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이 나라는 뭐 하자는 나라이며 우리는 뭐 하자는 사람들일까? 언제 어디서나 나오기 마련인 이 질문에 2010년의 대한민국은 상당히 독창적인 대답을 내놓을 수 있을 것 같다. 여행도 기점이 있어야 움직임이 가능한 것인데, 정체성의 기준이 없이 수많은 사건 사고에 시달리는 사회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사회적 갈등 축을 굳이 난폭하게 정리하자면 '나랏님 하는 말씀 그냥 따라라'와 '믿고 따를 구석이 한 군데도 없다'의 연속인데, 어딜 향해 무엇을 위해 누가 가는지를 도통 모르겠다. 그러니 무슨 말을 갖다 붙여도 말인지 당나귀인지 그냥 대충 넘어가지는 세상이 됐다. 현문우답의 사회. 정체성과 가치라는 핵심이 빠져서 생긴 비극이자 희극이다. 그리고 그런 2010년 초, 매체 별로 이러한 대한민국을 반영하는 작품들이 흥미로운 삼각형을 그리며 등장했다. 드라마의 <추노>, 영화의 <경계 도시 2>, 연극의 <B언소>다.
<추노>가 노비라는 은유로 권력과 민중의 속성을 탐구했다면 <경계 도시2>는 논픽션이라는 거울로 우리 사회가 가졌던 희망의 창문을 우리 손으로 닫았던 과거를 꼼짝 못하고 확인하도록 만든다. <경계 도시 2>에서 우리가 가졌던 희망은 이 나라가 진영 논리 이외에 스스로를 객관화하는 비평적 관점을 수용할 수 있는가였다. 그러나 이 사회는 끝내 송두율 교수를 진영 논리의 수렁으로 잡아끌면서 스스로의 발전 가능성을 닫았다. 그 결과, 노비와 노비 사냥꾼, 그리고 음험한 권력이 갈 곳 모르고 싸우는 <추노>의 세상이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절망하여 울어야 할까? 아니, 웃을 수 있다. 웃어도 된다. 연극 <B언소>는 '세상은 변소'라는 은유를 통해 똑바로 보고 실컷 웃으라고 말한다.
▲ 우리는 절망하여 울어야 할까? 아니, 웃을 수 있다. 웃어도 된다. 연극 <B언소>는 '세상은 변소'라는 은유를 통해 똑바로 보고 실컷 웃으라고 말한다. ⓒ극단차이무 |
<B언소>는 공중 변소를 배경으로 하는 코미디다. 배우들은 일인 다역을 하며 매 장면마다 다른 인물과 다른 관계를 연기하며 우리 사회를 풍자한다. 단순한 정치 풍자조차 TV에서 자취를 감춘 이 시점에서 <B언소>는 우리 사회가 '지나가던 소도 웃을 일'이 얼마나 많았는지를 새삼 깨닫게 한다. 그저 빨리 용변을 보면 그만일 뿐인 두 사람이 '왼쪽' 화장실에 줄 섰느냐 '오른쪽' 화장실에 줄 섰느냐를 두고 다툼을 벌이는 모습부터 느닷없이 화장실 사용객의 옷을 벗겨 패기 시작하는 아가씨, 일본에서 온 갑부 '욕심 없는 사람'이 늘어놓는 자랑을 듣다보면 세상 곳곳에 숨어 있는 위선과 폭력, 허세를 깨닫게 된다.
극에서 가장 걸출한 캐릭터는 '화장실에서 기거하는 사람'이다. 화장실 한 칸에 고장 팻말을 걸어놓고 그 안에서 씻고 자고 TV도 보다가 가끔 쓰레기도 버리러 나가는 이 인물은 틈틈이 전화한다. '거기 뭐든지 물어보세요죠? 뭐 하나만 물어볼게요.' 그리고 그 상식적인 질문엔 대답이 없다. '예전에는 늘 대통령을 흉내 내는 개그맨이 있었잖아요. 요새는 왜 없는 거죠? 흉내 내봐야 돈이 안 되기 때문인가요?' '독도는 우리 땅이라면서요. 그런데 왜 군인이 없고 경찰이 지키나요?' 그는 질문을 던지다 화장실에서 기거하고 있음을 들키고, 쫓기고, 비웃음 사고, 매 맞는다. 이 인물은 연극인들의 페르소나다. 그는 가능한 눈에 안 띄게 공중 화장실 한 구석에서 한 몸 숨겨서 연명하지만 때 맞춰 조근조근 던질 법한 질문들을 던진다. 그리고 그 질문들은 쉽게 무시된다.
▲그 상식적인 질문엔 대답이 없다. '예전에는 늘 대통령을 흉내 내는 개그맨이 있었잖아요. 요새는 왜 없는 거죠? 흉내 내봐야 돈이 안 되기 때문인가요?' ⓒ극단차이무 |
사실 작품 대신 '문화 콘텐츠'라고 써야 세상에 뒤처지지 않은 것 같은 시대가 되면서 더욱 외로워진 분야 중의 하나가 연극이다. '작품'이 전통적인 의미에서 순수 예술의 연장선상에 있는 어감을 가진 단어라면 '문화 콘텐츠'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산업과 상품으로 기능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타진하는 어감을 지닌다. 우리가 향유하는 문화의 경제적 토대를 안정적으로 구축해나간다는 점에서 그 어감에는 나름의 미덕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또 작품이라는 단어에서 느껴지는 '이상적이고 고고한 뜬구름' 같은 이미지를 현실에 단단히 발붙이게 하는 힘도 있다. 그러나 이 힘은 여전히 그 작품이 '상품'으로 기능하는 것이 가능할 때의 얘기다. 연극은 생산과 소비의 측면에서 이윤은커녕 수요 공급을 맞추는 자생력조차 지키지 못하는 '비산업'이다. 그럼에도 무대에 서고자하는, 무엇인가를 표현하고자 하는 연극인들의 열망과 희생이 연극계를 지탱해왔다. 영화와 드라마가 화려하게 '문화 콘텐츠'의 명함을 달고 수출 역군의 흉내를 내고 있는 사이, 연극은 '화장실에서 조용히 기거하며 가끔 무시당하는 옳은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B언소>는 그 사람이 던지는 질문이 상당히 들을 만 할 뿐만 아니라 재미있다는 것을 증명해낸다. TV와 영화에서 종횡무진하는 배우들, 문성근, 강신일, 김승욱, 이대연, 이성민, 박원상, 최덕문, 오용 같은 배우들이 친근함을 더하고 여기에 차이무의 젊은 단원들의 가열찬 에너지와 매끄러운 연기의 세공이 더해진다. 이제 개봉하는 노근리 사건을 다룬 영화, <작은 연못>을 감독하기도 했던 연출가 이상우는 <B언소>를 통해 2010년 대한민국을 웃으면서 생각할만하게 꼴라쥬 해낸다.
<B언소>는 사실 같은 형태로 1996년에 초연되었던 작품이 재창작된 형태다. 당대에 큰 성공을 거두었던 연극이 14년이 지난 현재에도 재미있을 뿐만 아니라 시대성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은 놀랍다. 개작이 잘 되어서이기도 하겠지만, 애당초 사회를 분석하고 묘사했던 연출가이자 작가의 관점이 그만큼 핵심을 관통하고 있어서이기도 할 것이다. 이런 부분이야 말로 한 사회가 그 사회의 '어른'에게 구하고자 하는 지혜의 일면이다. <B언소>의 웃음은 지혜롭다. 살아온 경험이 짧으면 쉽게 분노하고 쉽게 절망하게 된다. 그러나 세상이 흘러가는 면면을 지켜봐온 어른은 그 시점에 일희일비하기 보다는 비평적 거리를 가지고 세상을 받아들이고 웃을 수 있게 된다. <B언소>는 어른의 지혜가 배우의 에너지로 구현된 작품이다.
우리 사회에서 많은 '어른'이 권력을 가진 채로 살아남았다는 것에 도취되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정작 한 사회가 발전하는 데에 필요한 것은 그들의 도취가 아니라 그들의 지혜다. 특히 대한민국처럼 관점과 정체성이 폭포처럼 쏟아지고 흔들렸던 사회라면 더욱 그렇다. 수많은 사이비 어른의 틈바구니에서 화장실에 숨어사는 진짜 어른 같은 <B언소>는 그래서 2010 대한민국 3부작의 하나라고 할 만하다. TV 드라마가 뜨겁게 묘사한 시대와 다큐멘터리 영화가 서늘하게 반영한 현실에 해학과 풍자로 지혜의 일면을 맛보게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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