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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책공대-시라큐스대 쌍둥이 연구소 만드는 그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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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책공대-시라큐스대 쌍둥이 연구소 만드는 그날까지"

[인터뷰] 한종우 교수 "IT 교류 다시 시작합니다"

"프랑스와 영국은 800년 간 싸우고 나서야 친구가 됐고, 독일과는 세계 대전을 거친 뒤에야 유럽연합을 만들었다. 미국과 북한은 1994년부터 지금까지 20년도 못 된 세월을 접촉했다. 정치 체제와 이데올로기가 전혀 다른 성인이 만나 핵무기라는 가장 첨예한 문제로 싸웠다. 사이가 금세 좋아질 거라는 생각은 환상이다. 비정치적인 교류가 두터워져야 한다."

이명박 정부와 오바마 행정부 들어 남북·북미관계가 사실상 단절되다 보니 과거 오랫동안 해왔던 교류 사업이 잊혀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런 일도 있었나? 신기한 마음에 그 의미를 되새겨보는 보는 사례가 많다.

미국 뉴욕주에 있는 시라큐스대학과 평양에 있는 김책공업종합대학의 정보기술(IT) 교류 프로그램이 그런 경우다. 2002년부터 2007년까지 6년간 계속되다 보니 2005년쯤부터는 별 기삿거리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2008년 이후 3년간 중단됐던 까닭에, 그 일을 다시 시작하려는 노력은 다시 곱씹어 봐야 할 가치를 갖게 됐다. 한반도의 군사적 위기가 최고조에 이른 지금의 상황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27일 만난 시라큐스대학의 한종우 교수(정치학)는 두 대학의 IT 교류에 관한 사실상 모든 일을 도맡아 온 인물이다. 처음 아이디어를 내는 데에서부터 돈과 사람을 끌어 모으고 실제 사업을 실행하는 데까지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일은 거의 없다. 방학을 맞아 서울에 와서도 내년 3월 사업 재개를 위해 백방으로 뛰고 있는 그는 이제는 평화롭게 살게 된 유럽의 사례를 들며 북·미 두 나라 사이에도 '시간'과 '신뢰'가 필요함을 역설했다.

▲ 한종우 미국 시라큐스대학 교수 ⓒ프레시안(김하영)

교류 사업의 정식 명칭은 '소장 학자 리더십 개발'(JFLD) 프로그램. 김책공대에서 선발된 연구사(석사급 이상)들과 IT 상호 연구를 하면서 두 학교 공동의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일을 했다. 컴퓨터, 서버 등 하드웨어는 미 정부에 의해 전략물자로 지정되어 북한 반입이 불가능한 까닭에 소프트웨어 개발을 중심으로 한 연구와 교육이 주를 이뤘다. 머릿속에 넣어가기만 하는 것이다. 그런 제약 속에서도 2005년 김책공대에 디지털 도서관이 만들어진 것은 하나의 결실이었다.

JFLD 프로그램은 2002~04년간 시러큐스대학에서, 2005~07년은 중국 베이징에서 진행됐다. 한 번 할 때마다 평균 12명의 북측 사람들이 1개월가량 공동 연구를 한 후 평양으로 돌아갔고, 평양에 가서 후속 작업을 계속했다. 사업의 규모가 그리 크진 않지만 이래저래 적잖은 돈이 들었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을 만드는 헨리 루스 재단에서 총 50만 달러를 지원하는 등 기금은 주로 미국의 민간 기관·개인이 냈다. 통일부 남북협력기금에서도 총 30만 달러 정도가 지원됐고, 한국의 민간 기관·개인들도 힘을 보탰다. 미국의 코리아소사이어티, 한국의 포항공대와 아름다운재단 등도 빼놓을 수 없는 후원자였다.

프로그램이 진행됐던 6년은 부시 행정부 시절이었고, 2차 북핵 위기가 발발했던 때다. 2006년에는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 발사와 1차 핵실험도 있었다. 그런데도 미국 정부는 이 사업을 계속하도록 내버려 뒀다. 냉전 시절 소련, 중국, 베트남과 학술 교류를 했던 시라큐스대학의 전통이 있었고, 학술 교류는 누구와도 권장한다는 미 정부의 원칙이 확고했기 때문이다. 교류를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국무부가 북한 사람들에게 비자 발급을 하지 않는 것인데, 거부된 사례는 단 한 건도 없었다.

2008년부터 교류 사업이 중단된 것은 오마바 정부가 자국의 경제위기와 두 개의 전쟁을 치르느라 여념이 없었고, 현 한국 정부가 기존의 교류·협력 사업을 중단시켰기 때문이었다. 통일부의 남북협력기금 지원은 없는 일이 돼버렸다.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뜻 있는 국내·외 민간 재단을 찾아다니지만, 그들 역시 양국 정부의 눈치를 보는 터라 쉽지 않다고 한종우 교수는 털어놨다.

"2006년 교육을 앞두고 북한의 미사일 발사가 있었지만 미국·북한 정부 모두 이 사업을 허가했다. 통일부도 '미국이 하겠다는데 우리가 못할 게 없다'며 기금을 지원했다. 학술적 교류는 정치 상황과 무관하게 밀고 나가야 한다는 걸 현 정부도 알아야 한다."

▲ ⓒ프레시안(김하영)

교류 사업이 진행되던 6년 동안에도 갈등과 고비는 있었다. 북한 사람들이 통일부의 지원 사실을 알고 나서 거칠게 항의했던 일은 진땀나는 경험이었다고 한 교수는 회고했다. 그러나 그는 '알 건 알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단호하게 대처했고, 그들도 결국 현실을 받아들였다. 그의 설득으로 교육은 끝까지 진행됐다.

엘리트 의식과 경쟁심이 강한 김책공대 학자들을 상대하는 것 또한 처음에는 만만치 않았다. 게다가 '왜 우리가 북한 사람들의 눈치를 봐야 하는데?'라며 물러서지 않는 미국 사람들의 자존심까지 더해지면, 교육 현장에는 종종 연평도 같은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 때 필요한 것이 '코리언 마인드'였다. 한 교수는 "한국 사람으로서 북한과 미국의 문화적·정서적 차이를 이해하는 나 같은 사람이 끼어 있지 않으면 양쪽이 부딪힐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2005년 9.19 공동성명이라는 금자탑을 만들어 냈던 당시 6자회담 협상장에 있었던 한국 측 대표들도 한 교수와 똑같은 말을 한다.

한 교수 개인적인 불이익도 없지 않았다. 미국 영주권이 신청 7년이 지나서야 나온 것이 대표적이다. 한국 공군 장교 출신으로 미국에서 석·박사를 받고 같은 학교에서 교수를 하고 있는 그였지만, 북한과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이유로 미 정부 기관의 '관찰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었다. 한편, 북한 학자들과 수없이 만나 사업을 같이 했지만 정작 평양에는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미국에 사는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북한 비자 발급에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북한과 미국 사이의 다리를 놓는 일을 하면서 양쪽에서 의심과 경계를 받은 셈이다.

그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 일을 그만둘 생각은 없다. 북한 대학생 9명에게 컴퓨터 프로그래밍 교육을 시켜 세계 대학생 프로그래밍 대회 베이징 예선을 통과했던 때 느꼈던 보람, 시러큐스대에서 공부하는 동포들을 위해 한성렬 유엔 주재 북한 차석대사가 냉면을 공수해 왔던 추억을 생각하면 그만둘 수 없다고 말했다. 학위 과정까지 만들어 김책공대 연구사들이 시라큐스대에 와서 석사·박사를 받고 돌아갈 수 있게 하고, 두 학교에 쌍둥이 연구소를 만들어 교류 사업의 비용은 낮추고 효율은 높이는 체계를 구축하는 것까지. 그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뛸 뿐이다. 부인 이경희 씨는 유창한 중국어 실력과 북한 프로젝트에 대한 열정으로 그 꿈을 이루는데 든든한 우군이 되어주고 있다.

"미국 다츠머스대학은 1960년대부터 소련 지식인들을 불러 30년간 민간 차원의 교류를 했다. 같이 먹고, 자고, 노래 부르고, 술 먹고, 싸우고, 화해하는 과정에서 상호 이해가 높아졌다. 다츠머스 컨퍼런스는 탈냉전 후 미·소가 급속한 관계 개선을 가능케 하는 하나의 자양분이 됐다. 김책공대와 시라큐스대학의 IT 교류의 모델이다. 우리의 목표는 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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