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사람들과 달리 이른바 '지식인'의 현실과의 힘겨루기는 더더욱 힘들다. <1800자의 시대 스케치(오래 펴냄) 저자 김기정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의 말대로 '시대상의 담론을 읽어야 하고 조심스럽게 미래상을 제시하는 일이 지식인에게 책무로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특히나 20세기가 지나고 21세기 새로운 밀레니엄의 시대에 지식인이 현실을 똑바로 진단하고 직시하고 나아가 미래의 바람직한 발전 방향을 전망하고 제시하는 일은 더더욱 어려운 작업일 것이다.
지식인이 칼럼을 모아 책으로 내는 것은 일단 위험하다. 여기 저기, 이때 저때 시의적 사건과 현상에 대한 시론을 적은 것이 칼럼이라면, 이들을 한 데 모아 책으로 내면 우선 시의적절한 타이밍을 놓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기껏해야 1800자 정도 되는 원고지 9매에 맞춰야 하는 분량의 제약 역시 자기 주장의 설득력을 충분히 소화해내기 힘든 조건이다. 일반적으로 지식인이 자신의 학문적 주장과 성과를 논문 형식의 전공서나 교양서로 내놓는 풍토에 비교해 봐도 칼럼을 모아 책으로 내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
현실 진단과 미래 전망이라는 실로 어려운 지식인의 책무를 충실히 이행하는 동시에 원천적으로 위험해 보이는 칼럼집이 학문적으로나 실용적으로 세상의 현실에 크게 기여할 수 있음을 입증한 책이 최근 출간되었다. 중견 국제정치학자인 김기정 교수의 <1800자의 시대 스케치>가 바로 그 책이다. 지식인의 현실과의 힘겨루기가 제대로 성공할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도 이 책에서는 한 순간에 해소된다. 칼럼집의 단행본 출간이라는 지식인의 다소 위험한(?) 작업이라는 불안감도 이 책안에서는 눈 녹듯이 사라지게 된다.
▲ <1800자의 시대 스케치>(김기정 지음. 오래 펴냄) |
지식인이 21세기 첫 10년의 시대상을 통찰하고 미래의 발전 방향을 제시하는 데서 진보와 보수의 '발주처'와 상관없이 일관되게 자신의 국제정치학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현실과의 싸움에서 이긴 것이라고 충분히 평가할 수 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저자는 힘에 바탕한 현실주의 입장보다 상호 협력의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는 자유주의적 입장의 신봉자로서 한국의 국제정치학계를 대표해왔다. 따라서 그가 집필한 칼럼은 시종일관 적대적 대결을 완화하고 화해적 협력을 증진하는 방향과 토대 위에서 현실을 파악하고 미래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책의 1부를 구성하고 있는 '21세기 국제정치'의 현실과 미래상에 대해서도 저자는 미국의 패권적 일방주의 대신 자유주의 국제정치의 입장을 강조하고 동시에 동아시아의 지역질서도 보다 평화적인 상호 협력적 질서를 바람직한 대안으로 주장하고 있다. 21세기 국제질서와 동아시아 질서 공히 공존과 협력을 강조하는 자유주의 입장에서 진단하고 처방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2부인 '21세기 한반도, 북한 핵문제와 남북한 관계' 역시 저자는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과 화해협력의 남북관계를 위해 시종일관 노력하고 고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1세기 첫 10년이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에서 시작되어 민족 화해의 증진과 남북관계 개선으로 이어졌지만 2차 북핵 문제의 대두와 함께 우여곡절의 한반도 정세를 목도해야 했다. 이 시기에 저자가 북핵 문제와 남북관계에 대해 희망과 기대, 걱정과 우려를 함께 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지나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로는 화해협력의 대북정책 대신 압박과 봉쇄의 대북정책으로 전환되면서 북핵 문제와 남북관계 모두 최악으로 흐르고 말았고 저자는 이에 대해 따가운 비판과 정책 전환의 필요성을 지속적으로 주문했다. 국제질서와 동아이사 질서에 관한 자유주의 입장이 남북관계와 한반도 이슈에서도 일관되게 견지되고 유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부 '21세기 한국 외교의 진단과 과제'는 말 그대로 대한민국의 외교가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가야하는지에 대한 저자의 분석과 처방이 담겨져 있다. 이 역시 저자의 자유주의 입장을 근간으로 한미동맹의 역동적이고 미래지향적인 변화를 주문하는가 하면 냉전기 동·서 진영의 한축에 편입되어 안보-자주성 교환의 한미동맹에 갇혀있던 데에서 벗어나 동북아의 평화와 협력을 촉진하고 견인해 내는 한국 외교의 패러다임 전환이 시급함을 강조하기도 한다.
또한 국제정치를 힘의 관계에로만 보는 협소한 시각에 한국 외교가 머물러 있지 말고 의도나 비전이 중요하고 따라서 한국이 하드 파워에서는 못 미치지만 동북아에서 평화의 균형자로서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고 역설하기도 한다.
21세기 국제질서와 동아시아 질서의 미래상에 대해서도, 그리고 한반도 정세와 남북관계 및 북핵 문제에서도 한국 외교의 나아갈 방향에 대해서도 저자는 수미일관하게 상호 의존의 협력적 질서와 공존과 대화의 국제정치를 주장하고 확신하고 전파하고 있는 셈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지식인의 현실과의 힘겨루기를 정당하고 당당하게 이겨내고 있는 것이다.
칼럼집인데도 지식인의 현실 참여와 사회 기여가 관철되고 있음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 비롯된다. 우선 칼럼이라는 제한된 형식임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글에는 한결같이 국제정치학적 배경과 인식이 깔려 있다. 때문에 1800자의 짧은 글에서도 국제정치학적 개념과 용어 그리고 학술적 고민과 논의들이 압축적으로 녹아 있다.
또한 과거에 기고한 칼럼을 단순히 모아 놓는데 그치지 않고 당시 칼럼을 쓰게 된 배경과 쟁점에 대해 앞뒤로 상황을 설명하고 용어를 정리하고 사실관계를 모아놓고 있기 때문에 실제 이슈와 연관되어 국제정치학적 학습이 가능한 실용적인 학술교양서로서의 충분한 가치를 갖게 되었다. 또한 신문 칼럼이 아닌 저널에 기고한 좀 더 긴 글이 중간 중간 실려 있어서 국제정치적 이해와 설명에 신뢰를 더하고 있기도 하다.
원래 칼럼을 쓰기란 논문을 쓰는 것보다 어렵다. 이미 알려진 팩트와 기자가 정리할 정도의 분석은 애초부터 칼럼의 내용이 돼서는 안 된다. 훌륭한 칼럼은 팩트와 팩트를 연결하는 종합적 시각을 제공하거나 일반적으로 놓치거나 빠트리기 쉬운 그렇지만 매우 중요한 시각을 끄집어내야 한다. 그래서 혹자는 장문의 학술논문이 1800자의 칼럼쓰기보다 훨씬 수월하다고 실토하기도 한다.
김기정 교수의 칼럼은 국제정치학 교과서로도 손색없는 내용을 담고 있으면서 동시에 훌륭한 칼럼에 손꼽힐 정도로 모범적인 글쓰기를 보여주고 있다. 칼럼 자체로도 칼럼집의 유용성으로도 저자의 글은 충분히 찬사를 받을 만한 셈이다.
결국 저자는 이 책을 통해 공존과 대화, 화해와 협력의 자유주의 국제정치 시각이 올바른 것임을 강조함으로써 현실과의 겨루기에서 지식인의 책무를 다하고 있고, 동시에 칼럼을 책으로 낸다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국제정치학 교과서의 유용성으로 그 위험을 돌파해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나 책의 4부에서 한국의 정치와 사회에 대해서도 예리한 진단과 탁월한 통찰력을 보이고 있음은 서평을 쓰는 나에게도 부족한 부분이어서 너무도 부럽기조차 하다. 그의 책이 성공적일 수 있었음은 21세기 첫 10년의 시대 스케치에서 머물지 않고 더 좋은 세상과 더 나은 사회를 향한 지식인의 시대 꿈꾸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그의 꿈꾸기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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