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처음 김근태라는 이름을 접한 것은 1980년대 후반이었다. 대학 시절 안락한 미래를 위한 설계에 몰두해 있던 나는 친구의 서재에서 우연히 민청련 김근태 의장의 민주화 투쟁과정을 읽고 큰 충격에 빠졌다. 소위 KS(경기고-서울대) 출신의 초일류 엘리트가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극한의 고통을 견디며 진정으로 추구하는 것을 무엇일까? 그날 밤잠을 설친 나는 김근태 의장이 쓴 글들을 찾아서 읽기 시작했다.
요즘처럼 인터넷 검색이 있지도 않은 시절이라 조각처럼 흩어져서 금지되기도 한 그의 생각을 마음에 새기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새 그는 나의 멘토가 됐고, 나는 그의 열렬할 팬이 되고 있었다. 그는 독재에 저항했고 참혹한 고문이 판치는 야만의 시대를 증거하였으며 우리 시대 상식의 준거였다. 그 모든 것을 넘어 그는 자신의 삶을 통해 민주주의와 인간의 존엄성의 참된 의미를 가장 웅변적으로 대변하였다. 나는 그의 글에 감동하고, 그의 실천에 전율하였으며, 그의 휴머니즘에 녹아들었다. 공부를 더해 학자가 되기를 결심한 것도 그가 그토록 주장한 '실력있는' 개혁주의자가 되기 위함이었다.
민주정부 출범과 함께 그는 국회의원이 되었다. 하지만 내리 3선을 하고도 '정치인 김근태' 의원은 다소 어색하였다. 박사 과정 유학 시절, 멀리서 들리는 김근태 의원의 의정 활동에 성원을 보냈고, 귀국 후 후원회에 가입하여 활동하기도 했지만, 솔직히 그의 정치활동이 결과적으로 성공했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지역과 계파가 난립하는 한국 정치의 과두적 메카니즘 속에서 그의 올곧은 선비정신과 신념이 제대로 자리매김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더욱이 안타깝게도 그는 정치인으로서 필수덕목인 지지자들을 규합하거나 사람이름을 기억함에 매우 서툴렀다. 그래서인지 한국 민주주의의 산증인으로서 뛰어난 실천적 지성과 시대를 앞서가는 경륜을 겸비한 그였지만, 당내에서 항상 비주류를 벗어나지 못했다. 어쩌면 그가 정계에 입문해서도 다시 한 번 남이 가지 않은 길을 자처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김근태 선생을 두 번 뵀다. 처음 그를 본 것은 2004년 당시 집권당의 잘나가는 정치인으로 내가 재직하던 동국대 행사에 참여하였을 때다. 학교 행사를 핑계로 수업도 미루고 찾아간 나는 1미터도 안되는 거리에서 그를 보았지만 인사를 건네지 못했다. 포승줄에 묶여서 부정한 권력을 비웃는 듯한 형형한 그의 눈빛을 가슴에 품고 있던 나는 턱 없이 짧은 시간과 수많은 인파 속에서 나의 마음을 진정성 있게 전할 자신이 없었다. 18대 선거에 안타깝게 낙선한 후, 후원회 활동도 뜸해졌다. 나와 그를 연결시키는 유일한 통로는 수업시 간을 통하여 '김근태'라는 이름이 젊은 세대들 가슴속에 잊혀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얼마 전 그와 두 번째 만남을 가졌다. 영전 앞에서이다. 빈소를 찾아가면서 마음이 떨렸다. 그가 이렇게 빨리 세상을 떠날지는 꿈에도 생각 못했다. 쟁쟁한 민주화의 투사들이 둘러싼 빈소 입구를 지나며 나 자신이 더욱 초라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활짝 웃고 있는 그의 영전을 보니 마음이 일시에 편안해졌다. 분명히 천국에 가 계실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런데 조문을 마치고 유족들에게 난데없이 "감사합니다"라는 인사를 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국제법 교수로서 외교적 멘트에서 좀처럼 실수를 하지 않는다고 자부하던 내가 왜 이런 결정적인 순간에 저런 황당한 인사를 했을까 하는 자책감으로 귀가하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집에 와서 그럼 내가 전할 수 있는 인사가 무엇이었을까 되짚어 보았다. 묘한 것은 그래도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입가에서 흘러나왔다. 내가 그에게 너무나 많은 빚을 지고 있었던 것이다.
정의를 위해 다른 방법으로 싸운 두 신부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미션>에서 교황청에서 파견한 신부가 교황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낸다. "신부들은 죽고, 저만 살아남았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죽은 건 나고, 산 자는 그들입니다." 김근태는 우리 곁을 떠났지만, 진정으로 죽은 것은 독재와 야만일 것이다. 2012년, 그의 정신이 우리 마음속에 다시 한 번 불꽃처럼 타오르길 기대한다. (☞한국미래발전연구원 주간논평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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