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이듬해인 1883년 충청우도 어사 이용호(李容鎬·1842~?)의 건의와 정부의 결정에 의해 충청도 우두국이 설치, 운영된 것은 좀 더 분명하다. 이로써 우두는 민간인이 사적으로 시술하던 데에서 정부가 주관하는 사업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리고 충청도 우두국은 1885년 이후의 전국적인 우두국 설치와 연결된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
<고종실록> 1883년 10월 23일(음력 9월 23일)자에는 이용호가 제안한 우두국 설치에 대해 국왕에게 보고하고, 그 건의대로 실시할 것을 요청하는 내용이 실려 있다.
이용호는 "우두법은 서양 의학에서 비롯된 것으로 백 번 시험해서 백 번 효과가 있으며 만 번 중 한 번의 실패도 없었습니다. 사징전(査徵錢) 2900여 냥을 내어 충청 감영에 우두국을 설치하고, 경상도 의원(嶺醫)으로 하여금 그 기술을 가르치도록 하며, 필요한 기구 등을 갖출 수 있게 내의원이 지시하도록 해 주십시오"라고 건의해 왔습니다. 우두국을 설치해서 기술을 가르치면 성과를 기대할 수 있으니, (국왕께서는) 우선 감영과 고을에서 적절하게 권면하도록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 <고종실록> 1883년 10월 23일(음력 9월 23일)자. 충청우도 어사 이용호가 제안한 우두국 설치에 관한 기사이다. ⓒ프레시안 |
<한성순보> 1883년 12월 9일(음력 11월 10일)자에도 거의 같은 기사가 실려 있는데, 다만 "영의"를 "경상도 의원(嶺醫)"이 아니라 "관청 의원(營醫)"이라고 표기한 점이 다르다. <고종실록>과 <한성순보> 가운데 어느 쪽이 맞는지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주로 영남 지역에서 활동했던 이재하가 <제영신편>에서 자신이 기호(畿湖) 지방에서 우두 시술을 시작했다고 언급한(제42회) 것으로 보아 <고종실록>의 기록이 더 타당해 보인다.
어쨌든 충청도 우두국에서는 지석영이 아닌 다른 의사(아마도 이재하)를 우두 시술과 교육의 책임자로 활용했다는 점에서, 초기에 우두술을 보급한 공로가 지석영에게만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정부가 최초의 근대 서양식 국립병원인 제중원을 설립한 1885년에 접어들면 우두 사업도 더욱 본격화된다. 아마 1883년에 설치한 충청도 우두국이 성과를 거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제중원과 마찬가지로 우두 보급 사업도 당시 외래 문물의 도입과 시행을 담당했던 외아문(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소관이었다(제5회).
▲ <통서일기(統署日記)> 1885년 11월 6일(음력 9월 30일)자. 충청도 관찰사(錦伯)에게 지석영을 우두교수관으로 임명하여 보내니 우두술을 널리 보급하라는 공문을 보냈다는 내용이다. ⓒ프레시안 |
국왕의 명령을 받들어 부사과(副司果) 지석영을 본도(충청도) 우두교수관으로 임명하여 보내니 관문(공문)이 도착하는 즉시 각 읍에 지시하여 그들로 하여금 총명한 젊은이를 뽑아 정밀하게 배우도록 하고, 또한 철저하게 효유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깨우침이 있도록 하십시오.
외아문의 우두 사업이 2년 전에 이용호가 제안해서 설치한 우두국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이 기록만을 보아서는 알 수 없지만, 이때부터 외아문이 우두 사업을 관장한 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이 공문에서 "우두교수관(牛痘敎授官)"이라는 직책이 처음 거론되며, 그 첫 번째 우두교수관으로 종6품(부사과)의 지석영이 임명된 것은 주목할 일이다. 지석영은 조선 정부가 정식 직책을 부여하여 공인한 최초의 근대식 의사이자 의학 교수였던 것이다.
한편, 1870년대부터 조선에 와서 활동한 외국인 의사의 자격에 대해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하거나 규제한 기록은 발견되지 않는다. 다만 1887년부터, 정부가 운영한 제중원에서 진료한 알렌과 헤론, 빈튼, 에비슨 등에게 "제중원 의사"(제10회)라는 직책을 부여했을 뿐이다. 이렇듯 정부의 공인 절차가 없었기 때문에 엘러스(제20회)와 하디(제35회)처럼 자국에서는 의사 자격이 없는데도 조선에 와서 의사로 행세한 경우도 생길 수 있었다. 지금은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이어서 외아문은 한 달 뒤인 12월 8일(음력 11월 3일) 함경북도에도 우두국을 설치할 것을 지시하고 유학(幼學) 김병섭(金秉燮·1850-?)을 우두교수관으로 파견했다. 기록으로 확인되기로는 김병섭이 두 번째 우두교수관이다.
이때 외아문이 함경도에 보낸 공문의 내용은 "김병섭을 함경북도 우두교수관으로 파견하니 총명한 젊은이들을 가려 뽑아 우두술을 열심히 공부하게 하고 우두교수관이 가져가는 조규(條規) 등을 시행하라"는 것이었다.
▲ <함경도 관초(咸鏡道關草)> 12월 8일(음력 11월 3일)자(왼쪽). 함경북도에 우두교수관 김병섭을 파견한다는 내용이다. <경기 관초(京畿關草)> 1886년 10월 2일(음력 9월 5일)자(오른쪽). 이 무렵 정부의 우두 사업이 전국적으로 실시되었음을 알려주는 기록이다. ⓒ프레시안 |
1885년 충청도와 함경북도부터 시작된 우두 의사 양성과 우두 보급 사업은 1년이 채 안 되어 전국적으로 실시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판단하는 근거는 1886년 10월 2일(음력 9월 5일) 외아문이 경기도에 보낸 다음의 공문이다.
우두 신법(新法)을 널리 펴기 위해, 다른 도에는 관찰사의 시행 지침과 제반 규칙‚ 세칙(章程)이 구비되어 있고 우두교수관이 파견되어 있는데‚ 유독 본도(경기도)만 미비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전정(前正) 박응조(朴應祚)를 (우두교수관으로) 파견하여 혜택을 주려 합니다. 감영에서는 우두를 거치지 않고 곧장 종두(인두)하는 자는 중벌로 다스릴 것이라는 사실을 즉시 각 읍에 고지하십시오.
국가적인 우두 보급 정책을 제일 먼저 시행했을 법한 경기도가 오히려 가장 늦어진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경기도를 마지막으로 정부의 우두 사업은 전국적으로 실시되었다. 또 이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도마다 시행 지침과 제반 규칙‚ 세칙 등을 마련했고 우두교수관을 중심으로 우두 보급을 했다는 점이다. 또한 우두는 장려한 대신 인두는 금지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전국적으로 확대 실시된 우두 보급 사업이 순조롭게만 진행된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1886년 10월 이후에도 외아문이 우두국을 설치하라는 공문을 몇 개 도에 새삼 보낸 것을 보면, 일단 시작했더라도 도중에 중단되거나 유명무실해진 경우가 없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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