 형사소송법(3시간), 현행법률(1.5시간), 소송연습(1.5시간) 등 거의 대부분 소송 실무로 이루어져 있는 것도 법관양성소의 성격과 지향을 생생히 보여 준다.

이러한 법관양성소는 1895년 12월 25일 제1회 졸업생 47명, 이듬해 4월 22일 제2회 졸업생 39명 등 86명을 배출하고는 1903년까지 장기간의 표류에 들어갔다. 정치적 혼란 속에 법관양성소가 문을 닫은 것으로 여겨지지만, 일단 시급한 법관 수요는 채웠기 때문에 법관양성소를 운영할 필요가 줄어들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 <법관양성소 규정>(1895년 4월 19일 반포, 4월 25일 시행). 법학통론, 민법, 형법, 민사소송법, 형사소송법, 현행법률, 소송연습 등 학과목뿐만 아니라 주(週) 수업 시간도 규정되어 있다. ⓒ프레시안

법관양성소에서 새로운 법률에 따른 소송을 담당할 실무 관료는 양성했지만, 조선(한국)인들이 본격적으로 "근대 법학"을 처음으로 접하고 공부한 것은 일본 유학을 통해서였다. 특히 도쿄법학원(東京法學院, 나중에 주오(中央)대학으로 개편)이 초기에 그런 역할을 담당했다.

1895년 유학생으로 도쿄법학원에서 수학한 사람은 유창희(劉昌熙), 정재순(鄭在淳), 유진방(兪鎭方), 장규환(張奎煥), 박만서(朴晩緖), 안경선(安慶善), 유치학(兪致學, 兪致衡으로 개명), 이면우(李冕宇), 원응상(元應常), 장도(張燾) 등이었다.

유창희는 도쿄법학원 동기생 유치학, 이면우, 장도와 같이 1899년 11월 하순 귀국했다. 이때 일본 주재 공사서리 박용화(朴鏞和)가 이들을 관리로 임용할 것을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유창희는 이듬해 2월부터 광흥학교 법률과에서 장도와 함께 교사로 근무했다.

▲ <고종실록> 1901년 10월 9일(음력)자. 박영효와 연결된 하원홍(河元泓)의 정부 전복 음모 사건에 대한 기사이다. 유창희는 도피하여 체포를 면했다고 되어 있다. 적지 않은 도일 유학생들이 여러 가지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목숨을 잃거나 패가망신했다. ⓒ프레시안
유학 시절 민권 사상에 눈을 뜬 유창희는(제69회) 1901년 10월 무렵 하원홍(河元泓)의 정부 전복 음모 사건에 연루되었지만 미리 피신하여 체포는 면했다. 그 뒤의 행적은 기록으로 확인되지 않는다.

정재순은 1906년에야 한성재판소 주사에 임명되었으며, 그 뒤 함흥 군수 등을 지냈다. 그리고 장규환(1874년생)은 1901년 법부 주사로 발령받았지만 며칠 뒤 그만 두고는 그 뒤로 왕실의 말(馬)과 가마를 관리하는 태복사(太僕司) 주사, 종묘서령(宗廟署令) 등의 직을 맡았다.

박만서(1879년생)는 1906년부터 법부 법률기초위원, 평리원 판사, 법관양성소 교관을 지냈으며, 1909년부터는 변호사로 활동했다. 1920년에는 경성조선인변호사회 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안경선(1874년생)은 1899년 11월 에바라군(荏原郡) 농과대학을 졸업한 직후 도쿄법학원에서 교외생(校外生)으로 수학한 경우이다(제68회). 1903년 잠시 중추원 의관을 지냈으며, 1905년 11월부터 경찰에 투신하여 경무청 권임(權任)과 총순(總巡) 등의 직책을 맡았고 일제 시대에도 1920년대까지 경찰에서 근무하여 경시(警視)직까지 올랐다.

유치학(1877~1933년)은 1900년 8월부터 공립 철도학교 교사로 근무했으며, 1901년 9월 법부의 법률기초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902년 6월부터는 궁내부 회계과장, 제도국 참서관, 이왕직(李王職) 사무관 등 주로 왕실 업무를 보았다. 또 유치학은 왕족과 귀족의 교육기관인 수학원(修學院) 교관도 지냈으며, 대동전문학교와 보성전문학교에서 헌법, 민법, 해상법 등을 가르치기도 했다. 유치학은 1948년 대한민국 제헌헌법을 기초한 유진오(兪鎭午, 1906~1987년)의 아버지이다.

▲ 이면우가 펴낸 <회사법>(1907년)의 머리말. 일본 유학 동기인 신해영이 교열(檢閱)했다. ⓒ프레시안
이면우는 1902년 농상공부 주사로 관직을 시작해 1904년 한성재판소 검사를 거쳐 1905년부터 1906년까지 법관양성소 소장을 지냈다. 1906년부터 변호사로 활동한 이면우는 1907년, 1908년에 한국 최초의 변호사 단체인 한성변호사회의 초대 및 2대 회장을 지냈다. 그리고 1910년 이재명 재판 때에는 피고인들의 변호를 맡았다.

원응상(1869년생)은 도쿄법학원을 졸업하고 다시 부기학교(簿記學校)에서 잠시 공부한 뒤, 세무관리국과 일본은행에서 실무 견습을 받고 귀국했다. 그는 1902년 탁지부 주사를 시작으로 외부 번역관과 참사관, 의정부 참사관, 탁지부 사세국장(司稅局長), 수도국장 등을 지냈다. 그런 한편 보성전문학교에서 경제학을 가르쳤다.1907년, 원응상은 당시 보성전문학교 교장이던 유학 동기 신해영의 교열을 받아 <재정학>을 출간했고, 또 신해영과 공저로 <경제학>을 출간했다. 보성전문학교 교과서로 쓰인 것으로 보이는 이 두 가지 책은 개화기에 한국인이 저술한 경제학 서적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원응상은 1910년 전라남도 참여관, 1918년 강원도 지사, 1921년 전라남도 지사, 1924년 중추원 칙임참의(勅任參議)를 지내는 등 일제에 적극 협조했다.

장도(1876년생)는 도쿄법학원을 졸업하고 3개월 동안 대심원 도쿄공소원, 도쿄지방재판소 및 검사국에서 실지사무견습을 한 뒤 1899년 11월 귀국했다.

1900년 2월부터 사립 광흥학교에서 법학통론, 형법, 재판소구성법, 일본어 등을 가르쳤으며, 1901년 11월에는 의학교 교관으로 임용되어 1904년 10월까지 3년 동안 근무했다. 그 뒤 외부 번역관을 거쳐 1905년부터 평리원 검사, 법부 법률기초위원, 변호사 시험위원, 한성재판소 판사, 법관양성소 교관 등을 지냈다. 1908년부터는 변호사로 활동했다. 또한 한성법학교, 보성전문학교, 양정의숙 등 사립 교육기관에서 형법과 법학통론 등을 가르쳤다.

장도는 판검사와 변호사로 이름을 날렸으며 한국 형법학의 선구자로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형법론 총칙(刑法論總則)>(1906년)과 <신구 형사법규 대전(新舊刑事法規大全)>(1907년)은 개화기에 한국인이 저술한 법률 서적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라고 한다.

▲ 장도가 펴낸 <신구 형사법규 대전(新舊刑事法規大全)>(1907년). 상권 875쪽, 하권 484쪽의 대저(大著)이다. ⓒ프레시안

▲ <황성신문> 1910년 3월 15일자. 법률 서적 광고. 이 당시 법률 책의 저자는 장도, 유치형, 안국선, 박만서 등 거의 모두가 도일 유학생 출신이었다. ⓒ프레시안

통감부 시기부터 일제에 가까워진 장도는 결국 경기도 도평의회 의원을 거쳐, 1921년 중추원 참의로 임명되는 등 일제에 적극 협력했다.

장도는 또한 1919년 4월 조선인 변호사와 일본인 변호사들이 함께 참여한 경성변호사회 회장에 당선되기도 했다. 원래 일본인 변호사들의 경성(京城)제1변호사회와 조선인 변호사들만의 제2회로 분리되어 있었던 경성변호사회는 1919년 4월, 경성지방법원 검사정 고우츠(鄕津友彌)의 권고로 통합 총회를 조선호텔에서 개최했다. 당시 등록된 회원은 조선인이 31명, 일본인이 34명이었는데 일본인 몇 사람이 불참하는 바람에 장도가 일본인 오쿠보(大久保雅彦)를 한 표 차이로 물리치고 회장에 당선되었다. 하지만 일본인 변호사들이 이에 불복하여 1년 만에 다시 경성조선인변호사회와 경성내지인(內地人)변호사회로 분리되었다. 조선인변호사회는 초대 회장에 장도, 부회장에 박만서를 선출했다.

▲ <동아일보> 1920년 4월 1일자(창간호). 경성변호사회가 회장 문제로 1년 만에 다시 2개로 분리되었음을 보도했다. 일제 당국의 선전과는 달리, 식민지 지배 방식으로는 일선융화(日鮮融和)란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동아일보

도쿄전수학교(專修學校)에서 재정학을 공부한 사람으로는 유승겸(兪承兼), 신우선(申佑善), 지승준(池承浚), 서정악(徐廷岳) 등이 있었고, 김대희(金大熙)와 한진용(韓震用)은 도쿄상업학교에서 상업학을 수학했다.

이 가운데 유승겸(1876~1917년)은 1900년 전수학교 이재과(理財科)를 졸업한 뒤 대장성(大藏省)에서 사무견습을 마치고 1902년 귀국하여 관직 생활과 교편 생활을 하면서 저술 활동도 했다. 1906년 탁지부 주사를 시작으로 탁지부 세무과장과 경리과장을 지냈으며, 보성전문학교, 양정의숙, 관립 농상공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저서로 <중등 만국사(中等萬國史)>(1909년)와 <최신 경제교과서(最新經濟敎科書)>(1910년)가 있다.

신우선(1872년생)도 전수학교를 마친 뒤 대장성 사무견습을 거쳐 귀국했다. 1904년 법관양성소 교관에 취임했으며, 1905년에는 육군무관학교 교관이 되었다. 그리고 1906년부터는 탁지부 관리로 일했다.

지승준은 1899년에 귀국하여 사립 한성의숙(漢城義塾)과 그 후신인 낙영학교(樂英學校)에서 교사 생활을 했으며, 서정악은 주로 궁내부 관리로 근무했다. 한진용도 1905년부터 돈녕사(敦寧司)와 내장사(內藏司)의 주사를 지냈다.

김대희(1878년생)는 귀국 후 낙영학교 교사로 일하다 1904년에는 관립 농상공학교 교관이 되었다. 그리고 다시 1906년부터 사립 광신상업학교(廣信商業學校)에서 교편을 잡았다. 또한 1909년에는 부기원리의 응용을 가르칠 목적으로 부기전습소(簿記傳習所)를 세우기도 했다. 그는 강점 뒤 보성전문학교에서 상업학을 강의하다 얼마 안 되어 그만두고는 행적을 감추었다고 한다.

그는 <20세기 조선론(二十世紀朝鮮論)>(1907년), <응용상업부기학(應用商業簿記學)>(1909년) 등을 펴내었는데, 이 가운데 실업 발달과 교육 진작을 통해 일제에 맞설 것을 주장한 <20세기 조선론>은 1909년 통감부의 압력으로 발매 금지 처분을 받았다.

▲ 김대희가 지은 <20세기 조선론>(1907년)의 표지(왼쪽)와 서지사항(오른쪽). 표지에 "비(秘)"자가 찍혀 있다. 신해영의 <윤리학 교과서>, 안국선의 <금수회의록>과 함께 통감부 시기의 대표적인 금서였다. ⓒ프레시안

1895년 도일 유학생 중 고등교육기관까지 졸업한 사람들의 귀국 후 활동을 3회에 걸쳐 살펴보았다. 이들은 당시 국내에서는 배울 수 없었던 여러 분야의 신학문을 공부했지만 정부의 냉대와 견제 속에서 자신들의 역량을, 특히 관계(官界)에서는 충분히 발휘할 수 없었다. (과학기술, 공업, 의학 분야는 상대적으로 여건이 나아서 관립 학교 교관 등을 지내면서 자신들의 지식과 능력을 활용할 수 있었다.) 대신 이들은 사립학교 등 민간 부문에서 교육, 계몽, 저술 활동 등을 통해 한국의 근대화와 자주화를 위해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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