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 분노로 싸우지 마라. 차가운 철이 달군 철을 자른다"
- 인도 레슬링 선수출신 구루 '하누만'
대장간 앞을 지날 때마다 생각나는 금언이다. 삼도수군 통제영 12공방에서 비롯된 장인들의 고장답게 통영에는 아직도 도심 한복판에 대장간이 남아 있다. 대장장이가 쇠를 다루는 모습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도시가 몇이나 될까. 그런데 어느 날, 내가 좋아하던 대장간 하나가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통영 중앙 시장의 명물이었던 대장간 '충무공작소.' 대장장이 노인도 행방이 묘연했다. 통영에서는 대장간을 공작소라 칭한다. 옛날에는 성냥간이라 했었다. 대장장이를 '성냥'이라고도 했으니 성냥간은 거기서 비롯된 이름일 것이다. 한때는 또 대장간이라 부르다 지금은 공작소로 굳어졌다. 무언가를 만드는 곳이니 이 또한 적절한 이름이 아니겠는가!
대장장이는 대장간에서 철·구리·주석 등 금속을 불에 달구고 망치로 두드려 연장과 기구를 만드는 장인이다. 딱쇠·대정장이·성냥·바지·야장(冶匠)·철장(鐵匠) 등 다양한 별칭이 있었다. 대장장이는 기원전 10세기 청동기의 출현과 동시에 등장했으니 물경 3000년의 전통을 가진 직업이다. 신라의 왕 석탈해(昔脫解)도 야장이었다. 오랜 부침을 겪었지만, 대장장이도 왕의 후예다!
▲ 충무공작소 주인이 강구안 뒷골목으로 옮겨와 다시 문을 연 삼성공작소. ⓒ강제윤 |
지금 낡고 오래된 충무공작소 건물이 철거된 자리에는 번듯한 새 건물이 들어섰다. 대장간을 지키던 노인은 대체 어디로 떠나신 걸까. 대장간이 있던 자리를 지날 때마다 궁금하고 속상했다. 그래서 어느 때부턴 가는 그 길을 피해 다녔다. 어쩌다 지나더라도 애써 외면하고 대장간이 있던 자리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석탄불을 피워 쇠를 달구고 무쇠를 담금질하는 대장간. 요즈음은 시골의 장터에 가더라도 좀체 만나기 어려운 풍경 하나가 통영 도심 한복판에 있다 사라졌으니 그 아쉬움이 얼마나 크겠는가.
아, 그런데 어제 강구안 뒷골목을 걷다가 문득 오래된 대장간 하나를 발견했다. 이상하다! 자주 지나다니던 골목인데 왜 못 봤던 것일까. 그래도 반가운 마음에 다가가니 이런! 충무공작소 대장장이 노인이 쇠를 달구고 있지 않은가. 중앙 시장 앞에서 사라졌던 노인이 뒷골목으로 대장간을 옮겨서 새로 문을 연 것이다.
그런데 이름이 바뀌었다. 이름도 충무공작소를 그대로 가져왔으면 좋았을 것을, 삼성공작소다. 월세를 두 배 이상 올려달라는 통에 노인은 목 좋은 중앙시장을 떠나 이 후미진 골목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마음이 좋을 리가 없다. 어째서 이름을 바꾸셨느냐고 물으니 돌아오는 대답에 섭섭함이 진하게 묻어난다.
"쫓기난기라! 기분이 나빠서 마 싹 바꿔빗습니다."
점쟁이가 예언한 대장장이의 길
▲지금은 사라진 충무공작소 시절, 쇠를 다루는 대장장이 이평갑 선생. ⓒ강제윤 |
나쁜 기억을 지워버리고 새 술을 새 부대에 담고 싶으셨던 게다. 삼성공작소 주인 이평갑(72세) 선생은 54년째 쇠를 다루고 산다. 통영의 대장장이이니 쇠를 녹여 각종 철물과 병기를 만들던 통제영 12공방중 하나인 야장방의 후예인 셈이다.
선생은 통영 북신동에서 태어나 9살 때 고성으로 머슴살이를 갔었다. 8년간 머슴살이를 하다가 17살 때 통영 서호동의 오씨공작소에 견습공으로 들어갔다. 그는 어떤 점쟁이가 자신이 대장장이가 될 것을 예언했다고 믿는다.
고성에서 머슴살이를 하던 시절 동짓달에 점을 보러 갔더니 점쟁이가 대뜸 "쇳소리 나고 손재주 써먹는 일 있으면 두말하지 말고 따라가라" 했다. 그때는 코웃음을 쳤다. 스스로 연 하나 만들 줄 모를 정도로 손재주가 없을 때였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서호시장의 오씨공작소 주인 할머니가 불러서 일을 시켰다. 그래서 쇠를 따라가라던 점쟁이 말이 신통하게 여겨졌었다. 아직도 그 예언이 자신의 앞날을 결정지었다고 믿는다.
지금이야 대장간 구덕에 전기와 황으로 불을 붙이니 어려울 것 없지만, 당시에는 밀대를 밀고 당기면 바람이 나오는 불매를 불어줘야 불을 피울 수 있었다. 그 추운 겨울에 밀대를 잡고 밀고 당기다 보면 손이 "빠꼼한 데"가 하나도 없었다. 쩍쩍 갈라지고 피가 철철 흘렀다. 그런데 이발소에서 일하는 "이발사들의 손은 보들보들하니"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고생스런 대장간 일 걷어치우고 이발사가 되려고 짐을 쌌다. 그렇게 막 대장간을 나섰는데 늘 친절하게 대해주던 시장통 누나가 길을 막았다. 이발사는 장래가 없으니 "좀 되도(힘들어도) 그냥 대장간에 남으라" 했다. 그래서 다시 짐을 풀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잘한 일이다. 그 누나가 너무나 고맙다.
▲삼성공작소 이평갑 선생이 손으로 직접 만든 농기구들. ⓒ강제윤 |
"오씨공작소 불매 놔뒀으면 황금 덩어린데. 하도 손을 많이 타 팔뚝만 하던 자루가 손가락처럼 가늘어졌거든."
노인이 다루던 그 불매는 오래전에 불에 타 없어졌다. 옛날에는 농기구는 물론이고 목수 연장, 나전칠기 연장, 머구리(잠수부), 해녀 연장까지, 연장만 해도 수십 가지를 대장간에서 직접 만들었다. 노인이 오씨 공작소에서 중앙시장 입구에 있던 충무공작소로 옮긴 것은 40년 전이다. 그 시절에도 노인의 솜씨는 정평이 났었다. 직원이 다섯 명이나 됐으나 다들 그에게만 일을 맡기려고 줄을 섰다. 그때를 생각하면 자부심이 가득하다. 대장간에서 쇠를 만져 1남 2녀를 공부시키고 시집·장가 보냈으니 참으로 고마운 쇠다. 내내 직원으로 일하던 노인은 7년 전쯤 공작소를 인수해 사장이 됐지만, 대장장이는 노인 혼자로 줄었다.
예전에는 통영 시내에만 대장간이 11곳이나 됐는데 이제는 서호시장에 있는 산양공작소와 함께 노인의 대장간만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가끔 농기구 제작 주문이 들어오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수리다. 혼자서 해도 일감이 적다. 지금은 공장에서들 다 나오니까 대장간에서 연장을 만들어 쓸 일이 별로 없다. 농기구도 거의 다 기계화 돼서 사람이 연장을 잡을 일도 많지 않다. 하지만 노인은 살아있는 동안은 대장간을 지킬 생각이다. 그러나 앞날을 어찌 장담할까.
백년 된 모루
▲ 백 년 째 망치로 두들겨 맞고 있는 산양공작소 모루. ⓒ강제윤 |
서호 시장 뒷골목의 산양공작소 주인도 대장장이 생활만 50년이 넘었다. 불에 달군 쇠를 놓고 두드려서 공구를 만드는 모루가 움푹 팼다. 얼마나 많이 두드렸으면 무쇠로 만든 모루가 저토록 닳아 없어졌을까. 모루는 공작재료를 얹어놓고, 해머로 두드려 가공하는 받침대다. 앤빌(anvil)이라고도 하는데 수작업을 하는 대장간이나 작은 공장에서 사용된다. 주인에게 물으니 모루는 자기보다 나이가 많다 한다. 근 백 년이 다 돼가는 모루. 움푹 파인 저 모루, 백 년 동안 두드려 맞고도 무사 하니 다행인가 불쌍한가. 저토록 강인하게 살아남은 저 모루야 말로 문화재가 아니겠는가. 산양공작소 주인은 갈수록 대장간 운영이 어렵다고 푸념이다.
"다 접어야 해 이거. 중국산이 워낙 싼 게 들어오니까는 인력으로 만들어 갖고는 수지가 안 맞아요. 언제까지 할랑가 장담을 못해요."
기계 제작에 밀려 진즉부터 사양산업화 되었던 대장간이 이제는 그보다 더 값싼 중국산 제품에 밀려 아주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대장간에서는 농기구를 제작하기도 하지만 수요는 많지 않다. 그래서 주로 고장 난 농기구 수리를 한다. 나날이 어려워진다. 어쩌면 지금이 대장간을 볼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인 듯싶다. 대장간을 지키고 있는 노인들이 은퇴하면 더는 대장간의 모습을 볼 수 없게 될 것이다.
"우리야 어차피 찌그러지니까 할 수 없지만 젊은 사람이 이거 할라고 합니까. 밥벌이가 되야 하지."
할머니 한분이 수리를 맡겨놨던 호미 세 자루를 찾아서 돌아간다. 저 할머니들도 손으로 농사를 짓는 마지막 세대고 저 대장간 주인도 손으로 농기구를 만드는 마지막 세대가 될 것이 분명해 보인다. 이렇게 3천년 전통의 직업도 허무하게 사라져 가고 있다!
□ <섬학교> 6월 답사 안내 강제윤 시인이 이끄는 인문학습원 <섬학교>가 6월 답사를 떠납니다. 일시 : 1일~2일 / 장소 : 매물도·소매물도 ☞ 자세한 답사 내용 보기 : 한려수도의 비경 소매물도·매물도 기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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