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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을사늑약에 맞선 '마지막 저항' 그러나…

[근대 의료의 풍경·59] 정재홍의 자결

항일 구국·독립 운동 가운데 한 가지 중요한 수단은 의열(義烈) 투쟁이었다. 일제에 의해 나라가 병탄되기 전까지 대표적인 의열 투쟁으로는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처단, 장인환과 전명운의 스티븐스 주살(誅殺)을 들 수 있다.

의열 투쟁은 필연적으로 살상을 동반하는 것이어서 당시나 지금이나 그에 대해 적지 않은 논란이 있다. 당시 가톨릭 조선 교구장이었던 뮈텔은 안중근의 행위에 대해 "공공의 불행으로 증오를 일으켜야 하는 것"이라고 비난했으며(제52회), 장인환의 법정 통역을 요청받은 이승만은 "기독교인으로서 살인자를 도울 수 없다"라며 협조를 거절했다(제39회). 하지만 폭력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그 폭력의 근본적 원인인 제국주의 침략에 대해 눈감는 것이라면 정당성을 인정받기 어려울 것이다.

일제의 침략에 대한 한국인의 저항은 임오군란, 갑오농민전쟁, 을미의병 등 역사가 깊지만 특정인을 대상으로 한 의열 투쟁은 을사늑약의 강제 체결을 계기로 본격화된다.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안중근에 앞서 이토 히로부미에게 응징을 감행한 사람은 시흥의 농민 원태근(元泰根, 1882~1950년)이었다. 그는 늑약 체결 5일 뒤인 1905년 11월 22일 이토가 탑승한 열차가 안양역을 지나간다는 사실을 알고는, 열차가 역에 정차했을 때 돌을 날려 열차 유리창을 파괴하고 이토의 얼굴과 왼쪽 눈에 부상을 입혔다.

공격 방법으로 보아 원태근이 이토를 살해할 의도를 가졌다고는 보기 어렵고, 단지 이토에게 위협을 가하고 한국인의 기개를 보이기 위한 행위였을 것이다. (하지만 삼엄한 공포 분위기에서 침략의 수괴 이토에게 투석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제는 한국인들의 민심을 자극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는지 원태근에게 태형 100도(度, 대)라는 비교적 가벼운 형벌을 가했다. (이 당시 재판권은 아직 일제에게 넘어가지 않은 상태였지만 그렇다고 이러한 사건에 대해 한국인 판사가 독자적으로 판결했다고 생각할 수는 없을 것이다.)

▲ 을사늑약을 강제 체결한 뒤 찍은 사진. 앞줄 한 가운데 검은 복장이 이토 히로부미이고 그 왼쪽이 조선주둔군 사령관 하세가와다. 이때 한국은 계엄 상태나 다름없었다. ⓒ프레시안

한국인들의 분노와 증오는 침략의 원흉인 일본 국왕 메이지(明治), 이토 등 일본인 고관, 하세가와 등 일본군 장군들보다는 오히려 을사 5적 등 내국인 친일파들에게 향했다. "대국" 러시아를 물리친 일본의 위세에 한편으론 위축되고, 또 한편으로는 같은 황인종으로서 그들을 부럽게도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또 당시 세계를 풍미하던 사회진화론, 약육강식론, 부국강병론도 제국주의에 대한 한국인들의 현실 직시를 크게 방해했다.

(안중근도 러일전쟁 직후에는 황인종이 백인종을 이겼다고 기뻐하며 일본이 동양 평화의 맹주가 되기를 희망했다. 심지어 이토를 처단하고 자신은 일제에 의해 처형되면서도 제국주의와 일본 천황제에 대한 인식에 불철저한 점이 있었던 것 같다. 안중근은 체포된 뒤 이토가 일본 국왕을 속여 동양 평화를 파괴했다고 진술했다. 사실 우리 자신도 오늘날의 침략주의에 대해 여전히 나이브한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친일 매국적들에 대한 의열 투쟁의 대표적인 인물로 기산도와 나인영을 꼽을 수 있다. 기산도(奇山度, 1878~1928년)는 호남 의병장 기삼연(奇參衍, 1851~1908년)의 종손이며, 구례 연곡사에서 전사한 의병장 고광순(高光洵, 1848~1907년)의 사위이기도 하다. 기산도는 을사늑약에 부화뇌동한 을사 5적을 척결함으로써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고 내외에 한국인의 국권 회복 의지를 나타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기산도는 이종대(李鍾大), 김석항(金錫恒) 등 11명을 규합하여 결사대를 조직하고, 1906년 2월 을사 5적 가운데 하나인 군부대신 이근택의 집에 쳐들어가 그에게 자상을 입혔지만 살해에는 실패했다.

한편, 나인영(羅寅永, 1863~1916년)도 을사 5적을 암살하기 위한 결사대를 조직하여 1907년 3월 이지용, 박제순, 권중현을 살해하려 했지만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나인영은 그러한 행위로 지도(智島)에 유배되었다가 1년 만에 특사로 풀려났다. 그 뒤 나인영은 종교 활동에 헌신하여 대종교를 중창(重創)했으며, 그때부터는 주로 나철(羅喆)로 불렸다.

이렇게 친일파 응징도 지지부진할 때인 1907년 6월 30일 한 가지 사건이 발생했다. 그것은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 인천지회장 정재홍(鄭在洪)이 인왕산 아래 장동(壯洞)에 있는 농상소(農商所)에서 열린 박영효 환영식에서 육혈포(六穴砲)로 자결한 사건이다. 정재홍은 대한자강회의 유력 간부이자 인천 인명의숙(仁明義塾)의 설립 운영자였으며, 그해 초부터 시작된 국채 보상 운동에도 단연동맹회(斷煙同盟會)를 조직하여 참가하는 등 활발한 사회 활동을 벌여왔던 인물이다.

그러면 정재홍은 왜 자결한 것일까? 그것도 하필 10여 년 만에 귀국한 박영효를 환영하는 자리에서. 정재홍은 박영효 환영식 자리에 이토 히로부미가 참석한다는 사실을 알고 그를 살해하기 위해 그곳에 갔다가 예정과 달리 이토가 불참하여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자결한 것이었다. (이토 처단을 위해 정재홍이 환영식을 주선했다는 설도 있다.) 계획에 이러한 차질이 생겼을 때 그가 거사를 뒷날로 미루는 대신 자결을 선택한 이유는 확실치 않지만, 계획이 탄로나 어차피 잡혀 고초를 당할 바에야 (또는 조직과 동지들을 보호하기 위해) 자결하는 편이 오히려 낫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어쨌든 대한민국 정부는 정재홍이 이토를 살해하려고 시도했던 것은 틀림없다고 판단하여 거사를 시도한 지 꼭 100년 만인 2007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미수에 그쳤지만 정재홍이 이토 암살을 기도했던 것은 송상도(宋相燾, 1871~1946년)의 <기려수필(騎驢隨筆)>과 정교(鄭喬, 1856~1925년)의 <대한계년사(大韓季年史)> 등 당대의 기록이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 신문들, 특히 <황성신문>은 정재홍의 죽음과 장례식, 추도식에 대해 연일 기사를 쏟아내었다. 신문에는 정재홍이 유언조로 지어서 남긴 "사상팔변가(思想八變歌)"와 "생욕사영가(生辱死榮歌)"가 그대로 게재되었다. 연이은 기사들에는 이토 히로부미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다. 하지만 "나라하고 상관된 공변되게 미운 놈 한 매에 쳐 죽여서 이 내 분 풀리로다" "지사 열만 잘 죽으면 잃은 국권 되찾는다"라는 가사 구절을 보면 정재홍의 의도가 어디에 있었는지 별도의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분명하다.

▲ <대한매일신보> 1907년 7월 2일자. <대한매일신보>도 <황성신문>에 비해서는 기사 양이 적지만 정재홍의 죽음에 대해 자세하게 보도했다. 정재홍이 유언조로 지어서 남긴 "사상팔변가(思想八變歌)"와 "생욕사영가(生辱死榮歌)"도 그대로 게재했다. 이 가사에도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하지만 "나라하고 상관된 / 공변되게 미운 놈 / 한 매에 쳐 죽여서 / 이 내 분 풀리로다" (마지막 줄은 빠져 있는데 일부러 뺀 것은 아닐 것이다) "지사 열만 잘 죽으면 / 잃은 국권 되찾는다"라는 구절을 보면 정재홍이 무엇을 하려다 자결했는지 별도의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프레시안

이토 히로부미와 일제 당국이 바보가 아닌 이상 정재홍의 자결 사유, 그리고 정재홍에 관한 기사를 연일 쏟아내는 신문들의 의도를 모를 리 없었을 것이다. 그럴수록 신문 보도는 더 신중해야 했고, 이토에 관해서는 일언반구를 비추지 않았다. 독자들에게는 이심전심으로 뜻을 전하면 되는 것이었다.

<황성신문>과 <제국신문>은 정재홍이 죽은 지 이틀 뒤인 7월 2일자부터 한 달 동안 "지사 정재홍군 유족 구조 의연금 모집(志士鄭在洪君遺族救助義捐金募集)" 운동을 벌여나갔다. 표면적으로는 유족에게 성금을 모아 주자는 명분이었지만 "정재홍 정신 이어 받아 국권 회복 이룩하자"라는 식의 선동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이 모금 운동의 발기인은 14명이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의사 또는 의학 교육자가 4명이나 되었다. 박종환(1903년 일본 지바의학전문학교 졸업, 당시 광통교 인근에서 개업), 김익남(1899년 일본 지케이카이 의학교 졸업, 1900년 의학교 교관, 1904년부터 육군 군의장), 유병필(1902년 의학교 졸업, 당시 대한의원 교육부 교수), 지석영(1899~1907년 의학교 교장, 당시 대한의원 학감)이 그들이었다. 박종환을 제외하고는 의학교의 핵심 멤버들이었다. 하지만 지석영은 2년 반 뒤에는 이토 히로부미의 추도회에 참석하여 추도사를 읽었다(제2회).

▲ <황성신문> 1907년 7월 2일자. "지사 정재홍군 유족 구조 의연금 모집 취지서". 발기인은 대부분 정재홍이 활동했던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 등 애국계몽운동 단체의 간부이었다. 겉모습은 고인의 유족에게 성금을 모아주자는 것이었지만, 정재홍의 자결 연유를 생각하면 일제에 대한 저항 운동이었다. 발기인으로 이름을 올리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더욱이 김익남, 유병필, 지석영은 관직에 몸담고 있는 처지였다. ⓒ프레시안

정재홍의 장례식은 7일장으로 7월 6일 거행되었다. <황성신문>은 "지사 정재홍 장례식"을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7월 6일 상오 11시에 발인하여 정동 예배당에서 예식을 거행했는데, 씨의 생전 역사는 학무국장 윤치오 씨가 설명하고 석진형 이동휘 김동완 제씨가 씨의 열성우국하던 사실을 비분강개한 언사로 차제 연설했고 목사 전덕기 최병헌 양 씨가 기도한 후에 아현 공동묘지로 출왕했는데 인(천)항 영화학교와 인명의숙과 경성고아원의 제 학도가 전도하고 일반 사회의 유지 신사가 다수히 호장(護葬)했다."

그리고 장례 8일 뒤인 7월 14일 열린 "정 지사 추도회"를 <황성신문>은 다음과 같이 전했다. "7월 14일 하오 1시에 대한자강회 및 일반 사회신사 제씨가 영도사에 회집하여 고 지사 정재홍 씨 추도회를 설행했는데, 개회 취지는 윤효정 씨, 정씨 역사는 장지연 씨, 연설은 정운복 씨인데 차제 출석하여 강개격절한 언론은 영인감루(令人感淚)요 산천수운(山川樹雲)이 처창실색(悽悵失色)하는 듯하더라더라."

사실 1907년 여름은 대한제국이 완전한 식민지로 전락하는지 여부가 결정된 "운명의 계절"이었다. 헤이그 밀사 사건, 그것을 구실로 한 고종의 퇴위 강요, 정미 7조약 체결, 군대 해산과 같은 역사적인 사건이 잇달아 일어났다.

연초부터 국채 보상 운동을 통해 민중들의 투쟁 역량을 결집해 온 민족운동 세력과 언론은 정재홍의 죽음을 최대한 활용해야 했다. (헤이그에서 열린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했다가 7월 14일 병사한 이준(李儁, 1859~1907년)이 할복 자결했다고 전해진 것도 단순한 착오는 아니었을 것이다.) 이것이 사실상 "마지막 승부"가 될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반면 일제로서는 그저 하루라도 빨리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우고" 싶었을 것이다. 1980, 90년대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연상시키는 장면이다.

그러나 민족운동권의 이러한 노력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국운은 점차 더 기울어져 갔다. 일제는 정재홍 추모 열기를 적절히 통제하면서 자신들의 계획을 그대로 밀고 나갔던 것이다.

▲ 정재홍의 장례식 이후 80년 만인 1987년 7월 9일의 이한열 장례식. 이만한 인파와 열기였으면 일제의 침략을 저지할 수 있었을까? ⓒ프레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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