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양국의 지식인들이 대규모로 기자회견을 열어 이같은 성명을 발표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특히 한국병합 조약이 법적으로 무효라는 점을 분명히 한 성명에 일본의 지식인들이 동의했다는 사실은 식민 지배 문제에 관한 양국 정부의 향후 행보에 중요한 근거가 될 전망이다.
▲ 10일 오전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한국 측 109명과 일본 측 105명의 지식인이 서명한 '한일 지식인 공동선언' 발표식에서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가 선언문을 낭독하고 있다. ⓒ연합뉴스 |
"한일 국교정상화 조약에 관한 한국 정부 해석이 맞다"
한국 측 서명자들은 10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성명은 "한국병합은 대한제국의 황제로부터 민중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의 격렬한 항의를 군대의 힘으로 짓누르고 실현시킨, 문자 그대로 제국주의 행위이며 불의부정(不義不正)한 행위"라고 선언했다.
공동성명은 또 "(1910년 8월 22일 체결된 병합) 조약의 전문(前文)도 거짓이고 본문도 거짓이다. 조약 체결의 절차와 형식에도 중대한 결점과 결함이 보이고 있다. 한국병합에 이른 과정이 불의부당 하듯이 한국병합조약도 불의부당 하다"고 규정했다.
성명은 아울러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당시 체결됐던 '기본에 관한 조약' 2조에 대한 논란에 대해 한국 정부의 해석이 맞다는 점을 명시했다. '기본에 관한 조약' 2조에는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은 이미 원천 무효(already null and void)"라고 되어 있다.
공동성명은 "일본 정부는 병합조약 등은 '대등한 입장에서 또 자유의지로 맺어졌다'는 것으로 체결시부터 효력을 발생하여 유효했지만, 1948년의 대한민군 성립으로 무효가 됐다고 해석했다"며 "(그러나) 한국 정부는 '과거 일본의 침략주의의 소산'이었던 불의부당한 조약은 당초부터 불법 무효라고 해석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성명은 "병합의 역사에 관해 지금까지 밝혀진 사실과 왜곡 없는 인식에 입각해 뒤돌아보면 이미 일본 측의 해석을 유지할 수 없게 됐다"며 "병합 조약 등은 원래 불의부당한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당초부터 null and void였다고 하는 한국 측의 해석이 공통된 견해로 받아들여져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성명은 또 1995년 무라야마(村山) 일본 총리의 담화, 1998년 한일공동선언, 2002년 조일(朝日)평양선언 등에 나타난 일본의 식민지 지배 인식을 거론하며 "여기서 마련된 토대가 그 후에 여러 가지 시련과 검증을 거치면서 지금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 병합과 병합조약에 대해 판단을 내리고 '기본조약' 2조의 해석을 수정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고 강조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성명은 "아직도 해결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는 상태다. 한국정부가 조처를 취하기 시작한 강제동원 노동자, 군인·군속에 대한 위로와 의료지원 조처에 일본 정부와 기업, 국민은 적극적인 노력으로 대응하기 바란다"고 호소했다.
성명은 "화해를 위해 필요한 과정이 한층 더 자각적으로 진행되어야 할 것"이라면서 "죄는 용서를 빌지 않으면 안 되고 용서는 베풀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아울러 "한반도 북쪽에 있는 또 하나의 나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일본의 국교정상화도 이 병합 100년이라는 해에 진전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일본에선 '진보적 지식인'만 참여 한계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한국사)는 기자회견에서 "일본의 이른바 양심적 지식인들도 한일병합 무효론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책임은 있지만 법적 책임은 없다는 소위 '유효 부당론'을 주장했었다"며 "그 분들이 이번 성명을 통해 무효라는 한국의 견해를 인정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성명을 주도한 김영호 유한대 총장(전 산업자원부 장관)은 "한일 기본조약에 대한 한국의 해석을 소개하는 부분에서 '불법'이라는 표현을 넣었고, '사실상 불법'이라는 점을 강조할 수 있는 다른 내용도 넣었다"며 "한일 학자들이 그만큼 노력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 총장은 공동성명의 취지에 대해 "내셔널리즘만이 아니고 국제주의의 입장에서 한일이 진정으로 평화로운 이웃이 되자, 역사적으로 화해를 이루자는 열림 마음 또한 내셔널리즘 이상으로 있었다"고 말했다.
서울 기자회견에 참석한 미야지마 히로시(宮島博史) 도쿄대 교수는 "많은 일본 학자가 아직 '한일병합'이 불법이라는 인식까지는 갖지 못한 것이 사실"이라면서도 "이번 성명을 기초로 올해가 사회적인 인식의 전환점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것이 이번에 서명한 (일본인 학자) 분들의 공통적인 인식일 것"이라고 전했다.
한국 측 서명자들은 김영호 총장을 비롯해 백낙청·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 시인 고은·김지하, 박원순 변호사 등 학계와 문화계 인사 등이 포함되어 있다. 김영호 총장은 "보수와 혁신, 진보와 보수를 따지지 말고 전부 참여하자고 해서 각방면 대표 지식인들이 포함됐다"고 소개했다.
그러나 일본 측 서명자들과 관련해 이태진 교수는 "진보적 지식인이 중심이 되었다"며 "보수적인 지식인이나 알반 시민들에게 이런 인식을 확산시켜야 하지만 아직까지는 어렵다"고 말했다.
일본 측 서명자들은 이날 오후 도쿄 일본교육문화회관에서 같은 성명을 발표했다. 두 나라 지식인은 이번 성명을 계기로 양국 정부의 공동성명이나 일본 총리의 담화 발표 등을 촉구했다.
양측의 공동성명 작업은 작년 12월 시작돼 약 5개월간 토론과 논의 과정을 거쳤으며, 양측의 안을 두고 5차례 절충 끝에 합의안이 나왔다. 그 과정에서 용어 하나하나를 둘러싸고 격론이 벌어졌고, 당초 참여하려던 일부 지식인들은 막판에 서명을 철회하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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