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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병 퇴치의 숨은 공로자, 김인제를 아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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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병 퇴치의 숨은 공로자, 김인제를 아는가?

[근대 의료의 풍경·44] 지석영과 우두 ④

1880년대 후반 충청우도에서 펴낸 <우두절목(牛痘節目)>과 <경기 관초>(양력 1888년 9월 29일자), <함경도 관초>(양력 1890년 4월 25일자) 등의 문서들을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은, 우두국의 구체적인 운영 방식을 알 수 있다.

각 도(道)는 감영(도청) 소재지에 우두국(본국)을 설치하고 읍진(邑鎭)에는 분국을 설치했다. 그리고 각 지역에서 필요한 우두 기계와 우두약은 본국에서 구매하도록 했다.

관찰사(감사)는 도에서 행해지는 우두 사업 전반을 감독했다. 군수와 현감은 우두 사업 실시, 우두 의사 감독, 우두 접종 방해자와 기피자 처벌, 외아문에 납부하는 우두세(牛痘稅) 징수 등을 관장했다. 동과 면의 담당자인 존동임(尊洞任)과 면임(面任)은 군수, 현감의 지휘를 받아 아직 접종을 받지 않은 미두아(未痘兒) 명단 작성, 무료 접종 대상자 파악, 접종비 수령 등의 실무를 맡았다.

규정에 따라 모든 영아(嬰兒)는 귀천(신분)에 관계없이 돌이 되기 전에 자격 있는 우두 의사에게 우두 접종을 받아야 했다. 접종비는 1회당 5냥이었으며, 접종 효과가 확인된 다음에 접종 받은 사람(부모)이 존동임/면임에게 지불했다. 경제 능력이 없는 노비, 홀아비, 과부의 자녀는 접종비를 면제받았다. 인두 접종을 받거나, 돌이 지나도록 접종을 받지 않았다가 두창(時痘)에 걸리는 경우에는 벌금 27냥을 내어야 했다.

요컨대, 이 당시의 우두 접종은 강제적이었지만 경제 능력이 없는 일부를 제외하고는 국가의 지원은 전혀 없이 접종을 받는 사람이 전적으로 접종비를 부담하는 방식이었다. 이러한 식의 강제 접종은 우두라는 외래 문물에 대한 정치적, 문화적 거부감과 더불어 민중들이 정부 시책에 저항하는 이유가 되었고, 나아가 국가에 의한 우두 사업이 1890년에 들어 일단 좌초하는 데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 충청우도에서 펴낸 <우두절목>. 태어난 지 70일이 지난 영아(嬰兒)는 누구나 우두 접종을 받아야 했다. 서양에서도 대체로 강제 접종을 했지만, 조선은 일본의 영향을 받아 그러한 방침을 채택했던 것으로 보인다. 박정양이 일본을 시찰한 뒤 우두에 관해 보고한 사항은 거의 그대로 실현되었는데, 그 핵심은 강제 접종과 우두의사 면허제도였다(제42회). 한 가지 뚜렷한 차이는 일본은 "종두"라 했던 반면, 조선은 "우두"라는 용어를 사용했던 점이다. ⓒ프레시안

우두 의사 교육은 감영이 주관했으며, 소정의 교육을 받은 사람에게는 졸업장과 면허장 격인 "본관차첩(本官差帖)"을 주었다(제17회). 이렇게 우두 의사는 조선에서는 처음으로 배타적, 독점적인 시술권(施術權)을 정부로부터 인정받았다. 또 정부는 무당, 종두(인두) 의사의 권리를 일체 인정하지 않았으며, 자격을 인정받지 못한 사람이 우두 시술을 하는 것도 금지했다.

<조선 정부 1차년도 보고서>에서 알렌과 헤론은 1885~1886년 무렵 조선인의 60~70 퍼센트가 인두 접종을 받았음을 시사했다(제27회). 그런데 정부는 어떻게 해서 100년 가까이 널리 활용되어 왔던 인두술을 일거에 금지하고 전면적으로 우두술을 채택했을까?

물론 우두는 인두에 비해 효과가 좋고 부작용이 적은 것이 의학적 정설이다. 하지만 정부가 짧은 기간 동안에 어떻게 거기에 대해 확신을 가지게 되었을까? 그리고 우두와 인두를 병용할 수도 있었을 텐데, 왜 그러한 방식은 취하지 않았을까? 또 우두 보급을 국가 사업으로 추진했던 세력은 누구였을까? 아마 김옥균(제42회) 일파가 우두 보급에 가장 적극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김옥균 등은 갑신 쿠데타의 실패로 몰락했고, 그들이 추진했던 모든 정책은 의심의 대상이 되었을 시기였다. 앞으로 더 많은 연구와 논의가 필요한 지점이다.

우두 의사는 세 가지의 세금 또는 수수료를 납부했다. 액수가 가장 큰 것은 군현(郡縣)과 감영을 통해 외아문에 납부하는 우두세였다. 충청우도의 경우, 매해 외아문에 납부하는 우두세는 우두 의사 1인당 평균 150냥으로, 총액은 6000냥 가량이었다. 이는 1883년 이용호의 건의로 설립된 충청우도 우두국의 설치 비용 2900냥의 2배에 해당한다.

그밖에 우두 의사들은 존동임/면임에게 수고비로 접종 1회당 1전을, 군현에 각종 문서 수수료로 1년에 5냥씩 납부했다.

우두 의사는 읍에 1명씩 배치되어 독점적으로 우두 시술을 했다. (충청우도의 경우 홍주읍에만 예외적으로 3명의 우두 의사가 있었다.) 충청우도 지역에서만 적어도 39명의 우두 의사가 활동한 것을 보면, 전국적으로는 우두 의사가 수백 명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어떤 신분의 사람이었으며, 어떤 동기로 우두의사가 되었을까? 먼저 <우두절목>에 나와 있는 충청우도 우두 의사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가나다 순으로 다시 정리한 것임).

구정식(具廷植), 김교정(金敎正), 김연풍(金演豊), 김의제(金義濟, 대흥읍), 김의제(金義濟, 예산읍), 김정재(金正宰), 김진남(金振南), 김혁기(金赫基), 노재순(盧載淳), 박상면(朴相冕), 박영빈(朴英彬), 박영서(朴永瑞), 박영일(朴永日), 박홍순(朴弘淳), 신정균(申鼎均), 심용섭(沈容燮), 심의도(沈冝棹), 심의숙(沈冝肅), 유병능(劉秉能), 윤상규(尹相奎), 윤상엄(尹相儼), 윤석긍(尹錫兢), 윤일병(尹日炳), 이굉원(李宏遠), 이기하(李基夏), 이명섭(李命燮), 이민영(李敏榮), 이종성(李鍾成), 임백찬(任百璨), 임병문(林柄文), 임보상(林輔相), 임헌일(林憲日), 지동필(池東弼), 지수영(池洙永), 최규일(崔圭一), 최태영(崔泰榮), 표기섭(表璣燮), 한익환(韓益煥), 홍병철(洪秉喆).

이 가운데 한익환은 사과(司果·정6품)였으며, 심의숙과 윤석긍도 이름 아래에 "출신(出身)"이라고 적혀 있는 것을 보면 과거 시험을 통과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나머지 사람들의 신분과 배경은 알 수 없지만, 한익환 등 중급 관리와 과거 합격자가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보면 우두 의사의 계층이 그리 낮지 않았으리라고 생각된다.

우두 의사를 교육, 양성하는 우두교수관은 당연히 우두 시술 경험이 많은 사람 중에서 선정되었을 것이다. 우두와 관련된 경력이 비교적 잘 알려진 지석영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우두술을 배웠던 것일까? 또 그들의 신분과 배경은 어떠했을까?

1880년대 후반, 정부가 주도한 우두 사업에서 핵심적 역할을 했을 우두교수관으로 이름이 확인되는 사람은 지석영(충청도), 김병섭(金秉燮, 함경도), 박응조(朴應祚, 경기도) 외에 강남형(姜南馨, 전라도), 김사익(金思益, 경기도), 김인제(金仁濟, 전라도), 유진화(兪鎭華, 전라도), 이호익(李浩翊, 경기도), 홍종규(洪鍾珪, 전라도) 등이 있다.

또한 외아문과 각 감영의 기록에 우두 의사라고 되어 있는 강영노(姜永老, 경상도), 강해원(姜海遠, 경상도), 곽호숭(郭鎬崧, 평안도), 박상경(朴尚璟, 수원부), 박영복(朴英馥, 평안도), 박중빈(朴重彬, 개성부), 손흥조(孫興祖, 평안도), 안경국(安景國), 안정(安禎, 황해도), 이재하(李在夏, 경상도), 이정주(李鼎柱, 강원도), 이혁(李赫‚ 황해도), 정태호(鄭泰好, 강원도), 조인하(趙寅夏, 경상도), 최성학(崔性學, 경기도), 홍의순(洪義淳, 경기도), 황종륜(黃鍾崙, 평안도) 중에서도 기록의 내용에 의하면 실제로 우두교수관 역할을 한 사람이 적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들에 대해 알려진 것이 거의 없지만 적어도 이들은 과거(科擧) 시험의 의과(醫科)에 합격한 의원(醫員)은 아니었다. (지석영, 김인제, 박응조, 유진화, 홍종규는 문과(文科) 합격자였다.) 즉 지석영이 그렇듯이 우두교수관들은 우두술이라는 외래 의술을 시술하는 새로운 종류의 의료인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들과 우두 의사들에 대한 좀더 깊은 연구는 근대 서양 의학 도입 초기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에 적지 않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최초의 우두교수관인 지석영이 1887년 초반까지 정부의 우두 사업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그해 5월 반대 세력의 탄핵으로 전라도 강진현 신지도(薪智島)에 유배되는 바람에 지석영의 직접적인 역할은 거의 사라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 <고종실록> 1887년 5월 18일(음력 4월 26일)자. 서행보가 지석영 등을 갑신 쿠데타에 연루된 인물이라며 처벌할 것을 주장한 내용이다. ⓒ프레시안
1887년 5월 18일(음력 4월 26일), 부사과 서행보(徐行輔)는 지석영 등을 갑신 쿠데타에 연루되었다며 처벌할 것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갑신년의 흉악한 역적들이 난동을 부릴 때 역적의 지시문을 써서 반포한 자는 신기선이고, 박영효가 흉악한 음모를 꾸밀 때 간사한 계책으로 몰래 도운 자는 지석영이며, 박영교가 암행어사로 나갔을 때 학정을 도와주어 백성들에게 해악을 끼치게 한 자도 지석영입니다. 그런데 신기선은 유배만 보냈고 지석영은 아직도 조적(朝籍·공직)에 이름이 올라 있으니, 이러고서도 나라에 법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흉악한 지석영은 우두를 놓는 기술을 가르쳐준다는 구실로 도당을 유인하여 모았으니 또한 그 의도가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 신기선, 지석영, 지운영 등을 다 같이 의금부로 하여금 심문해서 진상을 밝혀내도록 하여 속히 국법을 바로잡으소서. 홍영식의 죄는 더욱 크므로 이미 죽었다고 해서 죄를 따지지 않을 수 없으니 속히 해당 형률을 시행하소서."


갑신 쿠데타가 실패로 돌아간 지 2년 반이나 지난 이때 다시 그 일을 거론하며 지석영 등의 처벌을 요청한 연유를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상소문에 의하면, 우두술 자체가 문제된 것은 아니었고 지석영이 우두 보급을 구실로 작당한 것이 규탄의 한 가지 사유였다.

서상보의 상소에 대해 국왕은 처음에는 소극적 반응을 보였지만, 지석영에 대한 탄핵이 이어지자 5월 22일(음력 4월 30일) 마지못한 듯 지석영을 멀고 살기 어려운 섬(遠惡島)으로 유배 보낼 것을 지시했다.

"지석영은 미천하고 지각이 없는 자이니 애초에 심하게 처벌할 필요가 없다. 그뿐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상소에 열거하여 정상이 밝혀졌으므로 실상 다시 신문할 것이 없고 원악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하되 당일로 압송하라."

이러한 과정을 거쳐 지석영은 1887년 5월 22일부터 1892년 2월 16일(음력 1월 18일)까지 5년 가까이 신지도(薪智島)에 유배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가 실제로 정부의 우두 사업에 관여한 것은 2년이 채 못 되었다. 유배에서 풀려난 뒤에도 지석영은 개인적으로 우두보영당(牛痘保嬰堂)을 세워 우두 보급을 했을 뿐 정부 사업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 <통서일기> 1892년 12월 16일(음력 10월 28일)자. 김인제가 다시 설립된 경상도 우두국의 우두교수직을 수락했다는 기사이다. ⓒ프레시안
한편, 김인제(1854-?)의 경우에 정부의 기록으로 확인되는 활동으로는 다음의 것이 있다.

전 사과(司果) 김인제가 의학이 깊어 전라좌도 우두교수로 삼아 파견하며, 또한 제주에도 겸임케 할 것이니 제주목(濟州牧)에 알려 우두술을 널리 시행하도록 하십시오. (<전라도 관초> 1890년 2월 20일(음력 2월 2일)자)

또한 정부의 우두 사업이 1890년에 들어 일단 좌절된(여기에 대해서는 다음 회에서 살펴볼 것이다) 뒤 재개되는 과정에서도 김인제는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즉 1892년말 외아문이 경상도에 우두국을 다시 설치하면서 김인제를 그곳의 우두교수로 임명했다.

그리고 김인제의 활동은 뒷날 대한제국기의 우두 사업에도 연결된다. 즉, 그는 1900년 충청남도 종두종계소(種痘種繼所)의 감독을 맡아 새로 배출된 종두 의사들과 협력하여 우두 보급 사업을 벌였다(<황성신문> 1900년 3월 5일자). (1890년대 후반부터는 우두 대신 "종두"라는 용어를 더 많이 사용했다.)

그뿐만 아니라 김인제는 1900년 12월, 한성의 광제원과 의학교를 본받아 김원일 등과 함께 자신이 거주하는 공주군에 병원과 의학교를 설립하려고 했다. 그의 시도는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오랫동안 의업에 종사했기 때문에 그러한 시도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 <황성신문> 1900년 12월 6일자. 김인제와 김원일 등이 공주군에 병원과 의학교 설립을 추진하고 있음을 보도했다. ⓒ프레시안
김인제에 대해서는 "7도(에서) 우두교수하였는데, 본시 대한 제일 선수(善手)라 활인(活人) 수만(數萬)하고 송성(頌聲)이 자자한데"(<황성신문> 1900년 3월 5일자)라는 평판이 있었다. 이러한 평판대로라면 김인제는 조선의 여러 지역에서 수많은 사람에게 우두를 시술하고 우두 의사를 양성했던 것이다. 어쩌면 지석영이 아니라 그 동안 별로 알려지지 않았던 김인제가 1880년대 후반 이래 국가가 주도한 우두 보급 사업에서 가장 큰 역할을 했던 인물일지도 모른다.

우두술을 중심으로 근대 의학의 보급과 정착에 노력을 기울였던 김인제에 대해서 앞으로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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