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 교수의 등장으로 민주당이 고심 끝에 마련한 경선 흥행안이 수포로 돌아갈 가능성이 커졌다. 안(案) 그대로 손학규 전 대표나 김두관 전 지사의 지지율이 움직이지 않아 민주당 경선은 '문재인 대세'로 가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그런 차에 안철수 교수가 사실상 출마를 대비한 대선행보를 시작함으로써 민주당의 경선에 대한 관심도가 현저하게 떨어지게 생겼다.
안 교수는 자신의 책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정치 영역에서는 말 속에 담긴 '의도'와 '배경'에 훨씬 집중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 말에 비춰보면, 자신이 책을 출간하고 <힐링 캠프>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것이 어떤 의도로 읽히고 어떤 배경을 가진 것으로 보일지는 잘 알 것이다. 의도는 출마를 할 경우에 딛고 설 수 있는 기반을 만들겠다는 의지다. 배경은 '이대로 가서는 어렵다'는 판단이다.
안 교수가 가진 권력자원은 지지율 하나뿐이다. 착한 성공 스토리, 변화에 대한 열망이나 시대흐름 따위도 결국 지지율로 표현되지 않으면 아무런 힘이 안 된다. 그에겐 세력이나 지역적 지지기반도 없다. 오직 지지율로 버텨왔고, 그것으로 승부할 수밖에 없다. 그 지지율이 최근에 제법 떨어졌다. 자칫 '안철수=승리카드'라는 등식이 무너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지지율이 버텨주지 못하면 결국 하고 싶어도 못한다.
그렇다고 그가 민주당 경선에 참여하는 것도 어렵다. 안철수 현상에 담긴 뜻은 기존 정치나 정당에 대한 반발 또는 거부의 정서다. 때문에 상당한 명분 없이 민주당 경선에 들어가면 안철수 현상은 사라지고 만다. 안철수 현상 없는 안철수가 되는 셈이다. 안 교수로선 안철수 현상을 계속 유지하고 끌고 가는 것이, '있으면 좋은' 정도가 아니라 거의 사활적 조건이다. 그러므로 민주당 경선에 참여하는 것은 문자 그대로 '죽는 수'다.
따라서 이번에 안 교수가 책을 내면서 활동을 재개한 것은 지지율을 다시 끌어올리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이젠하워를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한 운동(Draft Eisenhower movement)처럼 '나와라 안철수' 운동이 생성·확산되도록 하는 기획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민주당의 경선이 흥행 속에 이루어져 민주당 후보의 지지율이 안 교수를 앞지르는 상황을 막으려는 것이다. 이것이 의도이자 배경이다.
안 교수의 대선행보가 민주당으로선 난감하겠지만 야권의 대선 승리를 위해서는 나쁘지 않다. 안철수의 존재, 안철수 현상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야권이 안철수를 빼놓고 대선을 논하는 것은 그 자체로 넌센스다. 문제는 어떻게 해서 안철수 지지로 나타나는, 박근혜도 아니고 민주당 후보도 아닌 제3의 대안을 선호하는 지지층을 견인할 것이냐 하는 것이다.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 ⓒ뉴시스 |
민주당에게 주어진 옵션은 두 가지 정도다. 하나는 민주당이 당내 경선에서 흥행과 감동을 이끌어냄으로써 최종 승리한 당의 후보가 지지율에서 안 교수를 압도하는 것이다. 그럴 가능성도 없지 않다. 승부를 예측할 수 없는데서 나오는 흥행, 정권교체의 열망을 담아낼 수 있는 혁신에서 비롯되는 감동이 있다면 민주당 후보가 대세를 탈 가능성도 없지 않다. 하지만 이 시나리오의 전제는 안 교수가 조용하게 가만히 있는 것이다. 이제 안 교수가 이미 라운드2의 대선 행보를 시작했기 때문에 이 시나리오는 기대하기 어렵게 됐다.
남은 하나는 2002년의 노무현 모델이다. 노무현 후보가 정몽준 후보와의 여론조사를 통한 단일화 경선에서 승리한 것이다. 이렇게만 되면 민주당으로선 최선이다. 경선 절차를 거친데가 안 교수도 일종의 러닝메이트로 대선에 열심히 안 뛸 수 없으니 안 교수 지지층을 견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민주당은 당원 등 조직역량을 감안할 때 단기필마의 안 교수를 이길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두 가지 옵션이 이해찬 대표로 상징되는 민주당의 전략이다. 문재인 의원이 안 교수와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피력하는 것도 이런 셈법 때문이다. 과연 그럴까? 안 교수가 단일후보로 나서는 경우가 민주당 후보의 경우보다 박근혜와의 1:1 대결에서 지지율이 높다. 그 이유는 안 교수 지지층보다는 민주당 지지층이 누가 됐든 이탈 없이 단일후보를 지지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단일화에선 누가 이길 수 있는 후보냐 하는 점이 잣대로 작용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안 교수가 유리해 진다. 최소한 여론조사로 단일화한다면 안 교수가 이길 가능성이 더 크다. 따라서 민주당의 기대는 물거품이 될 가능성이 적지 않다.
민주당으로선 최악이 2011년의 박원순 모델이다. 민주당 후보가 후보단일화에서 소위 시민후보에게 패배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정권교체를 이루겠다는 제1야당 민주당이 대선 후보 없이 대선을 치러야 한다. 이 경우 민주당이 온전하게 남아있을지도 의문이다. 민주당으로선 안 교수에게 후보등록 할 때는 민주당 후보로 나서달라고 애원할 수밖에 없다. 민주당으로선 끔찍한 악몽이다.
안 교수가 야권 단일후보로 선출된 뒤 시민후보 또는 시민정부 운운하면서 무소속으로 나서는 것은 적절한 전략이 아니다. 이렇게 되면 민주당이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설사 지난 서울시장 보궐선거처럼 민주당이 나서더라도 그 지지층이 반발할 것이다. 통합진보당 등 진보정당을 지지하는 유권자들도 마찬가지 생각일 것이다. 이처럼 특정 정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정당이 배제된 정권교체에 얼마나 동의할지는 의문이다. 무소속 대통령이란 구도가 갖는 위험성도 부각될 것이다.
안 교수가 대통령이 되는 것 그 자체가 절대선은 아니다. 문제는 부자민주주의, 가난한 민주주의를 서민민주주의, 행복한 민주주의로 바꾸는 것이다. 그렇다면 안 교수에게 부과되는 역사적 책무도 있다. 민주당 혁신을 추동하고, 상생의 경쟁을 펼치는 것이다. 민주당을 흔들고, 위축시키면 자신이 후보로 될 가능성은 커질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대통령이 될 가능성은 줄어든다. 설사 이기더라도 대통령의 '나 홀로 개혁'으로 부자 나라 대한민국을 바꿀 수는 없다. 정당이 배제된 개혁이 얼마나 위험하고 무력한지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잘 보여주었다.
이번의 책에서 안 교수는 누구와 함께 할 것인지 분명하게 밝혔다. 야권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자신의 생각을 드러낸 것이다. 이런 생각으로 여권과 같이 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싫든 좋든 야권, 특히 민주당을 파트너로 삼을 수밖에 없다. 독자 후보로 나서 3파전을 치르겠다는 건 일고의 가치도 없다. 무조건 진다. 2파전으로 가더라도 민주당 없이 안 교수가 승리할 가능성은 1%도 안 된다. 따라서 민주당 지지층을 배려하고 소중히 여겨야 한다. 그냥 따라오라고 강박하거나, 민주당이 못난 탓이라는 식으로 서운하게 하면 안 된다.
이제 안 교수의 생각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게 됐다. 지금부터 안 교수가 보여줄 것은 리더십, 역할이다. 정치인이라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도 중요하지만 그 생각을 어떻게 관철하지도 중요하다. 박근혜 의원이 부동의 1위 자리를 지키는 이유도 자신에게 부여된 역할을 감당해 냈기 때문이다. 그가 생각이나 말로 지금의 자리에 오르지도, 그 자리를 지키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한다.
야권에서 가장 높은 지지율을 가지고 있고, 기성 정치에 대한 불만을 대표하고 있기 때문에 그로서는 야권의 리더로서 걸맞는 리더십과 역할을 해줘야 한다. 민주당의 변화를 추동하고, 대선판을 주도적으로 운영해야 한다. 그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저도 정치에서 대립하는 세력 간의 싸움은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다만 싸울 때 세 가지 관점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무엇을 위해 싸우는가, 어떤 주제를 가지고 싸우는가, 싸움의 결과로 어떤 합의를 끌어내 사회를 발전시키는가죠."
이번 대선이 어떤 주제를 놓고 싸울지, 야권이 어떻게 경쟁하고 그 경쟁을 통해 어떤 결과를 만들어낼지 하는 문제 등도 안 교수가 감당해야 할 몫이다. 이런 역할을 얼마나 잘해 내느냐에 그의 미래가 달려 있다. 그가 이런 말도 했다.
"리더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건전한 생각을 가진 것만으로는 곤란합니다. 결과를 잘 만들어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죠."
따라서 안철수 교수가 2라운드에서 보여줄 것은 리더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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