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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 위기'를 보며 '천년왕국'의 도래를 꿈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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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 위기'를 보며 '천년왕국'의 도래를 꿈꾸다!

[親Book] 지젝의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

신은 존재하는가. 오래된, 그러나 계속되는 질문이다.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위대한 설계>)과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만들어진 신>)는 신이 없음을 증명하려 한다. 반면, 마르크스주의자 테리 이글턴(<신을 옹호한다>)은 무신론을 비판한다. 이들의 저서는 베스트셀러의 목록에 오를 정도다. 신의 존재 여부를 둘러싼 논쟁은 지속되고 있다.

그러나 논쟁의 핵심은 신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닐 수 있다. 신이 있다고 믿거나, 신이 있다고 믿는 것을 믿거나 또는 믿는 체하는, 개인, 집단, 국가가 실재한다. 신은 이미 있다. 따라서 우리는 신은 왜 존재하는가, 신의 존재의 의미는 무엇인가로 질문을 바꿀 수 있다. 현재와 다른 세계, 유토피아에 대한 인간의 열망이 그 질문의 답일 수 있다.

▲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슬라보예 지젝 지음, 김성호 옮김, 창비 펴냄). ⓒ창비
'공산주의'가 문 앞에 와있다고 주장하는 슬라보예 지젝의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도 이 인간의 열망에 전략적으로 개입한다.


기독교 근본주의적 종말주의가 내용상 가장 우스꽝스럽게도, 또 위험하게 여겨지기는 하나 그래도 그것이 '천년왕국설'의 급진적 해방 논리에 가장 근접한 종류다. 그러므로 그것과 세속적 생태주의 사이의 더욱 긴밀한 접촉을 도모하고 그를 통해 멸망의 위협을 급진적인 해방적 재생의 기회로 사고할 것이 과제로 남는다.

지젝의 세속 종교적 전략이다. 철학자 알랭 바디우처럼, 지젝도 사도 바울을 불러온다.

그리스인이나 유대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아무런 구별이 없다. 오직 기독교인들과 기독교의 적들이 있을 뿐이다! 아니면 오늘날에는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오직 해방을 위해 싸우는 자들과 그들의 반동적 적대자들, 민중과 민중의 적들이 있을 뿐이다.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사건'을 통해 차이의 정체성들을 '하나'로 묶었듯, 지젝은, '2001년 9·11'을 비극으로 '2008년 금융 위기'를 희극으로 '사건화'하려 한다. 지젝은, 2008년 금융 위기의 원인을, 세계 자본주의 체제 자체가 아니라 느슨한 법적 규제나 거대 금융 기관의 도덕적 해이의 탓으로 돌리려는 이데올로기적 서사를 비판한다.

현존했던 사회주의는 '진정한' 사회주의가 아니라는 회고적 주장처럼, '진정한' 자본주의로부터의 이탈을 금융 위기의 원인으로 생각하려는, 역사의 종언을 외치는 자본주의 유토피아론자들의 이데올로기를 해부한다. 지젝에게, 공기, 흙, 물, 불과 더불어 자연의 다섯 번째 힘을 구성하는 돈의 절대 명령, "은행을 구하라"는 '사회주의적 정책'은, "빈자가 아닌 부자를, 돈을 빌리는 자들이 아니라 돈을 빌려주는 자"를 도울 뿐이다.

"잘 가시오 사회주의 씨"를 외치는 지젝에게 사회주의는, '공산주의'에 대한 위협이다. 생태적 파국의 위협, 디지털 통제의 위험, 인간을 조작 가능한 기계로 만드는 자본주의의 수정에는 동의하면서 "은행을 구하라"라는 명령에는 복종하지만, "모든 것을 잃을" 위험에 처해 있는 "배제된 자들"이 "포함된 자들"과 적대하는 지점을 외면하는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변종일 뿐이다. 지젝이 제시하는 '공산주의'는, "시장과 국가라는 틀의 한계를 돌파해" 가는 또 다른 세계다. 지젝의 신은 '공산주의'다.

파국에 대한 완벽한 지식을 갖출 때까지 행동을 미룬다면 그러한 지식을 획득했을 때에는 이미 너무 늦을 것이다. 다시 말해 어떤 행위가 의존하는 확실성은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신념의 문제다. 참된 행위는 그에 관해 완벽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어떤 투명한 상황 속의 전략적 개입이 결코 아니며, 오히려 참된 행위가 지식의 틈새를 메우는 것이다.

종말을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일 때, "과거 속에 하나의 새로운 가능성을 삽입"할 수 있다는 지젝의 논리에서, 그것을 어떻게 아는가, 라고 물을 때 지식이 아닌 신념을 내세우는 지젝의 담론에서, 신은 왜 존재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고, 신은 있어야 한다는 답을 듣게 된다.

그러나 지젝의 담론이 물질화될 수 있기 위해서는, 우리는 또 다른 질문, 신은 어떻게 존재하는가를 물어야 한다. 파레토의 법칙처럼 20대80의 사회지만 20이 80을 지배하는 사회에서, "닭이 제 발로 도축에 걸어 들어가도록 설득할 수 있는데 실로 누가 노골적 억압을 필요로 한단 말인가"라는 지젝의 언명처럼, 80은 지젝의 신을 따르지 않을 수 있다.

그들을 호명하기 위해 신은 있어야 하지만, 그 신은 어떻게 존재할 수 있을까. "멍청아, 그건 이데올로기야"를 외치는 '사도 지젝'이 사도 바울처럼, 차이의 정체성들을 넘어서서 하나의 굵은 선으로 나누어지는 정체성의 대립 구도를 생산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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