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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던져버리고 싶은 이 마음을 아십니까?

[親Book] 독자로서, 번역을 하시는 분들께

번역을 하시는 분들에 대해서는 어릴 적부터 깊은 존경심과 고마움을 갖고 있다. 추리 소설이나 공포 소설, 기타 우리 어머니가 "저 쓸데없는 책들"이라고 부르시던 책에 탐닉하던 학창 시절, 하루가 멀다 하고 동네 서점을 기웃거리면서 새로 번역된 책이 있는지 찾아 헤매곤 했다(정확한 어원은 모르겠지만 요즘은 이런 책들을 장르 소설 혹은 장르 문학이라는 멋진 이름으로 부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저작권이라는 개념조차 낯설 때, 해적판으로 번역되어 나오던 일본 만화책을 기다리느라 애를 태우던 기억도 있다. <시티 헌터> 원서가 나오면 한 달 남짓 만에 꼬박꼬박 번역을 해주신, 누군지 모르는 번역가에게 이 자리를 빌어서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이렇듯 장황하게 번역가에 대한 사랑을 늘어놓는 것은 아무리 애정이 깊다한들 불만이 없을 수는 없는데, 그 불만의 일단을 얘기하고 싶어서다. 외국어 실력이 없어서 원서를 못 읽는 주제에 무슨 불만이냐, 설사 번역에 이의가 있어도 원문과 대조해서 비판을 할 만한 능력도 없지 않느냐고 비웃는다면 할 말은 없다.

그러나 번역서도 책이고, 책은 독자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번역서를 사랑하는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가끔 속이 답답하고 때로는 분통이 터질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일이 있다면, 그런 심정을 감추는 것보다는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이 오히려 애정을 더 깊고 오래가게 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몇 가지 불만을 적어본다.

최근에 우연히 서점에서 대공황과 관련된 책을 읽다가 첫 페이지부터 좌절한 일이 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세 번째 문장에서 역자는, "그는(미국 31대 대통령 후버는) 취임 연설을 통해 1920년대에 공화당이 열렬하게 지지를 받던 시절로 돌려놓았다" 라고 써놓았다. 도대체 뭘 돌려놓았다는 말인가? 목적어가 없어서 어색하기 짝이 없을 뿐만 아니라 무슨 뜻인지 알기도 어렵다.

할 수 없이 원문을 찾아보니 'wax'라는 단어를 '돌려놓다'로 옮겨놓은 것이었다. 그러나 가지고 있는 몇 개 안 되는 사전을 아무리 뒤져봐도 'wax'라는 동사에 '돌려놓다'는 뜻은 없다. 아마도 '말하다, 표현하다(to speak or express oneself)'의 의미로 쓰인 것으로 보인다. 이런 번역서를 읽는 독자는 앞뒤 문맥을 보면서 뜻을 어림짐작할 수밖에 없다.

문장 하나를 놓고 너무 트집을 잡는 것 아니냐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책 전체가 원작과 전혀 달라지는 경우도 없지 않다. 아예 내놓고 개작을 하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지금은 절판이 되어 구하기 어렵지만, 미국 프로농구리그(NBA)의 악동 데니스 로드맨의 책이 번역되어 나온 일이 있다.

로드맨이 누구인가. 경기 중 몇 골 넣지도 못 하면서(슛에는 관심이 별로 없다) 리바운드와 수비로 전 세계를 열광시킨 선수이자, 우리 모두가 사랑하는 <슬램덩크>의 주인공 강백호의 모델이 아닌가. 그가 책을 냈다는 소식이 들렸을 때 많은 사람들이 애타게 번역을 기다렸다. 그러나 마침내 1997년에 나온 <나쁜 녀석들(Bad as I wanna be)>(이화승 옮김, 하늘출판사 펴냄)을 손에 들었을 때, 기다렸던 많은 사람들은(적어도 나는) 실망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오래 되어서 정확한 단어는 기억나지 않지만, 번역자는 독자들(주로 청소년을 생각한 것 같다)에게 미칠 영향을 고려해서 표현과 내용을 순화시켰다고 설명해놓았던 것이다. 그 좌절이라니. 물론 실망의 마음속에 마돈나와의 스캔들로도 유명한 로드맨의 사생활을 엿보려는 검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고는 못 하겠다. 그러나 책을, 원작자가 쓴 내용과 표현 그대로 읽는 것은 독자의 권리가 아닌가. 로렌스의 <채털리 부인의 연인>에서 성적인 묘사를 들어내고 번역을 하면 그게 같은 책이라고 할 수 있을까.

PGA에서 로드맨 못지않은 악동으로 이름을 날린 존 댈리도 자서전을 냈다. 제목부터 욕설이 들어간(친절하게 xxxx로 표시하기는 했다) 이다. 보통 사람이 이해하기 힘든 도박벽과 음주, 기행으로 점철된 내용이지만, 솔직한 그의 고백은 적지 않은 감동과 재미를 준다. 데니스 로드맨이나 존 댈리나 나름의 좌절을 극복하고 일가를 이룬 사람들이다. 번역물을 봐야 하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로드맨이 쓴 책을 순화시켜서 읽어야 할까. 이러한 '배려'는 독자들에게 모욕감을 줄 뿐이다.

▲ <우울과 몽상>(에드거 앨런 포 지음, 홍성영 옮김, 하늘연못 펴냄). ⓒ하늘연못
그러나 이렇게 내놓고 개작을 하는 것은 차라리 낫다. 정말 최악의 번역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원작 중 많은 부분을 뜻이 안 통하게 번역하거나 아예 빼놓는 경우다. 2002년에 나온 에드거 앨런 포의 단편소설을 모아놓았다는 <우울과 몽상>(홍성영 옮김, 하늘연못 펴냄)이라는 책이 있다. 8년 전에 나왔지만 아직도 대형 서점의 매대에 놓이는 스테디셀러이고, 한국방송(KBS) 에서 2002년도 올해의 책으로 선정했다는 책이다. 우연히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영어 소설 강독을 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모르그가의 살인' 부분을 읽었는데 지금까지도 이 책 생각만 하면 화가 난다.

외국어는 우리말과 어순을 비롯한 구조 자체가 달라서 번역에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니다. 약간 번역체의 냄새가 나더라도 원래 문장의 맛을 살리기 위해서 직역을 할 것인가 혹은 완전히 우리말로 바꿀 것인가는 번역을 하는 사람의 결단에 달려있기 때문에 제3자가 뭐라고 말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너무나 자주 원문과 반대되는 해석을 하거나 해석이 쉽지 않은 문장을 빼 버리거나 심지어 문단 자체를 통째로 누락해 놓은 걸 보면 번역자, 편집인의 양식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지적하고 싶은 부분이 너무나 많지만 반 페이지 가량을 누락한 부분만 적어둔다. '모르그가의 살인'은 소설 사상 최초로 탐정을 등장시킨 추리 소설이다. 주인공인 뒤팽이 등장하기 전에 화자는 분석가(탐정)란 어떤 사람인지를 여러 가지 게임의 예를 들어 설명을 한다. 그런데 체스, 체커에 뒤이어 휘스트라는 카드 게임이 등장하는 부분이 번역서에는 완전히 누락되어 있다. 도대체 번역을 한 사람이나 편집자가 원문을 읽기나 했는지 의심스럽다. 번역기에 돌리면 번역은 엉망이지만 최소한 빠지는 부분은 없다. 정말 본인이 번역을 하긴 한 건지.

옮긴이의 말에서 번역자는 포의 소설을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에 비유하기도 하고 원작에서 '숙연함을 느꼈다'거나, '커다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고 감탄을 한다. 쉰여덟 편의 단편이 한결같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에 놀라움을 표시하기도 한다. 독자의 입장에서는 뭐라고 할 말이 없다.

얼마 전 우리 번역계의 큰 별이라고 할 수 있는 이윤기 선생이 돌아가셨다. 기억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선생에게는 예전에 '전담 비평가'라고 할 만한 분이 계셨다. 작년에 돌아가신 이재호 교수가 그분이다. 이재호 교수가 2005년에 펴낸 <문화의 오역>(도서출판 동인 펴냄)을 보면 책의 거의 대부분이 이윤기 선생의 번역에 대한 비판으로 되어있다. 보기에 따라서는 거의 인신공격에 가까운 부분도 있다.

순전히 개인적인 취향을 말해도 좋다면, 이윤기 선생의 번역 스타일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장미의 이름>에서 선생은 '수도원에서 일하는 일꾼' 정도로 쉽게 번역해도 괜찮을 것 같은 단어(servant)를 '불목하니'라는 어려운 말로 번역을 하고 있다. 가뜩이나 난해한 책을 더 어렵게 만들 필요가 있을까. 그리고 불목하니는 수도원이 아니라 절에서 일하는 사람 아닌가-무척 흥미 있게 읽었다. 두 분은 번역 결과물을 놓고 신문 지상에서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이윤기 선생이 번역한 책들 중에는 단순히 언어만 공부해서는 부족한 신화 등에 관한 내용이 많았기 때문에 고전을 연구한 학자들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장미의 이름>을 분석한 강유원 씨는 번역서의 개정판에 큰 영향을 주었고, 강대진 씨는 <잔혹한 책읽기>(작은이야기 펴냄)에서 이윤기 선생이 번역한 조지프 캠벨의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The hero with a thousand faces)>(민음사 펴냄)의 오류를 지적했다.

이윤기 선생은 이런 비판을 받을 때마다 책을 개정하고 바로 잡았다. 번역에서 일가를 이룬 대가가 "매우 부끄러웠다"고 고백하면서 오류를 지적해준 사람에게 감사를 표하는 것을 보면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선생을 기리고 선생이 번역한 책을 좋아하는 이유에는 이런 점에 대한 존경심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이윤기 선생 같은 대가가 아니더라도, 독자들은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고 알지 못하던 이야기를 들려주는 번역가들을 존경한다. 다만 번역을 위해서 애쓰시는 분들에 대한 의존이 큰 만큼, 가끔씩 읽어주기 힘든 번역에 큰 실망을 하는 것도 사실이다. 엉터리 번역 때문에 짜증을 내고, 참다못해 인터넷 서점 댓글 란에 별 하나짜리 평가를 하는 분들이 있다.

그런 댓글을 볼 때마다 책을 던져버리고 싶었을 그 심정이 너무나 이해가 간다. 똑같은 심정으로 나도 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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