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1일
8일의 선전포고와 동시에 소련군은 연해주로부터 만주와 한반도 북부의 관동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관동군의 저항은 예상 외로 미약했다. 러일전쟁 후 관동수비대로 출범해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이자 본산으로 위세를 떨쳤던 관동군은 전쟁 말기에 정예 인원과 장비를 여러 전방 부대에 넘겨준 결과 60만의 병력 규모가 무색하게 허약한 전력의 '예비군'이 되어 있었다.
소련군의 진격이 빨랐기 때문에 미국의 전쟁 종결이 급해졌다. 동유럽에서 독일 항복 전에 소련군이 진격한 지역이 소련의 영향권으로 떨어진 일의 되풀이를 미국은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10일에 일본이 항복 의사를 밝히자 이를 받아들이는 쪽으로 연합국의 태도를 조율하면서 '일반 명령 제1호'를 서둘러 작성했다. 10일 밤늦게 러스크와 본스틸이 38선 분할점령안을 준비한 것은 일반 명령 제1호에 넣기 위해서였다.
소련과 미국이 비교적 사이좋게 지낸 것은 루스벨트 대통령 재임 기간(1933~45년)뿐이었다. 1917년 공산혁명으로 소련이 탄생했을 때 이를 반가워한 자본주의 국가는 없었다. 그 후 소련이 내전의 혼란을 겪는 동안 서방 국가들은 비협조적 태도로 방관하거나 백군을 은근히 지원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1925년경까지는 대개 소련의 실체를 인정하고 외교 관계를 맺었다. 미국만이 1933년 루스벨트 취임 때까지 소련을 승인하지 않고 버텼다.
계급과 국가를 타파하자는 공산주의를 표방하는 소련의 등장을 자본주의 국가들이 꺼려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미국이 특히 소련을 멀리한 데는 제1차 세계 대전 후 새로운 시대의 강대국으로서 잠재적 경쟁자를 견제하는 측면도 있었을 것 같다. 1차 대전으로 산업화 선진국들이 심한 파괴를 입고 식민지 통제도 어려워지고 있던 상황에서 자원부국으로서 미국과 소련의 입지가 두드러져 가고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파시즘을 중심으로 벌어진 것은 뜻밖의 상황이었다. 1930년대 유럽의 가장 심각한 이념 갈등은 공산주의를 둘러싼 것이었다. 소련과 자본주의 국가들 사이의 갈등이 한강이라면 추축국과 서방 사이의 갈등은 샛강이었다. 그런데 샛강에서 홍수가 나는 바람에 서방과 소련 사이의 갈등은 눈에 보이지 않게 되었다.
전쟁이 끝나 가면서 숨어 있던 갈등이 눈에 보이게 되었다.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권이 전쟁 전과 비교가 되지 않는 어마어마한 규모로 떠오르고 있었다. 소련의 힘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추축국의 침공 또는 점령 지역에서 좌파가 대개 항전의 주역이 되어 있었다. 우파는 투항하고 협조한 경우가 많았던 반면 좌파는 파시즘의 철천지원수였기 때문이다. 서방에서도 파시즘에 대한 반발로 좌파 세력이 성장해 있었다.
좌파는 전쟁 기간을 통해 동아시아 지역에서도 크게 자라났다. 중국에서는 국민당 정권이 일본 못지않은 파시즘 성향을 보이는 데 따라 양심적 저항 세력을 위한 대안으로서 공산당 세력이 자라났다. 한국에서도 민족 모순에만 매달린 우파가 투항과 협조의 길로 많이 돌아선 데 반해 계급 모순을 함께 생각하는 좌파가 전향을 거부하는 추세가 강했다. 그리고 만주 지역의 무장 항쟁을 중국 국민당이 외면하고 공산당만이 지원했기 때문에 독립운동과 좌파 사이의 상관관계가 더 깊어졌다.
1945~49년의 중국의 국공내전에서 소련의 큰 지원 없이 공산당이 승리한 것과 얼마만큼 비슷한 사회경제적, 그리고 사상적 지형이 종전 당시의 한국에 형성되어 있었는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그러나 비슷하게 보일만한 요소들이 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래서 소련은 한반도 적화를 낙관하는 편이었고, 미국은 두려워하는 편이었다.
딘 러스크가 1950년 7월 국무부 역사정책연구소의 문의에 응해 작성한 '러스크 메모'에 1945년 8월 10일의 일을 회고한 내용이 있다. (<해방 30년사 I>(송남헌 지음, 까치 펴냄) 84~85쪽) 일본의 항복이 갑자기 닥쳐왔기 때문에 맥아더에게 내릴 명령과 연합국과 함께 취할 조치의 긴급 검토를 해야만 했으며, 미군이 가능한 한 북쪽까지 올라가 일본의 항복을 받는 것이 좋겠다는 번즈 국무장관의 의견을 전제로 실무자들이 상황을 검토했다고 한다.
미군은 소련군보다 먼 곳에 있었고 병력도 적었기 때문에 각자 능력대로 군대를 보낼 경우 한반도는 거의 통째로 소련군이 점령할 상황이었다. 분할 점령의 경계선을 너무 북쪽으로 잡으면 소련이 응하지 않을 것이 예상되었다. 그래서 서울을 이쪽에 넣는 38도선 안은 미국의 욕심을 최대한 내세운 것이었는데, "(본인은) 소련이 38선 안을 수락했다고 들었을 때 약간 놀랐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러스크는 회고했다.
8월 11일 작성되어 사흘 후 발령된 일반 명령 제1호는 이런 내용을 담은 것이었다. (<Wikipedia> "General Order No 1"조)
a. (만주를 제외한)중국, 대만과 북위 16도 이북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모든 일본군 선임 지휘관은 장개석 장군에게 항복한다.
b. 만주와 북위 38도 이북의 한국, 그리고 남부 사할린의 모든 일본군 선임 지휘관은 소련 극동군 사령관에게 항복한다.
c. 안다만 제도, 니코바르 제도, 미얀마, 타이, 북위 16도 이남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말레이, 보르네오,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 뉴기니, 비스마르크 제도와 솔로몬 제도의 모든 일본군 선임 지휘관은 동남아시아 연합군 최고사령관에게 항복한다.
d. 일본의 보호령 섬과 오키나와 제도, 오가사와라 제도 및 태평양 섬들의 모든 일본군 선임 지휘관은 미국 태평양함대 사령관에게 항복한다.
e. 대본영과 그 선임 지휘관들, 그리고 일본 본토와 부속 도서, 북위 38도 이남의 한국과 필리핀의 모든 일본군은 미국 태평양육군 사령관에게 항복한다.
북한에 주둔하고 있던 관동군 제34군은 이 명령에 따라 8월 21일에서 23일 사이에 소련군에게 항복하고 무장해제를 받았다. 소련군은 8월 22일 평양에 진주한 뒤 이튿날 개성까지 일부 부대가 남하했다가 38선 북쪽으로 물러갔다. 소련 제25군 약 12만5천 병력이 북한에 진주했다. 반면 미군은 9월 8일에야 인천에 상륙해 이튿날 서울에 들어와 총독과 주둔군 사령관들의 항복을 받았다. 진주한 미군 병력은 제24군단 7만여 명이었다.
8월 15일 일본의 항복은 엄밀한 의미에서 항복 의사 표시일 뿐이었다. 물론 한국인에 대한 항복도 아니었다. 천황의 항복 선언과 맥아더 사령부의 일반 명령 제1호의 지침에 따라 각 지역의 각 부대가 항복할 때까지는 공식적으로 바뀌는 것이 없었다. 한국에서도 총독부의 행정권과 주둔군의 군사력은 9월 9일까지 유지되었다. 9월 9일에도 한국인에게 넘어온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1945년 8월에 한국인에게 주어진 것은 광복이 아니라 광복의 기회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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