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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의대 졸업생이 선택한 두 가지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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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의대 졸업생이 선택한 두 가지 길

[근대 의료의 풍경·57] 김용채와 이만규

1910년 11월 2일, 대한의원에서 3년의 의학 교육 과정을 마치고 졸업한 27명은 김용채(金溶埰), 이만규(李萬珪), 손수경(孫壽卿), 송영근(宋泳近), 구자흥(具滋興), 홍종흡(洪鐘翕), 전유화(田有華), 김종현(金宗鉉), 이충하(李忠夏), 이창우(李昌雨) 등 우등 졸업생 10명과 나영환(羅英煥), 이상종(李商鐘), 최창환(崔昌煥), 이찬(李燦), 김덕환(金德煥), 권영직(權寧直), 나진환(羅振煥), 김기웅(金基雄), 김교창(金敎昌), 이민창(李敏昌), 최영주(崔榮周), 노기숭(盧基崇), 원의준(元義俊), 김택(金澤), 서병호(徐丙昊), 오현두(吳炫斗), 나성연(羅聖淵) 등 일반 졸업생(及第生) 17명이었다.

이들은 대한의원 시절에 거의 모든 교육을 받았지만, 졸업식 당시의 학교 명칭을 따라 보통 "조선총독부의원 의학 강습소" 제1회 졸업생이라고 한다.

▲ <매일신보> 1910년 10월 23일자. 당시 관례대로 졸업 성적순으로 이름을 기재한 것으로 생각된다. 신문에 적혀 있는 한자 이름이 본문 앞머리에 열거한 것과 다른 경우가 있는데, 본문에는 <관보> 등 공식 기록에 쓰인 대로 표기했다. ⓒ프레시안
이들 27명은 모두 반년 뒤인 1911년 5월 9일자로 총독부로부터 "의술개업인허장"을 발급 받았는데, 등록 번호가 졸업 성적과는 무관하게 제52호인 전유화부터 이창우, 구자흥, 나성연 등의 순서였다. 이들의 행적은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남은 기록으로만 보아도 제법 다양한 삶을 살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우선 눈길을 끄는 인물이 수석 졸업생 김용채와 차석 졸업생 이만규로, 이들은 매우 대조적인 삶을 살았다.

경기도 안산 출신인 김용채(1891~1932년)는 1910년 의학교를 졸업한 뒤, 동기생 김교창과 함께 총독부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에 유학하여 도쿄 제국대학 의학부 병원 내과(김교창은 피부비뇨기과)에서 수학했다. 이들이 어떤 자격으로 공부했는지 확실치 않지만, 김교창은 <신문계(新文界)> 6호(1913년 9월)에 게재한 글에서 자신을 "제국대학 의과 졸업생"이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1년 뒤 <신문계> 18호에서는 그런 표현을 하지 않았다.)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김용채는 1913년 9월 6일 총독부의원의 조수로 임명받았으며, 1914년 3월 10일 의원(醫員)으로 승진하여 1919년까지 5년 동안을 내과에서 근무했다. 일제 강점기 관립 병원의 의사 직급은 의관(醫官), 부의관, 의원, 조수 순이었다. (<조선총독부 및 소속 관서 직원록>에 의하면, 1918년의 경우 총독부의원의 의관은 11명, 부의관은 4명, 의원은 12명, 조수는 9명이었다.)

1919년 김용채가 총독부의원을 사직할 때까지 조선인 의관이나 부의관은 1명도 없었고, 의원도 김용채 외에는 김태진(金台鎭)이 1915년 1월 30일부터 7월 29일까지 반 년 동안 근무했을 뿐이다. (김태진은 조선인으로는 최초로 1914년 12월 큐슈(九州) 제국대학 의학부를 졸업했다.) 그리고 김용채가 총독부의원을 떠나기 조금 전에야 주영선(朱榮善, 1915년 지바(千葉) 의전 졸업), 권희목(權熙穆), 조한성(趙漢盛), 김달환(金達煥, 이상 1917년 경성의전 졸업)이 의원으로 임명받았다.

▲ 김태진(1885~1919년)에 관한 자료. (왼쪽 위) 큐슈 제국대학 재학 시절 "각모(角帽)"(제56회)를 쓴 김태진. (가운데 위) 1914년 12월 큐슈 제국대학 의학부 졸업생 명단 75명 중 일부(<큐슈 제국대학 일람(1925년판)>). 이름 위의 (×) 표시는 사망했음을 뜻한다. 김태진은 1919년 "에스파냐 독감" 유행 때 34세로 요절했다. (오른쪽 위 및 아래) <매일신보> 1915년 1월 12일자. 김태진이 조선인으로서는 최초로 제국대학 의학부를 졸업했다고 보도했다. ⓒ프레시안

▲ 김용채가 조선의학회 제4차 총회(1914년 10월 18일)에서 발표한 논문 "견절배양기(鰹節培養基)에 대하여"(<조선의학회 잡지> 제13호). 이 배양 방법은 그가 일본 유학할 때에 배운 것이었다. 김용채는 당시 조선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가장 큰 보건위생 문제였던 감염병과 병원균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프레시안
요컨대 김용채는 1910년대 총독부의원에서 조선인으로는 독보적인 존재였다. 당시 내과뿐만 아니라 총독부의원 전체를 쥐락펴락 했던 모리야스(森安連吉, 1872년생, 1900년 도쿄 제국대학 의과대학 졸업)의 신임이 두터웠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김용채는 수석 졸업생이었거니와 일본어에도 능통했다고 한다.

김용채가 총독부의원을 그만 둔 연유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내과 의관 아리마(有馬英二, 1883년생, 1908년 도쿄 제국대학 의과대학 졸업)와의 갈등설이 있지만 확실한 것은 아니다. 어쨌든 김용채는 사직 후 곧 관수동에 자신의 의원을 열어 개원의로도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1925년부터 1927년까지는 경성에서 활동하는 조선인 의사만으로 구성된 "한성 의사회"의 회장을 지내면서 1927년 봄의 "영흥 에메틴 사건"(나중에 상술) 해결을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식민지 시대의 지식인으로서 김용채의 내면이 어떠했는지 알기 어렵지만 겉보기에는 별 어려움 없는 삶을 살았다. 하지만 갓 마흔의 나이에 닥쳐온 위암이라는 병마를 피할 수는 없었다. 김용채는 1932년 1월 14일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마지막 몇 달 동안은 암 말기의 통증으로 크게 고생했다고 한다.

▲ 총독부의원을 사직하고 귀가하는 김용채(가운데 한복 차림)(<정구충 지음, <한국의학의 개척자>에서 전재). 정구충은 사진 설명에서 김용채가 1915년에 총독부의원을 그만 두었다고 했는데 1919년을 오인한 것이다. ⓒ프레시안

한편, 강원도 원성에서 태어난 야자(也自) 이만규(1888/89~1978년)는, 길지 않은 생애지만 평생을 의사로 보낸 김용채와 크게 다른 길을 걸었다. 90세까지 장수한 이만규가 의사로 활동했던 기간은 기껏해야 2년이다. 나머지 긴 기간은 교육가, 한글학자, 저술가, 사회운동가, 정치가로서 보냈다.

▲ 이만규의 사진. 왼쪽은 출처 미상이고, 오른쪽은 <동아일보> 1940년 1월 4일자에 게재된 것이다. ⓒ동아일보
따라서 이만규의 다른 활동과는 달리 그가 의사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더욱이 이만규는 1948년 4월 김구, 김규식과 함께 "남북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에 참석하러 평양에 갔다가 돌아오지 않음으로써 남쪽에서는 잊힌 존재가 되었다.

이만규는 의학교를 졸업한 뒤, 한때 개성에서 고려병원을 개업했다. 또 졸업할 무렵부터 상동교회의 상동청년학원, 봉명학교, 승동학교 등에서 교사 생활도 했다. 그가 의사 생활을 접고 전적으로 교육 활동에 매진한 것은 1913년 무렵부터로 생각된다. 이만규는 윤치호가 세운 기독교 학교인 개성의 한영서원(뒤에 송도고등보통학교)에서 생물과 수학 과목을 담당하는 한편, 은밀히 한글과 한국사를 가르쳤다. 삼일운동 때에는 독립선언문을 인쇄, 배포하는 등의 활동으로 4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26년 3월 송도고보를 사임한 이만규는 같은 해 4월 배화여자고보 교사로 부임했다. 그 뒤 1938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6개월, 1942년 조선어학회(1936년부터 간사장을 지냈다) 사건으로 1년간 옥고를 겪은 기간을 제외하고는 배화에서 교사와 교장 생활을 했다.

▲ <매일신보> 1945년 9월 15일자. 이승만을 주석으로 하는 조선인민공화국 정부에서 이만규는 보건부장으로 선임되었다. 또한 문교부장 임시대리도 겸했다. ⓒ프레시안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이만규는 개인 구원뿐만 아니라 사회 구원을 추구했으며, 주로 "기독교 조선감리회"에서 활동했다.

이만규는 정치 활동은 주로 여운형(呂運亨, 1886~1847년)과 함께 했다. 일제 말기에는 건국동맹, 해방 뒤에는 건국준비위원회와 근로인민당 등에서 여운형의 오른팔 역할을 했다. 특히 그는, 여러 가지 정치 상황으로 정부 구실을 할 수는 없었지만, 조선인민공화국의 보건부장으로 선임되었다. 이만규가 환자를 직접 진료하는 임상 의사 생활을 하지는 않았더라도 보건의료에 관한 식견을 주위로부터 인정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저술들도 직접 환자 진료에 관한 것은 아니더라도 근대적 보건위생 사상이 짙게 깔려 있다. 예컨대 저서 <가정독본>(영창서관, 1941년)과 <동아일보>에 게재한 연재물 "여성의 미(美)", "보다 나은 결혼", "가정화락의 법측" 등은 그러한 점을 잘 드러낸다.

▲ <동아일보> 1939년 8월 10일자. 이만규의 "여성의 미―육체미". 미의 조건을 위와 같이 수치로 계량화하여 제시하려 한 것에서, 그의 견해에 대한 찬성 여부를 떠나, 이만규의 근대 의학적 사고방식을 잘 볼 수 있다. ⓒ동아일보

▲ 이만규의 대표적 저서 세 가지. (왼쪽) <가정독본>(영창서관, 1941년). (가운데) <조선교육사>(을유문화사, 1947년). (오른쪽) <여운형 선생 투쟁사>(민주문화사, 1947년). 이만규의 삶의 스펙트럼을 느끼게 한다. 특히 <조선교육사>에 대해서는 아직도 그것을 뛰어넘는 저작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평가도 있다. ⓒ프레시안

좌우익의 갈등과 대립이 심화되고, 1947년 7월 19일 여운형이 피살되면서 "중도 좌파" "진보적 민족주의자" 이만규의 설 자리는 거의 사라졌다. 그리고 그는 북으로 가는 길을 선택했고, 남은 30년의 삶을 그곳에서 보냈다.

이만규는 북으로 간 뒤 남쪽에서는 사실상 잊혀졌다. 또 그의 가족들도 서로 헤어져 오랫동안 소식도 모르고 지냈다. 아버지를 따라 간 딸 리각경(李珏卿)은 그곳에서 한글 서예가로 크게 이름을 날렸다. 남쪽에 남은 두 딸 이철경(李喆卿, 1914~1989년)과 이미경(李美卿, 1918~) 역시 한글 글씨로 일가를 이루었다. 이만규가 추구했던 우리말과 글의 아름다움은 세 자매의 아호인 "봄뫼, 갈물, 꽃뜰"에도 담겨 있다.

▲ 이만규의 쌍둥이 딸 리각경의 글씨(위)와 이철경의 글씨(아래)(박도, 남북의 쌍둥이 자매가 부른 "그날이 오면", <오마이뉴스> 2009년 8월 15일자에서 전재). 아버지를 따라 북으로 간 봄뫼 리각경, 남쪽에 남은 갈물 이철경과 꽃뜰 이미경, 모두 한글 서예가로 빼어난 작품들을 남겼다. '그날이 오면'을 지은 민족운동가이자 시인, 소설가인 심훈(沈熏, 1901~1936년)과 이만규 집안은 사돈 사이기도 하다. ⓒ오마이뉴스

▲ 리각경과 이철경의 젊은 시절의 글씨(<동아일보> 1935년 2월 1일자). ⓒ동아일보
이만규와 함께 북으로 간 가족으로는 딸 리각경 외에도 아들 리정구와 사위 리호림이 있다. 해방 전후 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 교수를 지낸 리정구(李貞九)는 북에서도 생물학자로 활동했으며, 교토 부립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세브란스 의전의 교수를 역임한 리호림(李鎬臨, 1907~1995년)은 평양의학대학 교수와 강좌장 등을 지내면서 이비인후과학 발전에 공헌했다.

글이 길어져서 다른 졸업생들에 관한 이야기는 다음 회로 미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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