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크탱크에 관해서 좀 더 알아보고 싶던 참에 유럽연합 집행위위원회 무역위원을 거쳐 2005년부터 세계무역기구(WTO) 사무총장을 맡고 있는 파스칼 라미가 추천한 <싱크탱크 : 아이디어 전쟁의 두뇌들(Les Think Tanks : Cerveaux de la guerre des idees)>을 접하게 됐다.
파스칼 라미는 프랑스 사회학자 오귀스트 콩트의 말대로 "결국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아이디어"라고 믿고 '우리의 유럽(Notre Europe)'이라는 싱크탱크를 직접 창설하고 운영한다. 라미가 현재 WTO 사무총장을 맡고 있기 때문에 직접 저자로 나서지 않고 함께 일했던 스테팡 부셰와 마르틴 로요를 저자로 내세웠다.
하지만 이 책 전체를 통해서 라미의 생각이 많이 반영돼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라미는 오늘의 싱크탱크는 단순한 "아이디어의 실험실"에 그치지 않고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 싸우는 "아이디어 전사"의 역할을 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고, 그런 시각은 이 책 전체를 관통한다. 이 책의 시각은 이렇다.
▲ |
따라서 싱크탱크는 단순히 사회문제를 분석하고 해결하는 아이디어를 만들어 내는 역할을 넘어 적대 아이디어를 파괴할 새로운 "아이디어 무기"를 생산하는 군수 공장으로 변질돼 가고 있다. 유감스럽게도 미국의 싱크탱크의 과반수가 그런 범주에 속한다. 특히 미국의 싱크탱크 특히 보수 싱크탱크가 이런 경쟁을 부추기면서 미국 사회를 양극화로 몰고 있다.
당연히 민주주의 수호를 외치는 진보 지식인들이 이에 맞서 방어에 나서야 하는데 이들의 반응은 아쉽게도 늘 더디다. 저자들은 진보 지식인이 아이디어 전쟁에서 이기고 있는 보수 싱크탱크에서 배워야 할 교훈도 군데군데 제시한다. 프랑스를 염두에 둔 얘기지만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충고로 보인다.
저자들은 싱크탱크는 민주주의를 활성화하고 공익 정책 수립에 국민의 참여를 권장하는데 필요불가결한 조직인데도 프랑스가 이 분야에서 뒤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예를 들자면, 프랑스는 유럽연합(EU) 안에서 독일과 함께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데도, EU의 통합 활동에 반대하는 영국의 싱크탱크가 EU 안에서 더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역설 같은 일이 실제로 진행 중이다.
사정이 이렇게 된 데는 이유가 있다. 프랑스 국민이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싱크탱크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었고 1990년대 와서야 그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프랑스 국민에게 싱크탱크의 역할을 알리는 교육용 안내서로도 기능한다. 이 책이 나온 것이 2006년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면, 프랑스 싱크탱크 인식의 현주소를 알 수 있다.
싱크탱크가 미국에서 발달한 것은 정치 환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미국에는 약 1500개 이상의 싱크탱크가 있다. 수도 워싱턴에만 300개가 활동한다. 대통령이 교체될 때마다 각료급 이하 5단계까지 정부 관리 4000~5000명이 한꺼번에 교체되는데, 이 고급 관리의 상당수가 싱크탱크 출신으로 채워진다. 담당 분야의 일을 아는 사람으로 채울 수밖에 없기 때문에 나타나는 불가피한 현상이라는 게 저자들의 지적이다.
'옹호 탱크'의 등장
싱크탱크는 원래 중대한 위기에 맞서 국가가 단독으로 해결책을 찾지 못할 때 민간 두뇌가 나서서 해결책을 제안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두뇌 조직이다. 싱크탱크의 원조로 알려진 영국의 페이비안협회가 1884년에 창설된 된 것도 산업혁명의 후유증으로 발생한 빈곤 문제, 노동 문제를 해결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미국에서도 제1차 세계 대전, 1929년 대공황, 제2차 세계 대전, 1970년대 석유 파동,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등 국내외의 급변하는 정세에 대응해서 어떻게 미국의 국익을 유지할 것인지 모색하는 과정에서 싱크탱크가 많이 출현했다. 애초에 싱크탱크는 공익적 존재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석유 파동 직전에 설립된 미국의 헤리티지재단처럼 보수 세력이 보수 이념을 지키려고 만든 싱크탱크들이 늘어나면서 싱크탱크가 탈선하기 시작한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만들어 내는 것보다는 이미 존재하는 가치와 아이디어를 수호하고 전파하는 것을 목적으로 활동한다는 의미에서 '옹호 탱크(advocacy tank)'라고 부르는 싱크탱크가 등장한 것이다.
옹호 탱크는 그야말로 미국이 세계를 지배하는 전략을 개발하고, 이념적으로는 진보 이념의 확산을 막고 보수 이념이 미국 사회의 주류 가치로 군림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렇게 제국주의와 극우 세력이 싱크탱크의 이미지를 바꿔놓으면서, 이제 좋은 싱크탱크와 나쁜 싱크탱크를 구별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가장 경계해야 할 옹호 탱크로 지탄받는 싱크탱크는 '새로운 미국의 세기를 위한 프로젝트(Project for New American Century)'이다. 이것은 일단의 정치 엘리트들이 1990년대 초에 만든 것이다. 이들은 소련이 붕괴되고 미국이 유일한 초강대국으로 남게 된 상황에서 미국이 영원히 세계를 지배하는 국제 질서를 구축하려는 비전을 공유한다.
전쟁을 기획하는 싱크탱크
근래에 와서 싱크탱크는 존경보다는 위험한 경계 대상으로 보는 사람까지 생겼다. 영국 <가디언>의 논설위원 스티브 워터는 "세상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는 "첩경은 테러리즘이나 싱크탱크를 이용하는 것이다"고 대답한다. 폭탄을 투척하는 테러리스트와 싱크탱크를 같은 "위험한 정신의 소유자"로 분류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들은 이런 워터의 글을 근래에 싱크탱크 이미지가 얼마나 추락했는지를 보여주는 한 예로 들었다. 너무 황당한 비교라고 생각될지 모르지만 다음에 소개하는 'PNAC 계획(이라크 침공 계획)'을 읽어보면 생각이 달라지리라 믿는다.
1997년 소수의 신자유주의자들이 '록히드마틴(Lockheed Martin)'과 같은 군수 기업의 지원을 받아 만든 PNAC는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 같은 "불량 국가들"에 대한 미국의 "예방 전쟁" 계획을 작성한다. 이 싱크탱크는 1998년 클린턴 대통령에게 계획서를 담은 편지를 보내고 후세인 정권 전복을 제안한다.
부시의 이라크 전쟁을 거슬러 올라가면 이미 7년 전 PNAC 기획을 공동 작성한 폴 울포위츠와 루이스 리비의 구상을 재발견하게 된다. 2003년 전쟁은 부시가 한 순간에 갑작스런 변덕으로 시작한 것이 아니다. 잘 조직된 인간 네트워크가 1997년부터 집요하고 치밀하게 열정적으로 작성한 시나리오에 따라 연출된 것이다.
울포위츠는 이미 1992년 루이스 리비와 함께 딕 체니에게 새로운 미국 방위 계획서를 올린다. 몇 주간 국방부 안에서 나돈 46쪽의 보고서의 핵심은 이렇다..
"세계 질서를 다시 세워야 한다. 종래의 억지(deterrence) 정책은 냉전이 끝난 지금 근거를 잃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유럽, 아시아, 러시아에 대해서 미국의 초강대국 지위를 유지할 새로운 세계 전략으로 대체해야 한다." "우리의 제1목표는 새로운 경쟁국의 출현을 막는 것이다. (…) 미국을 위협할 수 있는 나라는 예방적인 방법으로 공격해야 한다."
이 보고서는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가 보도하면서 큰 파문이 일어났다. 가상 경쟁국으로 지목된 유럽, 아시아 나라들의 항의가 잇달았다. 딕 체니는 보고서를 다시 써야 했다. 그러나 기본적이 구상이 바뀐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2001년 1월 21일 조지 부시의 대통령의 취임과 함께 이론이 현실이 된다.
백악관 입주 며칠 후 부시는-당시는 비밀이었다-군부에 이라크 전쟁 준비 시나리오를 작성하도록 지시한다. '부시 독트린'이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그는 취임하자마자 PNAC 계획 작성자들을 그의 정부에 합류시킨다. 그들의 구상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제 딕 체니는 부통령이고, 루이스 리비는 체니의 비서실장이다.
보수의 싱크탱크 미국기업연구소(AEI)의 부소장 존 볼튼은 군축 담당 차관이고 리처드 아미타지는 국무부 부장관이다. 이렇게 최소한 16명의 PNAC 기획 참가자들이 부시 정부 요직에 임명된다. PNAC 계획은 그 때부터 실행 중비 단계에 들어간다. 부시는 2002년 웨스트포인트 연설에서 새로운 국가 전략을 정의한다.
부시는 "대량 살상 무기나 장거리 미사일을 획득하려는 국가나 테러 조직에 대해서 선제 공격을 할 권리"를 선언한다. 처음에는 고립된 개인들의 상상에 불과했던 미국의 세계 지배 비전들이 하나의 구체적인 국가 정책 프로그램으로 확정되고 역사의 흐름을 바꾸게 된 것이다.
이상은 오늘날 다 확인된 사실이다. 애초에 비밀도 아니었다. PNAC 기획에 우호적인 싱크탱크는 이런 내용을 인터넷에 올리고 공공연하게 홍보하면서, 다른 싱크탱크와 토론했다. 스티브 워터는 이런 모습을 놓고 이렇게 규탄한다.
"이성 잃은 실력자의 노리개 역할을 하는 싱크탱크가 이렇게 무책임하게 행동할 권리를 누가 주었느냐?"
참담한 실책이었음이 입증된 PNAC는 헤리티지재단과 이에 못지않은 영향력을 가진 AEI 산하의 조직이었다. 사무실도 AEI 건물 안에 있다. 부시는 2003년 "여러분이 너무 일을 잘해서 그 중 20명의 두뇌를 빌려왔다"고 공공연하게 칭찬했다. 이것이 미국 옹호 탱크의 현실이다.
이런 보수 싱크탱크들이 정치 뉴스를 지배해서 미국 정치를 양극화하는데 앞장서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보수 싱크탱크의 이성을 잃은 공세에 자유주의자(진보)들의 반응은 느리고 미약하다. 미국 사회가 지난 30년 사이 놀랍게 보수화한 배경이다.
양극화하는 싱크탱크
저자들에 의하면 1960~70년대가 미국 싱크탱크의 황금시대였다. 그 후 싱크탱크 숫자는 몇 배로 늘어났지만 일의 질은 오히려 떨어졌다. 그 책임의 많은 부분은 옹호탱크가 져야 할 것 같다. 싱크탱크 전문가인 앨런 데이에 의하면, 오늘날 싱크탱크의 유형을 보면 45%가 옹호 탱크, 38%가 대학 연구, 10%가 정당 위탁 연구, 7%가 계약 연구로 분류된다.
또 다른 싱크탱크 전문가인 앤드류 피치에 의하면, 싱크탱크의 이념적 성향이 1970년대 조사에서는 4분의 3이 중도로 평가됐는데 2000년에는 55%가 좌익 도는 우익으로 극단화한다. 미국 사회가 양극화 되고 있는 중요한 원인의 하나다. 여기에 보수 언론이 보수 싱크탱크의 선동에 가세해서 사태를 악화시킨다.
다행히 유럽은 미국에 비해 싱크탱크의 양극화 현상이 훨씬 덜하다. 싱크탱크에 자금을 대는 보수단체와 대기업이 더 적기 때문이다. 저자들은 미국 싱크탱크에 자성을 요구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한국이 싱크탱크는 어떤가? 미국의 좋지 않은 관행을 모델로 삼고 있지는 않는가? 하는 걱정으로 마음이 무거웠다.
특히 재벌 기업들이 거느리고 있는 싱크탱크들이 미국 보수 기업이나 단체의 오류를 모방할 생각을 하고 있지나 않는지 걱정이 됐다. 특히 한국의 진보 지식인이나 진보 세력도 이제 싱크탱크의 역할에 관심을 갖고 보수의 싱크탱크 활동을 주시하고 대책을 세울 준비를 해야 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