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비평을 해보겠다면 1977년에 나온 레이몬드 윌리엄스의 <마르크스주의와 문학(Marxism and Literature)>을 권한다. 필독서에 속한다. 그런데 그 레이몬드 윌리엄스에게 뛰어난 제자가 한 명 있다. 바로 테리 이글턴이다. 1988년에 나온 그의 <문학 이론 입문(Literary Theory : An Introduction)>은 문학 이론의 고전 가운데 하나다.
문학에 대한 이글턴의 인식은, 문학이 단지 소설이나 시에 집중한 창조적이고 상상력이 풍부한 분야의 글쓰기에 국한 하지 않는다는 데서 출발한다. 그는 내전을 겪은 영국의 18세기 이후에 그랬던 것처럼 철학, 역사, 논설에 이르는 모든 가치 있는 생각이 사회를 변화시키는 의지를 가지고 있을 때 이걸 문학의 범위에 속한다고 여긴다. 그의 글쓰기 역시 바로 그런 지점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마르크스주의 문학이론가인 그가 신에 대해 쓴다면 무슨 이야기를 하게 될까? "종교는 아편"이라고 질타했던 마르크스처럼 그 역시 종교에 대한 비판과 함께 종교라는 허상을 철저하게 붕괴시키고 이성적 사고의 위력을 발휘하여 혁명의 미래를 합리적으로 구상하라고 일갈할까?
만일 그렇게 여긴다면 그건 이글턴을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그는 신을 옹호한다. 그리고 거기서 혁명의 힘을 발굴해낸다. 그에게는 이성과 신앙 그리고 혁명이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 그가 지은 <이성, 신앙 그리고 혁명 : 신에 대한 논쟁을 성찰하다(Reason, Faith, and Revolution: Reflections on the God Debate)>가 <신을 옹호하다 : 마르크스주의자의 무신론 비판>(강주헌 옮김, 모멘토 펴냄)이라는 제목을 달고 나왔다.
번역본의 제목은 원작의 메시지를 압축해서 전달한다. 그에게 신은 인간에게 주어진 희망이며 혁명을 성찰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는 이걸 부인하는 것은 기존 질서의 모순을 적당히 비판하는 척하면서 사실은 그 질서 속에서 안주하고 특권을 누리는 자들의 내면의식에 불과하다고 지목한다.
"디치킨스"에 대한 공격
▲ <신을 옹호하다>(테리 이글턴 지음, 강주헌 옮김, 모멘토 펴냄). ⓒ모멘토 |
테리 이글턴의 책을 오늘의 현실에서 읽는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것은 <신의 정치(God's Politics)>를 쓴 짐 월리스가 갈파했듯이 "우파는 종교를 오도하고 좌파는 종교를 아예 내버리고 있다"는 의식과 일치하면서도, 신에 대한 더 진지한 논쟁이 자본주의를 정면으로 치고 들어가 혁명적 사고와 새로운 희망을 일구어낼 수 있다는 지점으로까지 간다. 이런 점에서 그는 다윈주의자 리처드 도킨스나 한때 좌파였던 크리스토퍼 히친스 모두 자본주의적 야만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종교의 비판적, 성찰적 기능을 거세해버리려는 문제를 안고 있다고 강조한다.
사실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김영사 펴냄, 원제대로 번역하자면 "신에 대한 망상")이 번역되어 읽혔을 때 우리 사회가 열광하는 것을 보면서, 그 열광의 저변에 깔린 기독교와 교회의 행태에 대한 반감은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러나 도킨스의 기독교 비판이 기독교의 본질이나 성서 자체의 텍스트 이해에 있어서는 상당히 저급한 수준이었다는 것을 토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킨스가 그의 책에서 기독교가 현실에서 저지르는 각종 과오와 야만에 대해 공격을 가하고 있는 것은 분명히 옹호되어야 한다. 그것은 기독교가 인류의 복지에 기여하기보다는 인간의 파멸에 힘을 싣고 있는 대목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논지에 대해 이글턴 역시 반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도킨스는 기본적으로 과학으로 신을 설명하지 못하면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지점에서 출발하고 있었고, 성서 텍스트 안에 담겨 있는 고대 히브리인의 고난과 투쟁의 의미를 제대로 읽지 못하고 있다. 토머스 쿤이 말했던 것처럼, 과학이란 그 사고의 기본틀이 혁명적으로 바뀌면서 발전해왔고 그것은 역으로 보면 과학적 이성은 이성의 절대 무오류라는 논리에 근거를 둘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도킨스는 과학이 찾아내지 못하면 없는 것이라는 식의 논리로 일관하면서 종교를 폐기해야 한다는 식으로 결말을 짓는다.
기독교의 본질에 대한 재조명
이런 식의 논리는 기독교/유태교의 신이 억압받은 인류의 편에서 기존 질서와의 투쟁에 함께 하는 해방자라는 고백과 이에 토대를 둔 일체의 혁명적 선택의 가치를 모두 부인하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바로 이 점이 디치킨스 류의 종교 비판에 대해 테리 이글턴이 공격의 끈을 놓지 않는 대목이다.
특히 이글턴은 기독교의 출발이 인류의 삶을 보다 낫게 만들고 절망적 상황에서도 힘을 잃지 않고 뛰어난 정신적 능력으로 현실과 마주해 새로운 희망을 탄생시키려는 것이라는 점에 주목한다. 그는 이런 힘을 저버리는 것은 곧 혁명의 포기라는 인식을 갖는다.
사실 마르크스주의자나 또는 세계적 수준의 인문학자들 가운데 신을 옹호하는 이는 드물다. 그것은 자신의 이성을 접고 이미 정해진 사고와 인식의 틀 속에 종속되어버리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내면 논리에서 인간에 대한 폭력과 희생을 중지시키는 명령을 발견하는 르네 지라르 정도를 빼놓고 종교와 관련한 적극적 논의를 전개시키는 경우를 보기 쉽지 않다.
그러나 테리 이글턴은 "종교가 인간의 역사에서 많은 불행의 원인이 되었다"고 인정하면서도 디치킨스 류의 종교 비판이 종교에 대한 신중한 성찰이 없고 특히 신약성서의 텍스트 속에서 들어 있는 인간 해방과 관련한 무수한 혁명적 가치를 가볍게 취급하고 있다며 이는 "무지와 편견"일 따름이라고 지적한다. 그래서 그는 "디치킨스"는 겸손이란 털끝만치도 없고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기득권에 대한 비판적 성찰은 아예 기대할 수 없다고 조롱한다.
그는 기독교란 "애초부터 무언가에 대한 설명을 하려는 시도나 체계가 아니라" "사랑으로 만물을 지탱해주는 존재인 신"이 세상을 혁명적으로 바꾸는 길을 보여준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종교를 단지 현실 도피적인 아편으로만 여기는 생각에 대해서도 그 본질에 대한 의미를 새로 조명할 것을 요구한다. 희망이 없는 현실에서 종교가 현실 도피처를 아편처럼 마련하는 것은 종교의 본질에 대한 왜곡이라는 것이다.
예수가 생면부지인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내놓는 희생을 몸소 행한 것을 어떻게 현실 도피라고 볼 수 있느냐면서, 이는 "광기와 공포, 부조리에 대한 혁명적 투신"이며 "새 술을 헌 부대에 담는 신중한 개량주의적 프로젝트"를 넘어서서 "완전히 새로운 전위적" 대안이라고 옹호한다.
진정한 혁명이란 "죽음과 공허, 광기, 상실, 헛수고를 폭풍처럼 지나면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한 그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공동체를 혈연 가족 공동체보다 위에 놓은 예수를 통해 "정의는 피보다 진하다"는 점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고 일깨우고 있다.
종교는 오만하게 거부할 대상이 아니라 끈질기게 해독해야 할 대상
테리 이글턴은 "좌파이면서도 기독교도인 사람들이나 지식인은 인기가 없는 시대"이지만, 기독교란 "인류 역사 최초의 진정한 세계 대중 운동"이며 "앞으로 올 하느님 나라에서 정의와 우애, 자기실현의 조건을 찾는" 혁명인데 이것은 오늘날 종교 자체와 종교에 대한 무지를 가지고 있는 자들에 의해 변질되고 배신당했으며 "하나님과 관련해서 조잡한 논리"가 판을 치는 상황이 되었다고 개탄한다.
그래서 그는 "공격하기 좋도록 기독교를 왜곡하는 일은 이제 학자와 지식인 사이에서 지겨울 만큼 만연해 있다"면서 "기독교는 오래 전에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편에서 부유하고 공격적인 사람들의 편으로 돌아섰다"는 현실을 함께 주목한다. 그러나 그는 이것은 기독교의 잘못이지 예수의 잘못은 아니라고 말한다.
기독교의 본질은 "예수가 가까이 한 하층민과 반식민주의 비밀 투사들에게 주어진 놀라운 약속"이지 "교외에서 안락하게 사는 부유층이 주축인 신앙"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들의 신앙이 되어버린 오늘날의 기독교는 "여자의 노출된 젖가슴에는 호들갑을 떨지만 부자와 가난한 자들 사이의 끔찍한 불평등에 대해서는 무덤덤"하며 "낙태에 대해서는 한탄하면서도 미국의 세계 지배를 위해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에서 아이들을 불태워 죽이는 일에 대해서는 동요하는 빛을 보이지 않는다"고 일갈한다. 그러면서 그는 서구의 자유주의가 비서구에 저지른 야만에 대해서도 통렬한 비판을 가한다. 기독교의 본질은 바로 그런 서구의 죄를 보게 하는 힘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으로 해서 그는 마르크스처럼 "종교는 오만하게 거부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끈질기게 해독해야 할 대상"이며 "종교는 이성에 결코 낯설지 않은 비합리적 관심과 욕망에서부터 시작한다"는 점을 깨우쳐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리처드 도킨스가 인류가 이런 종교로부터 조금도 혜택을 받은 바 없다는 식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은 사실에 맞지 않고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신은 위대하지 않다(God Is Not Great)>(김승욱 옮김, 알마 펴냄)은 종교인들이 기성 질서의 억압에 목숨을 걸고 저항하는 현실에는 눈을 감았다고 비판했다.
바로 이런 식이기 때문에 이들은 모두 "세계 자본주의의 해악에 대해서는 놀라우리만치 언급을 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우리의 이성은 "사랑과 성실, 평등 공동체와 같은 것에 기반을 둘 때" 비로소 "믿음과 이성이 서로 겉돌지 않고" 현실에 대한 "비판적 사고"를 이루어 내고 새로운 희망을 태어나게 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결말 부분에서 이글턴은 종교가 가르치고 있듯이 "자신이 누리고 있는 바를 스스로 버리는 과정과 이를 기반으로 해서 철저하게 근본적으로 자신을 새롭게 만드는 길을 통해서만이 인류는 자신을 제대로 회복할 수 있다(only by the process of self-dispossession and radical remaking can humanity come into its own.)"고 말한다. 종교에 대한 그릇된 오해와 편견, 무지를 가지고 있는 자들이 방해하지 않으면 이 모든 일이 보다 빨리 이루어질 것이라는 희망을 단서로 남기고.
이글턴의 이 책은 우리 사회에서 특히 기독교가 안고 있는 문제를 정면으로 독파하게 해줌은 물론이고, 기독교의 출발인 예수 운동의 본래 모습과 그 정신, 그리고 혁명적 의지를 재조명하게 해준다. 뿐만 아니라 바로 거기에서부터 오늘날 자본주의 체제가 인간에게 가하는 야만과 폭력, 기만과 착취에 저항하고 새로운 희망적 대안의 실체를 만들어내는 힘을 발견하는 작업을 촉구한다. 그는 신을 옹호하면서 그와 동시에 이 신이 바라는 인류의 혁명을 옹호하고 있는 것이다.
우파는 기독교를 변질시키고 좌파는 기독교를 버리는 세상에서 테리 이글턴의 이러한 주장이 공감되어간다면 세상은 보다 살기 좋은 곳으로 변해가지 않을까? 쉽지 않은 번역에 충실한 역자의 노고를 주목하며, 우리 사회에 또 하나의 중요한 화두가 던져진 것을 진지하게 성찰할 수 있는 기회가 이 책의 출간을 통해 이루어졌으면 한다. 그에 더하여 성서 텍스트 자체에 대한 깊이 읽기가 가능해진다면, 한국 교회의 저 진저리나는 설교와 행태도 수명을 다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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