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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 암살 사건에 연루된 이겸래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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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왕비 암살 사건에 연루된 이겸래는 누구인가?

[근대 의료의 풍경·50] 종두 의사 이겸래

종두의 양성소를 졸업한 사람은 1기 10명, 2기 18명, 3기 53명 등 모두 81명이며, 이 가운데 (종두) 의사 경력이 확인되는 사람은 53명이다. (이 가운데 1기 김교식(일명 김달식)은 특이한 경우여서 다음 회에서 별도로 다룬다.)

1기 4명, 2기 6명, 3기 18명 등 28명은 (종두) 의사로 활동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데, 기록의 누락이나 유실에 기인하는 경우, 또는 실제로 활동을 하지 않은 경우일 것이다.

▲ 종두의 양성소 졸업생들의 (종두) 의사 경력. "비고"는 (종두)의사 경력이 발견되지 않는 인원 수이다. 한성종두사(한성의 종두 업무를 전담하는 기구로 1900년에 설치되었다가 1905년 광제원에 부속시켰다), 내부 병원(1899~1900년), 광제원(1900~1907년), 대한의원(1907~1910년) 임용자 중 별도로 직책이 기재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의사로 근무했음을 뜻한다. ⓒ프레시안
▲ <황성신문> 1899년 10월 13일자. 황해도 종두사무위원 고원식과 이창렬이 종두를 보급하는 한편, 종두인허원을 시험으로 선발하여 각 군에 파견할 것이라는 기사이다. ⓒ프레시안
의업 활동이 확인되는 53명 가운데는 한성종두사(9명), 내부 병원(13명), 광제원(6명), 대한의원(4명)에 근무한 경우도 있지만, 87%인 46명이 지역 종두사무위원으로 활동했다. 즉 종두의 양성소 졸업생들의 주된 활동 무대는 각 지방(道)이었으며, 이들은 이전 시대의 우두교수관처럼 담당 지역에서 종두 시술을 하는 한편 "종두인허원(種痘認許員)"(과거의 우두 의사 격)을 양성하는 역할도 했다.

종두사무위원 가운데에는 김능준(金能峻, <관보> 1900년 10월 11일자), 조필하(趙弼夏, 1901년 1월 28일자), 최경욱(崔擎昱, 1901년 4월 24일자) 등과 같이 종두의 양성소와 무관한 사람도 더러 있지만, 대부분 양성소 졸업자였다. 즉 대한제국기의 종두 업무는 종두의 양성소 졸업자들이 주도했다. 새로운 종두 의사들의 등장과 세력 장악에는 후루시로가 교육한 종두술이 과거의 것보다 진일보한 점도 어느 정도 작용했겠지만, 일본 세력의 새로운 부상이라는 정치적인 요인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 <황성신문> 1900년 3월 5일자. 충청남도 종계소 위원 이만식과 박태훈이 과거에 전국 도처(7도)에서 우두교수관을 지낸 김인제와 동심합력하여 종계사무를 잘 할 것이라는 기사이다. 종두 업무를 둘러싸고 신구(新舊) 세력이 갈등과 분쟁을 겪은 경우가 적지 않았지만, 이처럼 협력이 잘 된 경우도 있었다. ⓒ프레시안
한편, 종두의 양성소 출신으로 (종두) 의사 활동을 확인할 수 없는 사람은 다음과 같다.

1기 : 이겸래 고희준 이규필 이홍래 (4명)
2기 : 현동숙 심승덕 이철용 유문종 정해관 최상혁 (6명)
3기 : 김덕준 고준식(고홍식의 개명) 신종희 방춘환 최진성 이희민 박민수 류상규 원보상 이동언 강필우 이승조 방한식 이동환 이효선 윤종모 김상기 전위현 (18명)

이 가운데 심승덕과 고준식은 지난 번(제49회)에 살펴보았듯이, 종두의 양성소를 졸업하고 각각 교사와 기술·행정 관료로 활동했다.

1기 우등(2등) 졸업생 고희준(高羲駿, 1878~?)은 1895년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에 유학했고, 종두의 양성소를 졸업하고는 1898년 1월부터 1901년까지 경성학당 교원으로 일본어를 가르쳤다. 그 뒤 1904년 궁내부 주사를 시작으로 탁지부 기수, 거제 군수 등 관직을 역임했다. 1909년 5월 군수를 그만두고 일진회에 가입하면서부터 일제 말년까지 노골적인 친일 매국 행각을 벌였다.

▲ <매일신보> 1924년 5월 5일자. "독립이 실현하면 조선 민족은 과연 행복일까"라는 고희준의 지론이 실려 있다. ⓒ프레시안

2기 현동숙(玄東䎘)은 갑산부 경무관보(1895년)와 탁지부 주사(1896년)를 지낸 현동숙과 동일 인물일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3기의 방춘환(方春煥)은 관립소학교 졸업(1898년), 이희민(李熙敏)은 법부 주사(1902년), 박민수(朴旻秀)는 일어학교 우등 졸업(1904년), 강필우(康弼祐)는 외국어학교 교관(1901년), 방한식(方漢式)은 삼화감리서 주사(1904년), 이동환(李東煥)은 외국어학교 부교관(1901년), 전위현(全瑋鉉)은 잠업시험장 졸업(1901년) 등의 경력을 가졌다. (이 가운데 동명이인의 경우도 있을 수 있지만 가능성은 많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종두의 양성소 출신으로 기록상 종두 의사 경력이 확인되지 않는 사람들도 대체로 근대적인 활동을 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제 종두의 양성소 제1기를 수석으로 졸업한 이겸래(李謙來)에 대해 알아보자. 여전히 낯설었을 신설 종두의 양성소의 수석 졸업 자체도 흥미로운데 애써 얻은 자격을 전혀 활용하지 않은 점은 더욱 관심을 끈다. 이겸래는 누구인가?

이겸래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기록에 세 차례 나타난다. 첫 번째는 일본의 <아사노신문(朝野新聞)> 1886년 7월 29일자에 제중원 의학당 생도로 언급된 13명(제17회) 중의 하나인 이겸래이다.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은 1999년 4월, <아사노신문> 기사를 근거로 이겸래 등에게 명예졸업장을 수여했다. "제중원 학당"은 조선 정부(외아문)가 설립한 기관인데(제17회), 대한민국 정부가 아닌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이 명예졸업장을 수여한 것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명예졸업장을 주기에는 근거도 미약하지만).

두 번째는 지금 살펴보고 있는 종두의 양성소 제1기 수석 졸업생 이겸래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1907년 9월 30일에 작성된 관원 이력서의 주인공 이겸래이다.

▲ <대한제국 관원 이력서>(국사편찬위원회 편, 1971년)에 수록되어 있는 이겸래의 이력서. 이력서의 작성 시기인 1907년 9월 30일 이겸래는 종2품으로 봉상사(奉常司, 왕실의 제사와 시호(諡號)에 관한 사무를 맡아 보던 관청) 부제조(副提調)였다. ⓒ프레시안

그러면 세 차례 등장하는 이겸래는 동일 인물일까, 아닐까? 우선 제중원 학당의 생도 이겸래와 종두의 양성소 졸업생 이겸래는, 상식적·논리적으로 생각해서, 같은 사람일 가능성이 많다. 새로운 의학을 공부하려고 제중원 학당에 들어갔던 사람이 나중에 비슷한 성격의 기관인 종두의 양성소에서 수학하는 것은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관리로 출세한(1906년에 종2품, 즉 차관급으로 승진했다), 즉 관원 이력서 상의 이겸래와는 동일 인물일까? 어떤 연구자는 이겸래가 당시 외부(外部) 교섭국장이었기 때문에 종두의 양성소와 무관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겸래가 교섭국장이 된 것은 1898년 3월 14일이므로(종두의 양성소 1기 졸업은 1897년 7월 10일) 그러한 주장의 근거가 될 수 없다. 이겸래는 위의 이력서에 의하면 1895년 8월 22일 이후 교섭국장에 임명될 때까지 별다른 직책이 없었다.

이겸래의 경력을 꼼꼼히 짚어보자.

이겸래는 스무 살 되던 1885년 과거(式年試) 잡과 운관과(雲觀科, 음양과)에 합격했다. 그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 <운관과목안(雲觀科目案)>에는 장인(妻父) 전홍묵(全弘默)이 혜민서 훈도("惠訓")를 지냈다고 되어 있다. 여기에서 이겸래가 제중원 학당에 입학하게 된 동기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이겸래의 1907년 이력서에는 운관과 합격과 제중원 학당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다.)

▲ <운관과목안(雲觀科目案)>. 1885년 을유시(乙酉式) 운관과에 이겸래 등 12명이 합격했다고 나와 있다. 또한 이겸래의 장인 전홍묵이 혜민서 훈도를 지낸 사실도 적혀 있다. ⓒ프레시안

1907년 이력서에는 이겸래가 1895년 6월 18일(음력 5월 26일) 부위(副尉, 지금의 중위급)로 임명받아 훈련2대에 근무한 것이 기록되어 있다. 잡과에 합격했던 사람이 무관(武官)이 된 것인데, 그렇게 된 연유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에 앞서 이겸래가 1894년 동학농민전쟁 때 정부군으로 출전하여 여러 차례 전공(戰功)을 세운 사실에 대해서는 <갑오군공록(甲午軍功錄)> 등 많은 기록이 있다.

▲ <갑오군공록(甲午軍功錄)>. 순무별군관(巡撫別軍官) 이겸래가 기호(畿湖) 지방 여러 읍에서 세 차례 전공을 세웠음이 기록되어 있다. ⓒ프레시안
이겸래가 근무한 훈련대(訓練隊)는 일본의 주도로 1895년에 창설된 부대로 일본인 교관이 직접 지도하는 친일 세력의 무력 중추였으며, 1895년 10월 8일(음력 8월 20일)의 왕비 암살 사건(을미사변)에 깊이 관여했다. 훈련대가 왕비 제거에 가담했던 직접적인 계기는 사건 며칠 전, 왕비를 중심으로 한 친러파 세력이 곧 훈련대를 해체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것이었다. 이때 훈련대의 제1대대장은 이두황(李斗璜, 1858~1916년), 이겸래가 속한 제2대대장은 우범선(禹範善, 1857~1903년, 육종학자 우장춘의 아버지)이었다. 우범선은 을미사변 당일 훈련대 병력 동원의 책임자였으며 왕비의 시신을 마지막으로 처리하는 과정에도 가담했다.

이겸래의 이력서에는 변란 이틀 뒤인 10월 10일(음력 8월 22일)에 휴직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정부 공식 기록은 그와 조금 다르다. <일성록>에는 10월 22일(음력 9월 5일) 군부대신 조희연(趙羲淵)이 국왕에게 이민숙(李敏琡)과 이겸래 등 훈련대 장교 9명을 면직시킬 것을 제청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관보>에는 같은 날짜로 그 9명 중 제2대대 중대장 최영학(崔永學)과 이겸래 등 4명은 휴직 조치, 이민숙 등 5명은 보직 변경한 것으로 되어 있다. 처벌의 수위가 높은 것은 아니었지만, 이로써 이겸래는 사실상 군대에서 축출된 것으로 보인다.

그 뒤 훈련대는 10월 30일(음력 9월 13일) 칙령 제169호로 폐지되었고, 이두황과 우범선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이겸래는 어떻게 되었을까? 우리가 아는 사실은 그가 1897년 7월 10일 종두의 양성소를 수석으로 졸업했고, 1898년 3월 14일에 외부 교섭국장이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까지 살펴보았으니 훈련대 장교, 즉 관원 이력서 상의 이겸래와 종두의 양성소 졸업생 이겸래가 동일 인물이라는 사실을 굳이 논증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물론 종두의 양성소에 입학하게 된 구체적인 과정, 그리고 종두의 양성소 수학 및 졸업 이력과 교섭국장 임명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앞으로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관료로서 별다른 경력이 없는 이겸래가 외교 실무의 핵심적인 자리를 차지한 것은 선뜻 이해가 가지 않기 때문이다.

이겸래가 외부 교섭국장, 중추원 의관, 농상공부 기사, 외부 참서관, 옥구 감리, 봉상사 부제조 등으로 관운을 누리면서 (종두) 의사로 활동할 여지는 없었을 것이다. 아마 요즈음도 별로 다르지 않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고위 관료로 출세한 이상 이력서에 잡과(雜科) 합격, 제중원 학당 수학, 종두의 양성소 졸업에 관해 기재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거나 오히려 숨기려 했을지 모른다. 이겸래는 <광주 이 씨 대동보(大同譜)>에 따르면 1911년 9월 5일 사망했다.

▲ 이겸래(1865-1911)의 약력. 이력서에 나타나지 않은 사항을 다른 자료들로 보완하여 재구성했다. ⓒ프레시안

(원고가 길어져서 김달식(金達植)과 피병준(皮秉俊) 등에 대해서는 다음 회에서 다루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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