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광고에 작고한 정주영 회장이 등장한 적이 있다. 그는 열심히 일해서 성공한 인물의 전형이다. 그런 그가 세상을 떠난 뒤 광고에 등장한 것도 가치 인프라의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의 아들인 정몽준 의원이 대선 출마를 위해 아버지에게 기댄 것이다. 정주영을 다시 불러내 그로 상징되는 가치를 자신이 구현하고 있다는 이미지를 낳기 위해서다. 박정희 때문에 박근혜를 좋아하듯이, 정주영 때문에 정몽준을 좋아하도록 만들기 위한 시도로 이해할 수 있다.
누가 뭐래도 보수의 가치 아이콘은 박정희 모델이다. 이 박정희 모델을 거부하고 보수 인사가 대통령이 된 적은 없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박정희를 부정하는 발언을 가끔 하지만 그것은 개인적 감정의 표출일 뿐이다. 그도 박정희 모델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다. 이명박 대통령도 선거에서 박정희 모델이란 가치 인프라의 덕을 많이 봤다. '민주적' 박정희 모델을 연상했기에 대권주자로 발돋움했고, 그랬기에 당내 경선에서 박정희의 딸을 꺾은 다음 내쳐 본선에서도 일방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민주나 개혁 또는 진보를 표방하는 세력을 통칭해 '진보'라고 한다면, 진보의 정치적 가치 인프라는 단연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김대중은 오랫동안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했고, 햇볕정책으로 분단체제의 예각을 둔화시켜 평화의 길을 열었다. 노무현은 지역주의 타파, 반칙과 특혜의 일소를 위해 일생을 바쳤다. 지역 균형 발전을 도모했다. 이들 외에 진보에서 배출된 대통령이 없기도 하지만, 어쨌든 김대중·노무현 모델은 진보의 가치 인프라로 자리잡고 있다.
진보의 역사를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여운형, 조봉암이 있다. 이들의 삶과 주장도 진보의 가치 인프라로 자리잡고 있다. 그런데 이들은 암살되거나 사법살인 당해 온전하게 뜻을 펼치지 못했다. 따라서 귀감이 될 수는 있으나 모델로서 인정받기엔 무리다. 극히 일부지만 북의 김일성에게 가치 인프라를 발견하는 사람들이 있는 듯하다. 가당찮다. 이 점은 통합진보당의 구 당권파가 보여주는 잔혹한 퇴행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따라서 지금으로선 김대중·노무현 모델이 진보의 가치 인프라에서 중심이다. 그렇다면 야권의 후보가 그에 기대어 대통령이 되는 것이 가능할까?
▲5.16 군사정변을 일이킨 당시의 고(故) 박정희 대통령(가운데) |
현재 야권의 대권주자 중에서는 DJ 계승을 우선적 정체성으로 내세우는 후보는 없다. 노무현 모델에 기대는 후보만 있다. 친노 후보는 지금 민주당 후보 중에 제일 세다. 지지율이 가장 높고, 당내 기반도 튼튼하다. 새로운 인물이라 식상한 꼰대 이미지도 없다. 부산·경남 출신이어서 잘하면 박근혜 위원장의 텃밭인 영남의 일각을 허물 수도 있다. 바로 문재인 상임고문이다. 그렇다면 질문이 이렇게 된다. 문재인은 노무현 프레임으로 승리할 수 있나?
없다. 노무현 프레임만으로 이길 수 없다. 노무현 모델에 대한 향수가 있으나 그 그리움의 대상은 대통령으로서의 업적이라기보다 정치인 노무현이 걸어왔던 길이다. 다시 말해 노무현 개인은 사랑받는 존재로 남아있지만 대통령으로서 보낸 시절, 이른바 노무현 시대에 대한 평가는 인물 호감에 못 미친다. 사실 노무현 시대에 '없는 사람'의 삶이 나아졌다고 자신 있게 말하기란 쉽지 않다. 때문에 가치 인프라로서 노무현 모델이 갖는 힘은 박정희 모델에 비해 떨어진다. 이 점에서 문재인이 노무현 프레임으로만 이길 수 없는 이유를 발견할 수 있다.
사실 모델 간의 경쟁력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모델을 구현하고 있는 인물의 경쟁력이다. 아무리 기대는 모델이 좋아도 새로움이나 개량이 없으면 대중에게 소구되기 어렵다. 2007년 박근혜가 패한 것도 박정희 모델에서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못 보여줬기 때문이다. 2012년 정몽준이 뜨지 못하는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다. 이명박의 경우 기업에서의 성공신화를 자랑하는 한편 서울시장 시절 보여준 업적이 대단했다. 박정희 모델의 부담스런 요소, 즉 비민주적 통치나 권위적 리더십 등의 모습이 재현되지 않을 것이란 기대를 낳기에 충분했다.
정치적 실체로서 문재인이 노무현 모델을 온전하게 구현하고 있는지, 거기서 얼마나 더 발전했는지는 알 수 없다. 문재인이 제시하거나 보여준 것이 아직 너무 없기 때문이다. 흔한 방법으로 여론조사를 통해 가늠해 볼 수도 있지만 그건 인상비평의 수준일 뿐 실질적 의미를 갖기는 어렵다. 따라서 논리적으로 따져보는 수밖에 없다.
노무현은 정치에 입문하자마자 있었던 5공 청문회 활동에서부터 그가 지향하는 바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의 살아온 길을 보면 그가 왜 정치하는지, 어떤 대한민국을 지향하는지 쉽게 알 수 있다. 그는 일관되게 지역주의 해소를 위해 무모하게 부산에 출마했고, 반칙과 특혜를 온몸으로 거부했다. 유·불리를 떠나 집요하게 명분에 매달렸다.
이런 점에 비춰보면 아직 정치인 문재인이 무엇을 상징하는지 알기엔 그가 던지는 메시지나 컨텐츠가 많이 부족하다. 그의 삶은 담백한 인간미, 맑은 기상을 보여준다. 허나 그가 지향하는 대한민국의 상이 어떤 것인지 명확하게 알기는 어렵다. 게다가 그에게서는 아직 지도자의 '포스'(force)가 느껴지지 않는다. 그가 쓴 책 <운명>을 보면, 지도자다운 결정권을 행사한 것으로 확인되는 대목이 없다. 여태 대중이 노무현에게서 불편해 하는 부분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에 대해 답이 없다.
실패의 교훈일까. 박근혜는 박정희 모델에 기대지만 그것을 넘어서려는 모습을 보였다. "아버지의 꿈은 복지국가였다." 아류나 답습으로는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문재인도 이 사실을 아는 듯하다. "이미 제가 갖고 있는 비전은 참여정부의 비전이나 또 노무현 대통령의 비전하고는 크게 다르다." 그런데 그 비전이 뭔지, 어떻게 다른지 말하지 않고 있다. 노무현 시대를 뛰어넘겠다는 선언이 수사에 그치지 않으려면 비전을 보여줘야 하고, 그걸 실천에 옮길 리더십을 보여줘야 한다. 아쉽게도 문재인은 비전과 리더십에서 아직 노무현 프레임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총선 후 박근혜가 뒷걸음 치고 있다고 해서 이 과제가 없어지진 않는다.
또 다른 친노 후보인 김두관 경남지사는 떠오르는 기대주다. 여의도 바닥이나 전문가들 사이에는 여야를 막론하고 김두관을 거명 또는 호명하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다. 사실 그는 문재인보다 훨씬 일찍 '노무현 다시(again)' 대신 '노무현 넘어'(beyond)가 답이라고 말했다. 방향은 잘 잡고 있는 듯하다. 게다가 그는 불모지 경남지역에서 도지사로 당선됐고, 연립자치정부 실험을 잘 해오고 있다. 그러나 그 역시 아직 어떤 나라를 만들 것인지에 대한 제시가 미진하다. 경남을 넘어 전국적 차원의 정치적 리더십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특히 미적대며 대중의 관심을 끌어당길 모멘텀(momentum)을 잡아채지 못하고 있다.
그와 문재인 모두 호남에서 지지받는 영남후보, 지역구도 타파 등을 핵심으로 하는 노무현 프레임으로만 대선에 임한다면 결코 승리할 수 없다. 노무현 모델을 넘어서는 대안 모델의 핵심은 서민과 그 서민의 삶이다. 지금 대중이 원하는 것은 부산대통령, 경남대통령이 아니라 서민대통령이다. 지역 화합을 넘어 서민의 삶을 낫게 만들 비전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이래야 김대중·노무현 모델이란 가치 인프라도 제대로 작동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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