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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 남북관계가 왜 중요한지 알려준 '뛰어난' 반면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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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 남북관계가 왜 중요한지 알려준 '뛰어난' 반면교사"

[한반도 브리핑] 한반도 정세 변화에 한국이 없다

북미협상으로 6자회담 재개에 일단 청신호가 켜졌지만 한반도는 여전히 먹구름이다. 남북의 기싸움과 대결 양상이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은 이미 이명박 정부와 상종불가 입장을 천명하고 남측의 접촉 제의에 일절 대응하지 않고 있다. 이명박 정부도 진보진영에서 요구하는 대북 5.24 조치 철회와 금강산 관광 재개 및 식량지원 등에 묵묵부답이고 북의 변화만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한미 연합훈련이 강행되면서 군사적 긴장이 우려되더니 남측의 군부대에 김정일·김정은 타도 문구가 알려지면서 급기야 북은 대규모 군중 궐기대회를 갖고 김정은 부위원장이 이례적으로 판문점을 방문하는 등 날 선 대치가 지속되고 있다.

최근 한반도 상황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의 위치가 너무도 답답함을 느끼게 된다. 미국과 중국은 위기를 완화시키고 남북의 대결을 막는 역할에 서 있는 반면, 남북은 대놓고 긴장과 대결을 고조시키고 있다. 한반도의 주인인 우리는 매번 긴장 고조와 위기 심화의 주역이 되어 있고 오히려 미국과 중국이 긴장 완화와 위기 관리에 나서는 비정상적 모습을 보이고 있다.

노무현 정부 때만 해도 북미 대결이 심화되고 북핵 문제가 악화되면 그것으로 인한 한반도 긴장 고조와 위기 상황을 막아내는 역할은 대부분 한국이 담당했었다. 2차 북핵 위기 이후 부시 행정부는 일관되게 북한과의 양자 직접 협상을 거부하는 형국이었고, 따라서 북은 특유의 위기조성 전술로 상황을 악화시키곤 했다. 그 때마다 한반도 위기 고조를 막고 북미간 협상을 이끌어낸 것은 그나마 노무현 정부였다.

2004년 6자회담 중단 이후 2005년 2월 10일 북한의 '핵보유' 성명은 북미간 긴장을 최대로 고조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북한으로 하여금 6자회담에 복귀토록 하고 북핵 문제 모범답안인 9.19 공동성명을 이끌어낼 수 있었던 데는 당시 한국정부의 적극적 중재 역할이 주효했다. 6.17 면담을 통해 김정일 위원장을 회담에 복귀시켰고 북미 타협을 종용해 9.19 공동성명을 견인해냈던 것이 바로 한국 정부였다.

2006년 10월 북한의 핵실험은 북핵 문제를 최악으로 몰고 간 위기 상황이었다. 당장 미국은 북에 대한 제재를 단행하고 더 이상의 대화를 포기했다. 그러나 핵실험 이후 조성된 한반도 위기 상황에서도 결국 북미 협상을 이끌어내고 2007년 2.13 합의라는 비핵화 첫 단계 프로세스를 도출해내는 데는 역시 한국 정부의 역할이 핵심이었다. 핵실험 직후에도 노무현 정부는 미국을 설득해 '포괄적인' 대북접근을 끈질기게 요구했고 결국 2006년 12월 6자회담 수석대표회담 개최 이후 2007년 1월 북미 베를린 양자협상의 분위기를 만들어줬다. 그 토대는 일관되게 유지할 수 있었던 남북관계라는 끈이 작동했기 때문이었다.

▲ 이명박 대통령 ⓒ청와대

주역은 중국과 미국

그러나 이명박 정부 들어 한반도 위기 관리의 주역은 미국과 중국으로 바뀌었고 예전의 한국의 모습은 도무지 볼 수가 없다. 핵 신고서 제출 이후 검증의정서 문제로 북미가 신경전을 벌이던 2008년 12월의 6자회담에서 가장 강경한 입장은 이명박 정부였다. 미국과 일본보다 한 술 더 떠서 시료채취 등을 포함한 검증의정서에 북이 동의하지 않으면 주기로 약속한 중유마저 중단하겠다는 초강경 입장을 한국의 6자회담 대표는 서슴지 않고 주장했다. 2009년 8월 이후 북한의 잇따른 유화 조치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북의 완전 굴복만을 요구하며 남북관계 경색을 주도했던 것도 이명박 정부였다. 2010년 천안함 사태와 연평도 포격을 지나면서 남북의 긴장과 대결은 되돌리기 어려운 지점을 통과했고 이명박 정부 동안 매번 한반도 위기 관리는 우리의 손을 떠나 중국과 미국의 몫이 되어버렸다.

2009년 5월 북한의 추가 핵실험은 중국을 경악시켰고 미국이 주도하는 유엔 안보리의 대북제재에 중국이 지지하도록 만들었다. 이미 남북관계가 중단된 이명박 정부 역시 미국과 공조해 대북 압박에 적극 나섰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북한의 2차 핵실험 이후 북미 대결과 한반도 긴장고조 상황에서 북을 관리하고 6자회담에 나올 수 있도록 설득할 수 있었던 나라는 중국이었다. 대북 제재 이후 '6자회담은 영원히 끝났다'고 선언한 북한이 그나마 북미회담을 해보고 6자회담에 나올 수 있다고 입장을 바꿀 수 있었던 것은 중국의 역할이었다. 2009년 9월 다이빙궈 국무위원의 방북과 10월 원자바오 총리의 방북을 통해 김정일 위원장은 '북미 양자대화 이후 다자회담 용의'라는 표현으로 6자회담 재개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여기에는 핵실험 직후에 개최된 것으로 알려진 중국 공산당의 중앙외사영도소조에서 북한을 다시 끌어안기로 한 결정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2010년 천안함 사태는 '북중 대 한미'의 신냉전 구도를 격화시켰고 그해 말 발발한 연평도 포격은 사실상 한반도에 전쟁 위기까지 실감케 했다. 연평도 포격 이후 최고조로 달한 한반도 위기 상황에서도 위기 관리는 중국과 미국의 몫이었다. 연평도 사태 직후 심각한 긴장 상황을 해소하기 위해 중국은 6자회담 수석대표간의 긴급협의를 제안했고 다이빙궈 국무위원을 남북에 동시 방문케 해서 더 이상의 긴장과 군사적 충돌을 막는데 주력했다. 평양에 가서는 북의 추가 도발시 중국이 지지할 수 없다는 입장을 강력히 전달하고 서울에 와서는 추가 충돌이 아닌 대화를 통한 긴장 완화를 주문했다. 중국의 노력이 그나마 연평도 이후 위기를 관리하는 데 기여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한국전쟁 이후 최초로 영토에 포격을 받고도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이명박 정부는 미국을 끌어들여 대규모 해상 합동훈련을 하고 나서 포격으로 중단된 사격연습을 강행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미 연평도 포격으로 한반도 위기가 최고조에 달한 상황에서 이명박 정부가 사격 재개를 강행할 경우 실제 국지전으로 확대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팽배했고 결국 유엔 안보리에서 남측의 사격 강행을 자제해달라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급기야 사격 전날에는 주한 미국 대사와 주한미군사령관이 청와대를 방문해 만약에 있을지도 모를 한반도 위기에 대응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아찔한 상황에서 그나마 위기 관리에는 중국과 미국의 모습만 보였던 셈이다.

2011년 12월 김정일 위원장 사망은 사실 북한 최고지도자의 유고 사태로서 긴박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이때도 중국이 단연 앞섰다. 북한 지도자 사망 이후 이틀 동안 아무런 낌새도 모르던 이명박 정부는 북한의 공식 발표를 듣고서야 대책 마련에 분주했다. 그러나 중국은 김정일 유고 사태를 대비한 매뉴얼을 분명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고, 이에 따라 치밀하고도 차분하고 신속하게 위기 관리에 들어갔다. 공식 발표 이전에 이미 중국은 북으로부터 사망 사실을 통보 받았고 직후 국경 지역의 군 대비 태세 점검에 나섰다는 중국 전문가의 분석도 나온다. 사망 발표 직후 중국은 신속하게 외교부 성명을 통해 조의 표명과 김정은 체제의 안정에 전폭적인 지지 입장을 밝힘으로써 만약에 있을 사태에 대비하면서 북한의 안정적 권력 승계를 후원했다. 그 바쁜 정치국 상무위원 전원이 북경 주재 북한 대사관에서 신속히 조문을 표시한 장면은 중국식 위기 관리의 단적인 모습이었다. 공식 발표 직후 외교부 차관이 북경 주재 미국 대사와 한국 대사, 일본 대사 등을 불러 한반도의 안정이 위협받지 않도록 경거망동을 자제해 줄 것을 주문했다는 보도는 김 위원장 사망 직후 한반도 위기 관리와 북한 관리에 중국이 얼마나 지대한 관심을 가졌는지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악화일로의 북핵 문제를 관리하고 위기를 완화시키는 데서도 한국의 역할은 보이지 않는다. 2008년 이후 중단된 6자회담 재개를 위해 북미는 지난 해 두 차례 고위급 회담을 가진 데 이어 최근 북경에서 3차 회담을 갖고 북한의 비핵화 사전 조치와 미국의 대북 영양 지원 합의 사실을 동시 발표했다. 합의 내용이 이행되면 6자회담이 열릴 수 있다는 희망섞인 관측도 제기된다.

구경꾼 자초한 MB 정부

그러나 북핵 문제 진전과정에서 한국 정부는 아무런 역할을 할 수 없었다. 지난해는 그래도 미국이 한국 정부의 체면을 생각해서 북미 회담 이전에 남북 회담을 요구했고 그 덕분에 7월 발리와 9월 베이징에서의 남북 비핵화회담이 열릴 수 있었다. 물론 두 차례의 남북회담은 합의 도출이나 의미있는 결과 생산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구조였다. 단지 북미 회담으로 가기 위한 징검다리로서 사진찍기용 만남이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3차 북미 회담은 이마저도 생략한 채 진행되었고 북미는 생산적인 합의를 도출해냈다. 이미 남북은 핵문제를 포함해 어떤 의제를 놓고 회담을 한다 해도 내실 있는 진전이나 합의를 이끌어내기엔 너무 나가버린 상황이었다. 북미 협상의 진전으로 6자회담이 재개된다 해도 남북관계가 중단된 상황에서 한국 정부는 설 자리가 없게 되었다. 이제 북핵 문제의 해결과 진전 과정에서 한국 정부는 1993~944년의 1차 북핵 협상과 마찬가지로 북미 회담의 결과만을 기다려야 하고 단지 어깨너머로 상황을 지켜봐야 할 뿐이다.

이처럼 이명박 정부가 고립되고 소외되는 처참한 현실은 근본적으로 남북관계가 중단된 데에서 기인한다. 노무현 정부 당시 북핵 위기를 완화시키고 북미 협상을 진전시킬 수 있었던 한국의 당사자로서의 파워는 남북관계라는 독자적 끈을 지속적으로 유지했기 때문이었다. 남북관계가 끊길 경우 한국이 북미 협상의 구경꾼으로 전락하게 됨은 이미 지난 경험에서 충분히 알 수 있다. 남북관계가 망실될 경우 한국은 북한에 대한 지렛대와 개입력이 상실되고 이는 결국 북중관계 심화를 야기하고 북미 협상에서 외교적 왕따가 되고 마는 악순환의 고리에 들게 됨을 의미한다. 북한을 놓치면 한반도에서 한국 정부의 영향력과 발언권은 그만큼 사라지게 됨을 이제라도 이명박 정부는 깨닫기 바란다. 물론 때가 늦은 것 같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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