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사이의 사랑은 압도적으로 이성애에 방점이 찍혀 있다. 그것은 너무나 자명해서 의문의 여지가 없는 것처럼 여겨져 왔고, 동성애는 오랫동안 일종의 질환이나 성적 변태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최근에 들어서 동성애는 새로운 이해의 대상이 되고 있다. 아직까지도 동성애가 완전히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어쨌든 동성애가 어두운 지하실을 나와 밝은 빛 속으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한 것은 분명하다.
루이 조르주 탱은 <사랑의 역사>(이규현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라는 야심만만한 책에서, 이성애는 처음부터 자명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으며, 오랜 기간에 걸친 사회적/문화적/정치적 헤게모니 투쟁에서 동성애를 밀어내고 우위를 차지한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그가 이러한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문학 텍스트를 꼼꼼하게 분석하는 것이다. 그가 분석 대상으로 택한 텍스트는 프랑스 문학 텍스트인데, 이 주제를 중심으로 한 권의 소략한 불문학사를 썼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12세기부터 20세기까지 통사적으로 이 문제를 살펴보고 있다.
▲ <사랑의 역사 : 이성애와 동성애 그 대결의 기록>(루이-조르주 탱 지음, 이규현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 ⓒ문학과지성사 |
무훈 시에 나타나는 남성들 사이의 감정은 단순한 우정 이상의 것이었다. 그것이 비록 육체관계로까지 나아간 것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유명한 무훈 시 <롤랑의 노래>에 보이는 두 영웅 사이의 감정은 분명히 우정 이상의 '아모르(사랑)'였음이 분명하다. 이러한 사실을 증명하는 텍스트는 그 밖에도 많이 있으며, 현실 속에서도 그 증거를 드러낸다. 필립 2세는 조프르와와 그리고 이어서 사자왕 리처드와 열정적인 관계를 맺었다.
저자는 이 시대의 동성애적 관계는 중세 사회의 전면적이거나 통일적인 특징과 연관되어 있다고 본다. 사적으로 체험되는 오늘날의 우정과는 달리, 중세기의 우정은 사적이면서도 동시에 공적인 관계였다. 심지어는 왕이 서로 깊은 우정을 맺도록 명령하기도 했다. 이러한 특성은 중세 사회의 필요와 일정 부분 연관되어 있다. 우정의 예찬은 봉건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전사들 사이의 유대를 바람직한 방식으로 유지시키는 사회적 규제 장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궁정식 사랑, 이른바 '쿠르투아지(courtoisie)'가 등장하면서, 동성애 커플을 밀어내고 이성애 커플이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한다. 남녀 사이의 절대적인 사랑과 그와 연관된 우아한 풍습이 급속하게 지배 문화로 자리 잡게 된다. 이 새로운 사랑은 수많은 노래로, 그리고 소설로 그려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탱이 흥미롭게 드러내 보이는 바에 따르면, 쿠르투아지의 전범이라고 할 만한 소설들 안에서마저 동성애와 이성애 사이의 첨예한 갈등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궁정식 사랑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아더 왕의 아내 그니에브르(귀네비어)의 연인 랑슬로(란슬롯)마저도 동성애와 이성애 사이에서 심각한 갈등을 겪는다. 저자의 분석에 따르면, 이것은 기사들의 덕성인 남성다움, 즉 '비르투스'를 훼손시키는 부드러운 감성, '몰리티아'와의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이었다.
궁정 문화 안에서 여성이 이상화되었다는 사실이 당시 여성의 사회적 지위의 개선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다. 저자는 오히려, 그 안에서 미묘한 통제의 시도를 읽어낸다. 한편으로는 여성의 환상적인 이미지를 예찬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 이상에서 멀어지는 여성을 징벌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 예로 저자는 작자 미상의 <그라엘랑의 단시>에 나타나는 충격적인 장면을 소개한다. 아더 왕은 매년 연회가 끝나면 왕비에게 식탁 위로 올라가 제후들 앞에서 옷을 벗으라고 명령했고, 제후들은 그 아름다움에 감탄한다. 왕은 아름다운 여자를 자신의 소유물로 전시함으로써 자신이 지닌 권력을 과시한다는 것이다.
궁정 문화의 비상으로 구석에 몰리기 시작한 동성애는 급기야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1307년에 미남 왕 필립에 의해 잔혹한 사냥을 당한 성당기사단을 처형했던 외적인 구실 중의 하나는 바로 동성애였다. 고문에 못 이겨 성당기사들은 남색을 했다는 것을 자백했는데, 고문으로 인한 자백에 신빙성을 부여하기는 힘들지만, 그들의 상징물이나 평소의 행태로 보아서 성당기사들 사이의 관계가 동성애적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은 충분히 가능하다. 이 결사체가 창설된 1118년에는 동성애적 관행이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었겠지만, 1307년 당시에는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을 것이다.
르네상스에 이르면 동성애적 기사도와 이성애적 궁정 문화는 화해를 시도하게 된다. 그러나 동성애 문화의 저항은 끈질기게 계속된다. 이 갈등은 당시에 생겨나기 시작한 '국가'의 개념과 더불어 더욱더 미묘한 양상을 드러낸다. 몰리티아는 비르투스를 그 언제보다도 더욱 강력하게 위협한다. 다윗조차도 몰리티아에 비르투스를 희생시킨 비열한 왕으로 등장한다. 다윗은 옴팔레에게 팔려갔다가 결국은 옴팔레를 위해 실을 잣는 노예로 전락한 적이 있는 헤라클레스에 비교된다.
그러나 17세기에 이르면, 이성애 문화는 완전한 승리를 구가하게 된다. 이 시대의 위대한 두 극작가 코르네이유와 라신의 운명은 이 시대적 변화 위에 얹혀 있다. 코르네이유가 과거의 남성 전통에 더욱더 가치를 부여하고, 남녀 간의 사랑을 경시한 데 반해서, 라신은 그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통해 남녀 간의 사랑에 높은 품격과 비극적 색채를 부여하는 데 성공한다. 라신의 연인들의 사랑은 모두 비극으로 끝나지만, 그의 작품 안에서 남녀 간의 사랑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지위와 아름다움을 얻게 된다. 대중은 열광했고, 코르네이유의 실패는 분명해 보였다.
이러한 경향은 기독교 문화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기독교 세계관에 따르면 육체는 만악의 근원이며, 죽음의 근원이다. 기독교 수도사들은 육체로 인하여 생겨나는 모든 문제에 철저하게 등을 돌린다. 그들의 육체적 욕망의 거부는 특히 여성에 대한 거부였다. 이들이 지닌 여성에 대한 거부감은 상상을 초월한다.
가톨릭 교회는 궁정 문화의 이성애를 차단하기 위해 많은 성극(聖劇)을 창작하여 유포한다. 사랑의 문화는 가톨릭 교회와는 상극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차단하는 것은 불가능한 시도였다. 그리하여 타협안이 제시된다. 결혼 대상인 미혼 여성을 상대로 상찬의 시를 쓰는 것은 허용될 수 있다는 생각이 생겨난다. 뿐만 아니라, 기왕에 존재하는 모든 연애 텍스트를 신비주의적인 방식으로 재해석하는 일이 진행된다. 모든 사랑의 모험은 신앙의 모험으로 해석되며, 유일한 사랑은 신에 대한 사랑이었다.
이어서 탱은 의학적 관점에서 동성애를 근절시키려고 했던 여러 가지 시도들을 통사적으로 고찰한다. 지금의 관점으로 보면 황당하기 이를 데 없는 주장과, 잔인한 '치료 방법'들이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의사들이 저주하고 근절시키려 했던 것은 비단 동성애뿐만이 아니라, 이른바 '사랑'이라고 불리는 인간 전체의 특별한 신체 반응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사랑이 병이 아니라 '약'이라는 것은 17세기에 이르러서야 의학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성애가 받아들여지기 시작한 이후, 의학은 동성애를 집중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한다.
이성애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주장하는 근거에는 성과 생식의 상관관계가 놓여 있다. 그러나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생식 없는 성은 오늘날 매우 널리 퍼져 있는 현상이다. 따라서 생식이라는 핑계로 동성애를 단죄하는 것은 더 이상 설득력이 없다. 더군다나 정신분석학 이후로, 성적 정체성이 자연 상태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분명해졌다. 그러므로 동성애에 대한 모든 편견은 아무런 의미도 가질 수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논증 방법은 그리 만족스럽지 못하다. 우리가 이 책을 통해 확인 할 수 있는 것은 "이성애 문화에 정당성을 부여해 온 변화가 당연하고 자연 발생적인 것이 아니라, 갈등, 충돌, 저항, 타협, 협정, 화해 등으로 점철된 역사"였다는 것이다. 그 결론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이성애가 12세기에 들어 생겨난 새로운 개념이라는 주장에는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우리가 이른바 '낭만적 사랑'이라고 부르는, 죽음으로 마감되는 남녀 간의 배타적인 사랑 이야기는 그보다 훨씬 더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대표되는 이 사랑 이야기는 <트리스탄과 이졸데>라는 브르타뉴 지방을 근원지로 하는 전설을 그 원형으로 가지고 있지만, 얼추 10세기 전후로 구성된 듯한 트리스탄과 이졸데 이야기는 사실은 그보다 훨씬 더 오래된 <디어무이드와 그레이네>에 대한 켈트 신화를 원형으로 삼고 있다. 여기에서 '사랑'의 원형은 불멸의 여신과 필멸의 남성 인간으로 이루어진 짝을 통해 나타난다. 연인을 선택하는 것은 남성이 아니라, 여성이다. 모든 일은 여성의 주도 하에 일어난다.
이 글에서 낭만적 사랑의 기원을 논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지만, 분명한 것은 탱이 생각하는 것처럼 이성애가 전적으로 쿠르투아지의 산물이라는 결론은 무리한 주장이라는 사실이다. 오히려 이 당시의 쿠르투아지에서 파생된 남녀 간의 사랑(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사랑이 그 역사적 일화인)은 오히려 '감정의 주체적 관리'라고 하는 근대적 주체의 구성과 연관 지어 해석하는 것이 맞다고 본다.
저자는 신화를 들여다보지 않음으로써, 중세 문학에 아직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류의 원형 심성(적어도 유럽인의 조상인 켈트인의 심성)을 간과해 버린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서 아더 왕이 벌거벗은 아내를 전시하는 것을 '권력의 과시'라고 해석한 것은 완전히 틀린 해석이다. 유감스럽게도 그것을 논증할 지면이 나에게는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장면이 켈트 신화 전반에 걸쳐서 나타나는 '주권 여신(déesse de la souveraineté)'이라는 개념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아더 왕은 귀네비어의 '알몸의 신비'가 부여하는 왕권이 없이는 왕이 될 수 없다. 제후들은 왕의 소유물인 왕비를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신비의 계시에 접하는 것이다. 귀네비어의 원래 이름은 그웨니파르인데, 그것은 "하얀 환영(幻影)"이라는 뜻이다. "하얀 환영"은 켈트 신화 전반에 출몰하는 "하얀 여신"을 암시하는 것이 분명하다. 즉, 귀네비어는 평범한 왕비가 아니라, 여신의 정체성을 가진 인물로 아더 왕 신화 전반에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비르투스와 몰리티아를 동성 문화와 이성 문화의 대립으로 형식화하는 것도 설득력이 떨어진다. 여성과의 사랑을 몰리티아의 원인으로 해석하는 것이야 말로 남성 중심주의적인 시각이다. 역시 켈트 신화를 원용하면, 루이 조르주 탱의 가설은 무너진다. 아일랜드 최고 영웅으로 꼽히는 쿠훌린과 그에 버금가는 영웅들은 모두 스카타흐라고 불리는 여전사로부터 최고 전사에 이르는 입문 교육을 받게 되는데, 이때 성적 입문도 함께 이루어진다.
또 다른 그레이네라고 볼 수 있는 데어드레(쿠훌린과 같이 아일랜드의 국민적인 여성 신화 영웅)의 연인 나오이즈는 끔찍하게 아내를 사랑하는 남자면서 동시에 혼자서 300명을 해치우는 비르투스의 화신이다. 원형적 수준에서 여성과의 사랑은 전사적 덕목의 방해물로 여겨지지 않았을 뿐더러, 오히려 전사적 덕목을 더욱 강렬하게 만드는 요소로 여겨졌다.
볼프람 폰 에센 바흐의 <파르치팔>에서 영웅은 전장에 나갈 때, "아모르"라고 외친다. 그것은 이 책의 저자가 이야기하듯 분명히 동성애는 아니다. 그것은 또한 여성에 대한 사랑도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아모르"라고 불리는 고결함의 극치, 자기 밖으로 자기를 끌어내기, 신비한 자기 부정의 힘으로 얻어지는 새로운 자아의 비전을 의미하는 말일 것이다. "아모르"를 동성애로 해석하는 저자의 해석은 지나치게 자의적이다.
저자는 동성애가 비정상적인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다는 논거를 대기 위해 너무나 무리하게 텍스트들을 끌어오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무훈 시들 안에 드러나는 우정이 분명히 동성애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것은 '성애(性(愛)'는 아니다. 오늘날 우리가 복권시켜야 한다고 보는 동성애는 분명히 성애이다. 성애로서의 동성애에 주어지는 편견을 걷어내어야 하는 것이지, '남성적 우정'이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중세 문학에 나타나는 '지나친 우정'은 중세인 특유의 과장하는 습성과 고결함에 대한 갈망이, 어떤 영웅들에게 배타적으로 투사되는 현상이다. 중세인은 '나와 내 친구'가 아닌 모든 것을 타자의 지옥에 처박았다. 영웅들의 짝은 가장 탁월한 '나'를 두 배로 강화시켜 놓은 것이다.
영웅들은 타인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들이 사랑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중세기 무훈 시에서 주인공들의 이름이 비슷비슷한 것은 그렇게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무훈 시에 나타나는 남성 짝은 동성애 커플이라기보다는 신화 속에 나타나는 '쌍둥이'의 주제와 연관지어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한 것처럼 보인다.
문제의식이 어디에 있는가가 논점인 것처럼 보인다. 이성애가 동성애를 밀어낸 역사를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동성애가 특이 현상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충분히 논증되었다고 본다.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성을 둘러싸고 현대 사회에 범람하는 모든 바람직하지 못한 현상들에 대해 숙고하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 문제는 이성애의 고유한 문제일까? 이성애를 동성애로 대치하면, 우리가 매일처럼 목격하고 있는 문제투성이의 성문화가 조화로운 것으로 변할까? 동성애 안에는 이성애가 보여주는 성적 착취, 강간, 성범죄, 과다하게 부풀려진 병적인 환상, 성의 상품화 등이 없는 것일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문제는 이성애에도 동성애에도 있다. 또 뒤집어서 말해보자. 이성애는 동성애의 고결한 이상을 구현할 수 없는가? 나는 이 질문에도 역시 긍정적인 대답을 할 수 없다. 고결한 사랑은 이성애에도 동성애에도 있다.
정말 중요한 문제는 동성애나 이성애나, 결국은 사랑, 더욱 범위를 좁혀 말한다면, 성애에 대한 성숙한 태도인 것처럼 보인다. 문제의 복판에 있는 것은 성애이다. 사랑하는 두 사람 사이에 매체로 끼어드는 육체, 그것을 바라보는 방식의 문제인 것이다. 성숙한 사람은 이성애자이든 동성애자이든, 사랑을 통해 주체의 깊고 의미 있는 변화를 끌어낸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동성애자이든 이성애자이든, 상대방의 육체를 파괴하고, 자신도 자신의 성적 판타지의 희생물이 된다. 모든 사랑에는, 그것이 진실한 것일 때, 이성애든 동성애든 상관없이, 신성한 무엇인가가 있다. 진정한 사랑은 자신을 버리면서 자신을 확대한다. 그것은 주체의 망실이면서 동시에 주체의 강화이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