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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날? 나같이 힘없는 여자 위한 날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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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여성의 날? 나같이 힘없는 여자 위한 날이겠지"

[현장] 60대 청소 노동자 합창단 '한마음' 두 번째 공연

서울 낮 기온이 23.8도를 기록해 완연한 봄 날씨를 즐길 수 있었던 지난 8일 오후 4시, 고령의 여성 노동자 1000여 명이 서울 종로 보신각 앞에 하나둘 모여들었다. 이날은 민주노총 여성연맹이 '3.8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주최한 '청소 용역 그만! 정규직화 쟁취'란 제목의 결의 대회가 열리는 날. 전국 각지에서 모인 청소 용역 노동자들은 '인간답게 살고 싶다', '비정규직 철폐' 등이 적힌 노란색 또는 빨간색 조끼를 입고 있었다.

앞서 결의 대회가 시작하기 두 시간 전인 오후 2시, 홍익대학교에서 청소 일을 하는 노문희(63) 씨는 일찌감치 집회 장소에 도착했다. 노 씨는 이날 주최 측의 초청을 받아 무대에서 노래 공연을 한다. 집회 시작에 앞서 리허설을 하기 위해 일찍 도착했다는 노 씨. 악보를 모아놓은 노란색 서류철을 펼친다.

지난해 10월, 노문희 씨를 비롯한 홍익대학교와 세종로 대우빌딩 청소 용역 노동자들은 '한마음'이라는 이름의 작은 합창단을 만들었다. 하루 열 시간에 가까운 청소 노동으로 온몸이 녹초가 될 법도 하지만, 연습에 빠지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지난해 12월 민주노총이 주최한 제3회 서울여성조합원 대회에서 첫 공연을 성황리에 한 후, 합창단에 가입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힌 청소 노동자들이 늘었다고 했다. 처음 7명으로 시작했던 합창단은 지금은 알토 6명, 소프라노 5명으로 규모가 커졌다. (관련 기사 보기 : 60대 청소 노동자들이 부른 감동의 크리스마스 캐럴)

ⓒ프레시안(최하얀)

노 씨가 펼친 노란색 서류철에는 그간 연습해온 노래 악보들이 정성스레 꽂혀 있었다. 형광펜으로 자주 틀리는 부분과 꼭 기억해야 할 부분 등을 동그라미, 별표로 표시해놓은 것이 눈에 띈다. "나는 여기를 자꾸 틀려…. 이게 그 '도돌이표'인데, 그러니까 그 뭐냐, 앞으로 돌아가라는 건데 나는 이걸 자꾸 까먹거든"이라며 노 씨가 웃는다.

이들은 이날 <얼굴 찌푸리지 말아요>와 <뭉게구름>을 노래하기로 했다. 한 달여 전쯤 합창단에 막내로 들어온 김지순(이화여대·가명) 씨는 공연 두 시간을 앞두고 마음이 급해졌다. "뭉게구름 이거, 어떻게 시작하는 거지? 갑자기 생각이 안 나"라며 김 씨는 동료 단원들에게 노래를 불러보라고 했다. 그런데 모두 김 씨를 외면하며 딴짓을 한다. 아무래도 공연 두 시간을 앞두고 다들 노래 도입부를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허둥지둥하는 사이, 합창단의 지휘를 맡고 있는 이윤아 씨가 도착했다. 국립오페라합창단 노동조합 조합원인 이 씨는 그 자신도 합창단원이다. 그러다 소속돼 있던 국립오페라합창단이 지난 2009년 '경영 효율화'란 이유로 갑자기 해체되며 한순간에 일자리를 잃었다. 지금은 '국립오페라합창단 해체 철회'를 요구하며, 5년째 투쟁을 이어오고 있다.

이 씨와 단원들은 리허설을 위해 무대로 올랐다. "자, 여기가 우리 집 안방이라고 생각하세요. 그리고 지금부터 상상하세요. 나는 로또를 맞아 2억이 생겼다. 기분이 어때요? 날아갈 거 같지요? 이제 2억이 생긴 표정을 지어 봅시다"라고 이윤아 씨가 말했다.

긴장을 애써 숨기고 있던 단원들은 '로또 2억'이란 말에 한바탕 '까르르' 웃었다. "에이 로또 당첨인데 2억은 너무 적어요"라고 기자가 말하자, 노 씨는 "난 2억도 좋은데? 2억 있으면 할 거 많아~"라며 함박웃음을 짓는다.

ⓒ프레시안(최하얀)

여성의 날 참뜻 되새기게 하는 '멋쟁이' 60대 청소 노동자들

인사하기, 악보 펼치기, 퇴장하기 등을 순서대로 연습한 단원들은, 무대에서 내려와 집회 장소 한 귀퉁이에 자리를 잡고 공연 순서를 기다렸다. 그 사이 결의 대회 참가자는 계속 불어나 보신각 앞을 가득 채웠다. 청소 용역 노동자들은 가지고 온 양은 냄비를 두 개씩 꺼내 들고, 무대에 오른 사람들의 발언이 끝나거나 공연이 끝날 때마다 냄비 바닥 두 개를 맞부딪쳐 경쾌한 소음을 냈다. "어머 저거, 라면 냄비야?"라며 휴대전화를 꺼내 사진을 찍는 행인들 뒤로, 형광 노란색 옷에 방패를 하나씩 든 경찰 무리가 어색한 풍경을 만들었다.

공연 30분 전. 한마음 단원들은 무대 뒤에 모여 겉옷을 벗고 가방에서 스카프를 꺼내 서로 목에 둘러줬다. 흰 남방에 꽃무늬 스카프가 이날 한마음 단원들의 공연 복장. 봄날에 어울리는 스카프들을 목에 두르자, 단원들의 얼굴이 한껏 돋보인다. 홍익대 청소 노동자 서영순(가명·62) 씨가 거울을 꺼내 들고 빨간색 립스틱을 입술에 발랐다. "어때 나, 야해?"라며 서 씨가 화장 상태를 꼼꼼히 확인하자, 옆에 있던 다른 단원이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 안 돼"라며 면박을 줬다.

ⓒ프레시안(최하얀)

공연은 발랄했고, 행복했다. 마이크 앞에 바투 선 서 씨의 새빨간 입술에선, 키보드 반주와 함께 잊고 있었던 노래 도입부가 자연스레 흘러나왔다.

노래 군데군데 귀여운(?) '삑사리'가 났고, 악보에는 없는 창의적인 화음이 스피커를 통해 뻗어 나갔다. 공연을 지켜보던 결의 대회 참가자들은 양은 냄비를 신나게 부딪쳤다. 지난해 12월 있었던 첫 번째 공연에서보다 훨씬 자연스러워진 율동. 노래 두 곡을 부르는 약 6분여 동안, 한마음 단원들은 자타 공인 '스타'였다.

지휘자 이윤아 씨는 "일주일에 한 번 있는 노래 연습 시간이 이들 청소 노동자에게 더할 나위 없는 삶의 '활력'이 됐다는 게 느껴진다"며 "노래를 배우고 무대에 서면서 자신감이 생기니, 그림이나 영어 등을 배우고 싶다고 말하는 단원도 있다"고 말했다. 살아온 날보다 앞으로 살날이 적은,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청소 일을 하는 고령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도 새로운 '배움'에 대한 의지가 있다는 걸 새삼 일깨워주는 설명이다.

공연이 끝나고 한마음 단원들에게 '세계 여성의 날'을 아느냐고 물었다. 서 씨는 "잘 모르는데"라며 "그런데 나 같은 힘없는 여자들을 위한 날이겠지"라고 말했다. '3.8 여성의 날'은 105년 전 열악한 일터에서 화재로 숨진 여성 노동자들을 기리기 위해 미국에서 탄생한 날이다. 그런데 이 같은 여성의 날 기원을 이들 청소 노동자가 모르는 것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누구보다 '여성의 날'의 의미를 잘 알고 있을 이들이기 때문이다.

▲ 청소 노동자 합창단 '한마음'. 지휘를 맡은 국립오페라합창단 노조 이윤아 조합원을 단원들이 둘러싸고 있다. ⓒ프레시안(최하얀)

청소 노동자들, 집단 교섭 투쟁…모르쇠로 일관하는 '원청' 대학

최근 이들 청소 노동자가 속한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서울경인지부는 7개 대학과 1개 병원(고려대 병원, 고려대, 경희대, 이화여대, 연세대, 인덕대, 한국예술종합학교, 홍익대)에서 집단 교섭 투쟁에 돌입했다. 집단 교섭이란 이들 청소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는 11개 용역업체와 노조가 한꺼번에 임금 등 근로 조건에 대한 협의를 진행하는 것을 말한다. 제각각인 청소 노동자들의 노동 조건을 상향 평준화하려는 시도다.

2013년도 집단 교섭에서 서울경인지부는 시급 1000원 인상을 요구하고 있다. 지난해 이들 청소노동자 시급은 5100원이었다. 한편 용역업체들은 평균 시급 200원 인상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노조 측은 물가 상승률 등을 고려하면 시급 200원 인상은 실제로는 임금 삭감안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노조 측 권태훈 조직부장은 "현재 일부 용역업체들은 원청인 대학과 맺은 도급계약에서 1인당 인건비 단가가 낮게 책정된 탓에, 노조 요구만큼 시급을 올릴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며 "이처럼 대학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근로 조건은 원청인 대학에 의해 결정된다"고 설명했다. 각 대학이 '청소 노동자들은 용역업체에 고용돼 있으므로, 대학이 사용자가 아니다'란 태도를 고수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원청(대학)의 사용자성을 부정할 수 없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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