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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민주적인' 나라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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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민주적인' 나라는 없다"

[월러스틴의 '논평'] 민주주의에 관한 小考

"민주주의 - 어디에나 있는? 어느 곳에도 없는?"

민주주의라는 단어가 요즘 아주 유행이다. 오늘날의 세계에서 자기네 정부가 민주 정부를 표방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나라는 사실상 없다. 그러나 동시에 오늘날의 세계에는 어떤 문제에 대해 정부가 민주적이지 않다는 비난이 국내·외적으로 나오지 않는 나라 또한 사실상 없다.

한 나라가 민주적이라 함은 무엇을 뜻하는지, 그에 대한 합의는 거의 없는 것 같다. 그것은 분명 민주주의라는 말의 어원 때문일 것이다. 민주주의는 민중(people)을 뜻하는 '데모스'(demos)와 지배 혹은 결정권을 뜻하는 '크라티아'(kratia)라는 그리스어의 합성어다. 그런데 지배란 무엇인가? 민중은 또 무엇인가?

프랑스의 역사학자 루시엥 페브르는 언제나 단어의 역사를 살펴봐야 한다고 말했다. 민주주의는 언제나 그렇게 보편적인 인기를 가진 말이 아니었다. 그 단어는 19세기 전반, 특히 서유럽에서 처음으로 근대 정치적인 용례를 갖기 시작했다. 당시 민주주의는 오늘날 테러리즘(terrorism)과 비슷한 느낌을 가진 말이었다.

'민중'들이 실제로 '지배'할 수 있다는 생각은 무책임한 급진주의자에 의한 지배를 떠오르게 하면서 당시 상당한 지위를 가진 모든 사람들에게 정치적인 악몽으로 여겨졌다. 실제로 그들은 어떻게 하면 결정권이 민중 다수의 손아귀에 들어가지 않도록 할 수 있을까를 최우선적인 목표로 삼았다. 결정권은 세계를 있는 그대로 혹은 그들이 만들고자 하는 세계로 유지시키는데 관심을 가진 극소수의 사람들에게 남겨져야 했다. 그들은 부와 지식(wisdom)을 가졌고, 의사 결정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여겨졌다.

1848년 사회적·민족적 혁명이 일어나 '민중'들이 부상하자, 부와 능력을 가진 이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처음에는 압제로 대응하다가 나중에는 어느 정도 계산된 양보를 하게 됐는데, 천천히 그리고 조금씩 투표권을 주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투표가 '민중'의 요구를 만족시켜줄 것이며 민중들의 요구를 흡수함으로써 당대의 체제를 유지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후 150년 동안 그같은 양보(와 그 밖의 조치들)는 상당히 잘 작동했다. 급진주의는 다스려졌다. 그리고 1945년 이후에는 민주주의라는 바로 그 말이 체제 안으로 들어왔다. 모든 이들이 민주주의를 지지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바로 거기에 있다.

▲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은 재임 중 중동과 중국의 민주주의를 역설했다. 그러나 정작 미국 민주주의의 후퇴가 가장 크게 우려됐던 시절은 부시 행정부 때였다. ⓒ로이터=뉴시스

그러나 문제는 모든 이들이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에서 산다고 확신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모든 민중들이 지배하고 있고 의사 결정을 하고 있는 그런 민주주의 말이다.

정치적 대표자들은 다수 민중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선출되기만 하면 끝이다. 그들은 존중되어야 할(important) 소수파들을 억압하기도 한다. '민중'들은 시위와 파업, 폭력적인 봉기 등을 통해 반발한다. 민중들의 그러한 의사 표시가 무시될 경우 그것을 '민주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반대로 정부가 '민중'의 의지에 밀려 복종하기만 한다고 해서 그것을 '민주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리고 민중이란 대체 어떤 사람들인가? 수적인 다수파인가? 아니면 거대 집단만이 권한을 보장받을 수 있나? 중요한 집단은 상대적인 자치권을 가져야 하나? '다수파'와 존중되어야 할 '소수파' 사이에서 '민주적인'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서는 어떤 절충을 해야 하는가?

끝으로, 민주주의라는 말이 지정학적 이익을 추구하는 도구로 사용된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된다. 한 나라가 다른 나라에 대해 민주적이지 않다고 비난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약한 나라에 대한 개입을 정당화하는데 쓰인다. 그렇게 개입한다고 해서 과거 보다 민주적인 정부가 들어서는 것도 아니다. 기껏해야 과거와 다른(개입한 강대국에 유리한) 대외 정책을 펴는 정부로 바뀌는데 그치는 경우가 많다.

아마도 민주주의라는 것은 아직 어느 곳에서도 실현되지 않은 희망사항(claim and aspiration)이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어떤 나라가 민주주의가 아니라면 그것은) 다른 나라들에 비해 민주적이지 않은 것처럼 보일 뿐이다. 그러나 대체 어떤 나라가 다른 나라에 비해 더 민주적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 <월러스틴의 '논평'>은 세계체제론의 석학 이매뉴얼 월러스틴 예일대 석좌교수가 매달 1일과 15일 발표하는 국제문제 칼럼을 전문 번역한 것입니다. <프레시안>은 세계적인 학자들의 글을 배급하는 <에이전스글로벌>과 협약을 맺고 월러스틴 교수의 칼럼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9월 15일 논평 원문보기)

* 저작권 관련 알림: 이 글의 저작권은 이매뉴얼 월러스틴에게 있으며, 배포권은 <에이전스 글로벌>에 있습니다. 번역과 비영리사이트 게재 등에 필요한 권리와 승인을 받으려면 rights@agenceglobal.com으로 연락하십시오. 승인을 받으면 다운로드하거나 전자 문서로 전달하거나 이메일로 보낼 수 있습니다. 단 글을 수정해서는 안 되며 저작권 표시를 해야 합니다. 저자의 연락처는immanuel.wallerstein@yale.edu입니다. 월러스틴은 매월 2회 발행되는 논평을 통해 당대의 국제 문제를 단기적인 시각이 아닌 장기적인 관점에서 조망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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