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5 공동선언 11돌이다. 강산도 변할 시기인데 지금의 남북관계는 최악의 파탄지경을 맞고 있다. 냉전 종식 이후 적대와 대결 대신 화해와 협력으로 한반도 평화를 일궈내고 북한의 변화를 이끌어내려는 대북포용정책은 이명박 정부의 출범과 함께 폐기되고 말았다.
이명박 정부는 남북관계를 중단하고 제재와 압박을 통해 북한을 굴복시키겠다는 희망적 사고만을 앞세워 한국전쟁 이후 최악의 군사적 긴장고조와 북핵문제 악화 그리고 더 심각해진 북한의 강경대응과 도발만을 결과하고 말았다.
최악의 한반도 정세를 맞고 있는 이명박 정부는 급기야 남이 나서서 한반도 평화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지난 해 연평도 포격 이후 남과 북이 군사적 대응을 맞교환하면서 한반도는 일촉즉발의 전쟁위기로 치달았고 미중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양측의 냉정한 자제를 요구했다.
이명박 정부의 사격 재강행 당시 유엔 안보리가 우려를 표명하고 주한 미국대사와 주한미군 사령관이 청와대를 전격 방문한 사실은 잘 알려진 일이다. 전쟁이 발발할지도 모른다는 현실적 우려를 갖게 된 미중은 결국 2011년 1월 정상회담을 통해 한반도의 긴장완화와 남북관계 개선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그러나 미중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남북관계는 개선되지 않았고 이제 한반도 평화는 우리가 아닌 외부의 걱정거리가 되었고 우리의 노력이 아닌 남의 노력이 강조되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김정일 위원장이 중국을 방문한 직후 중국의 국방부장은 '북한에 모험을 하지 말라고 중국이 촉구하고 있다'면서 한반도 평화를 위한 중국의 대북 노력을 강조하기도 했다.
지난 해 천안함 사태 이후 한국군의 비무장지대 화력 증강과 관련해 샤프 주한미군 사령관이 과도한 조치라는 우려를 전달했다는 사실이 알려지기도 했다. 남북관계가 파탄나고 최악의 대결상황으로 일관하면서 어느새 우리의 평화마저 남들이 우려하고 걱정하는 참담한 지경에 이르고 만 것이다.
6.15 11주년을 맞는 한반도 정세의 초라한 성적표는 사실 남북관계 단절에서 비롯된 것이다. 남북관계 유지는 한반도 정세의 긴장 고조를 막아내는 안전판이었고 한반도 정세의 개선을 촉진해내는 촉매제였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 이후 가능하지도 않은 대북 강경정책을 고집함으로써 남북관계는 완전히 망실되었고 그 결과 한반도 평화에 대한 우리의 개입력과 주도권을 외부에 넘겨주고 말았다. 결국 남북관계 중단이 한반도 평화를 위협하는 핵심 토대인 바, 지금 시기 남북관계를 풀지 못하는 최대의 장애는 바로 '천안함 사과' 문제이다.
이명박 정부는 일관되게 천안함 사과 문제를 남북대화의 전제조건으로 고집하고 있고 북한은 천안함 사과를 할 의지도 이유도 없다는 분명한 입장이다. 금년 초 북이 제의한 무조건적이고 전면적인 남북대화 요구에도 이명박 정부는 천안함 사과를 대화 시작의 전제조건으로 내걸었고 결국 어렵게 만난 군사실무회담마저 이 문제에 걸려 결렬되고 말았다.
뒤이어 조성된 남북 비핵화 회담 역시 이명박 정부는 시종일관 천안함 사과 문제를 대화의 전제조건으로 고수했고 김정일 위원장을 서울로 초청한다는 그럴듯한 베를린 제의마저도 이명박 대통령은 북한의 천안함 사과를 확고하게 전제조건으로 강조했다. 따라서 이명박 정부에게 남북관계 개선의 최대 관건은 천안함 사과문제에 맞춰져 있고 국면을 전환하기 위한 모든 노력도 이 문제 해결 없이는 불가능한 상황이 되고 말았다.
급기야 이명박 정부의 천안함 사과 고집은 자신의 발목을 잡는 자승자박의 '덫'이 되고 말았다. 자기가 고집해서 자신이 만들어 놓은 천안함 사과 문제 때문에 이제는 자기 스스로가 옴짝달싹 못하는 덫이 되어 버린 것이다.
워낙 일관되게 너무도 확고하게 천안함 사과 문제를 강조해놓았고 반대로 북한은 너무도 강력하게 불가 입장을 고수하고 있기 때문에 이명박 정부는 국면을 전환하거나 돌파하려 해도 자신이 설치해놓은 천안함이라는 덫에 걸려 한발짝도 움직일 수 없는 딜레마에 빠려 버린 것이다.
천안함 사과라는 스스로의 덫에 이명박 정부가 걸려 있음은 최근 드러난 베이징에서의 남북 비공개 접촉을 통해 단적으로 입증되었다. 남북 군사회담이든 남북 비핵화 회담이든 어떤 경우에도 천안함 문제를 우회할 수 없는 자승자박의 이명박 정부로서는 급기야 북으로부터 이 문제에 대한 최소한의 성의표시라도 얻어내기 위해 비공개 접촉을 시도했고 이 자리에서 북이 사과가 아닌 유감이라도 표시해주길 원했다는 게 북한의 주장이다.
자기 스스로 천안함의 덫에 걸린 이명박 정부는 결국 정상회담 카드까지 꺼내며 북한의 입장 변화를 촉구했고 심지어 돈봉투까지 들이대며 덫에서 벗어나길 원했다는 게 북의 주장이다.
아무런 신뢰도 존재하지 않는 최악의 남북관계에서 갑자기 밑도 끝도 없이 정상회담을 제안한다고 덜컥 성사되는 게 아님은 지난 남북관계의 역사를 조금이라도 들여다 본 사람이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포탄이 오고가는 대결 상황에서 북이 굶어 죽더라도 가축의 사료로 줄지언정 식량을 줄 수 없다는 이명박 정부가 비밀접촉 한번으로 북을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난센스고 대망신이다.
베이징 접촉에서 보인 이명박 정부의 행태는 역설적으로 그만큼 절박하게 천안함 사과라는 덫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이기도 하다. 이명박 정부가 천안함의 덫에서 나오길 원한다면 해결은 간단하다. 스스로 놓은 덫을 스스로 거둬들이면 되는 것이다.
남북관계 개선과 한반도 평화라는 더 큰 목표를 위해 조용히 천안함 사과라는 자신의 전제조건을 철회하고 조건없는 대화를 시작하면 된다. 말도 안되는 회유와 공작이 아니라 솔직하고 담백하게 천안함 사과의 덫을 스스로 치우고 진정성 있는 남북대화를 시작함으로써 상호 신뢰를 만들어간다면 오히려 남북관계의 진전을 통해 천안함 사과 문제가 풀릴 수 있는 틈새가 열릴 지도 모른다. 쉬운 길을 두고 어려운 길을 굳이 돌아가지 않길 바란다.
* 이 글은 17일 한국미래발전연구원 '주간논평'에 실린 것입니다. 원제는 "천안함의 '덫'에 걸린 이명박 정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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