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드라마 게시판에서 시청자들끼리 싸움이 붙었다. 드라마 내용 중 엄마와 딸이 갈등이 일었는데 누가 옳으냐를 두고서였다. 글을 남기는 시청자의 대부분이 부모 세대여서 그랬는지 감상평의 대세는 엄마 역을 지지했다. 그런데 이야기가 진행되며 점점 딸 입장의 정당성이 밝혀지면서 게시판은 아수라장이 됐다. '누가 더 나쁜 X냐'를 두고 격론이 벌어진 것이다. 우세하던 엄마 파벌에 반대하는 글들이 속속 올라오기 시작했다. 딸에게도 엄마와 갈등할 정당성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이다. 시청자 각자가 이해한 대로 갑론을박이 진행되던 가운데, 놀라운 글이 등장했다. 엄마 역을 지지하지 않고 딸 역할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좌익 알바'들이라는 것이다. 김대중 정권부터 좌파 정권 10년간 김정일이 심어놓은 좌익 알바들이 사회 곳곳에서 암약하다 이제 철저한 대북 봉쇄로 인해 할 일이 없어지니 드라마 게시판에 진출하여 악역을 옹호하며 선량한 대중을 교란시킨다는 것이다.
좌익 논란 이후로 갑론을박은 끝이 났다. 게시판은 한 가지 논리로 통일 됐다. 딸을 지지하는 자=악역을 옹호하는 자=타고난 천성이 악한 사람들=좌파. 그리고 게시판은 욕설과 미움의 언어로 도배됐다. 가끔씩 딸을 지지하는 글이 올라온다 하면, '야 이 미친 X야, 딸 역을 옹호하다니 넌 천성이 악한 빨갱이야.' '빨갱이들이 드라마까지 망치고 있다!' '한국 사회의 건전한 상식을 위해서 빨갱이인 딸 역할을 때려잡으며 드라마를 끝내야 한다!' 라는 말들이 뒤따랐다.
만드는 입장에서는 각 인물들이 평면적이지 않기 위해 애쓴 결과였으나 게시판은 때 아닌 좌파 논란에 휩싸였다. '다행히' (다행? 뭐가 다행?) 제작진까지 좌파라고 싸잡히진 않았으나 제작진이 '미쳤다'고는 싸잡혔다. 왜 악역을 옹호하냐는 것이다. 사회 정의를 바로 세우라는 것이다. 소수 의견을 가지고 괜히 이러는 것이 아니다. 게시판의 대세였다. 딸 역을 옹호하는 글이 올라오거나 양비론이 올라올라치면 온갖 비난과 욕설이 몰려들면서 글 수가 급증했다. 그들에게는 욕설을 게시판에 당당히 올릴 수 있는 도덕적 확신이 있었다. 반대파들은 '드라마 보는데 무슨 좌파냐'라는 반항 한 번 제대로 못해보고 '우리 싸우지 맙시다. 드라마 속 인물들, 알고 보면 다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노선으로 선회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께 선처를 구하는 꼴이다.
욕이야 늘 먹는 것이니 새로울 것 없지만 '좌파론'으로 게시판이 평정되는 모습은 상당히 괴이했다. 내 마음에 안 들면 좌파고, 일단 좌파 딱지 붙는 순간 게임 끝이었다. 마녀 사냥의 논리. 저 사람 마녀 아냐? 라는 말이 도는 순간 그 사람이 진짜 마녀인지 아닌지는 상관이 없다. 일단 논란이 있는 것 자체가 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녀의 실체가 무엇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한국 사회에서 좌파란 마녀와 동등한 언어로써 드라마의 시청자 게시판마저 휩쓰는 위력을 발휘한다. 그 덕분에 제작진 입장에서 대중들이 보아주길 원했던 인물들의 입체성은 수면 아래로 묻혀버렸다. 남은 것은 누가 악인이고 좌파냐, 그리고 게시판 논쟁(혹은 욕설 대결)에서 누가 이겼느냐 였다.
'악역 좌파론'을 들고 나온 시청자는 그 재미를 톡톡히 봤다. 몇몇 열광적인 추종자를 얻었으며 반대파들이 함부로 의사를 펼치지 못하게 만들었다. 시청자가 어떻게 느끼는가는 그들 마음이지만 만드는 입장에서 제일 허탈했던 건 좌파 논란 이후로 게시판에 글을 남기는 시청자들이 인물에 대한 이해를 포기했다는 점이었다. 그 전까지만 해도 등장인물이 어떤 아픔과 고통이 있어 어떤 행동을 선택하는지에 대해 이해된다, 이해 안 된다, 나였어도, 나였다면, 식의 감상과 가정을 통해 의견을 주고 받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좌파 폭탄이 떨어지자 좌파 낙인 찍힌 인물은 무조건 나쁜 것이니 어떻게 벌을 줄지 지켜보자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그리고 빨리 벌을 내리지 않는다고 연일 난리가 났다. 당시 시청률은 폭등했고 게시판 글 수는 엄청나게 올라갔다. 관심도는 뜨거웠으나 정작 드라마가 하려는 이야기에는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
드라마가 끝난 후, 욕설을 입에 물고 분노하던 시청자들은 갑자기 같은 편들끼리 게시판에서 정중히 인사하기 시작했다. 여러 논객을 만나 반가웠다는 둥, 다른 드라마 게시판에서 더 재미있게 만나자는 둥, 이렇게 헤어지면 아쉬워서 어쩌냐는 둥, 앞으로도 좋은 글 부탁드린다는 둥…, 그들은 진심으로 즐기고 있었다. 마녀 사냥은 원래 뜨겁고 즐겁다. 확실한 도덕적 우위를 느끼며 타인의 죄를 무겁게 심판하는 행위 아닌가. 작가와 연출과 연기자는 능지처참을 당했고 시청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원래 드라마가 그런 것이니까. 우리는 웃어 넘기며 관심을 받은 사실에 안도했다.
▲ <경계도시2> 복잡한 이슈에서 좌파 도장을 먼저 꺼내는 것은 한국 사회에서 승리의 지름길이라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혹은 중요한 논의에서 시선을 돌리는 가장 확실한 방법도 좌파 논란이다. ⓒ경계도시2 |
이 이야기는 절대로 사실이며 은근히 활용도가 높다. <경계 도시2>에 나왔던, 송두율 교수가 마녀로 몰리는 과정을 생각해보자. '좌파 스님'론으로 뜨거운 여론의 향방을 돌이켜 보자. 복잡한 이슈에서 좌파 도장을 먼저 꺼내는 것은 한국 사회에서 승리의 지름길이라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혹은 중요한 논의에서 시선을 돌리는 가장 확실한 방법도 좌파 논란이다. 대중의 모든 사고 구조가 좌파냐 아니냐, 마녀냐 아니냐로 몰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중이 가장 즐겁게 기대하는 순간은 마녀 화형식의 스펙터클이다. 마녀라는 소문이 돌았는데 정작 아니었다고 한다면 김새지 않는가. 기왕이면 화끈하게 잘못을 저지른 마녀가 나타나서 화형식이 있어야 재미있지 않은가. 한 마디로 '좌파'라는 단어가 나오는 순간 대중이 기대하는 다음 단어는 '화형식'인 것이다. 필승의 논리 구조다. 싸움에서 승리하고 싶다면 누가 이 필승의 유혹을 뿌리치겠나.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는 역으로 몇 가지 공식을 도출할 수 있다. '좌파론'을 들먹이는 사람은 꼭 이기고 싶은 상황이거나, 아니면 무언가 논점을 흐릴 필요가 있는 상황에 처해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좌파론'이 나오는 순간에는 항상 논의해야할 무엇인가가 내팽개쳐지게 된다는 것. 역탐지 기술이라고나 할까. 따라서 사회적 대결과 논의의 핵심에 접근하고 싶다면 '좌파론'이 들먹여지는 곳을 찾아 그 속에 버려진 쟁점을 끌어올리면 된다. 드라마에서 관심 밖으로 밀려난 인물들의 고뇌와 선택이 사실은 드라마의 핵심이었던 것처럼.
이상이, 시청자 게시판이 전해준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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