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통신위원회(위원장 최시중)가 추진 중인 방송 평가 규칙 개정안을 두고 논란이 일고 있다. 방통위는 방송 심의 규정 위반 시 각 방송사에 부여하는 벌점의 폭을 확대하고 '국민 화합과 관련한 공익 프로그램'을 편성할 경우 가점을 부여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방송평가 규칙 개정안을 추진하고 있다.
방송 평가 결과는 3년마다 한번씩 실시되는 방송사 재허가 또는 재승인 심사에서 50퍼센트 반영된다. 방송사 재허가나 재승인은 방송 사업자의 존폐가 달린 중요한 사안이기 때문에 방송 평가 역시 여타 심의와 다른 강력한 영향력을 미친다.
특히 방통위는 올해 말까지 MBC, KBS, SBS 등 지상파 방송사의 재허가를 결정할 예정이라 각 방송사와 언론계는 이번 방송 평가 규칙 개정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언론계에서는 방통위가 오는 29일 전체회의에서 개정안을 의결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심의 규정 벌점 대폭 확대…"방송사 목줄 쥐기" 비판
현행 지상파 방송 평가는 내용(300점), 편성(300점), 운영(300점)으로 나눠 이뤄진다. 방통위의 개정안은 이중 '내용' 영역에 포함되어 있는 '방송 심의 규정 준수' 항목(현행 100점)과 운영 영역에 포함되어 있는 법령 준수 여부 항목(현행 30점)에서 줄 수 있는 벌점을 각각 마이너스 300점으로 확대하기로 했다.
방통위 측은 이번 개정안을 두고 "규제 강화가 아니라 자체 심의를 강화하는 차원"이라며 "현 방송 수준이라면 마이너스 점수는 10∼20점 정도가 될 것"이라고 밝히고 있으나 개정안에 따르면 그간 방송사 재허가에서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던 방통심의위 등 '심의 기구'의 영향력이 대폭 커질 수밖에 없다.
한국기자협회, 한국PD연합회, 방송기술인연합회, 전국언론노조 등 언론 현업 4단체는 26일 서울 광화문 방통위원회 앞에서 연 기자회견에서 "방통위의 제재를 받게되는 방송사는 평가 총점 900점 가운데 최대 600점까지 감점을 받게 된다"며 "방통위 제재가 사실상 방송사의 목줄을 쥐게된다"고 비판했다.
우장균 기자협회장은 "YTN이 '낙하산 사장 반대 투쟁'을 벌일 당시 '블랙 투쟁'에 대한 감점 등으로 방통위가 YTN의 재허가를 내주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가 팽배했다"며 "방송평가 규칙이 개정되면 방통위가 앞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빵꾸똥꾸' 권고 또 받으면 방송 평가 감점?"
방통위는 그간 방통심의위에서 '주의' '경고'를 받을 경우 각각 1점과 2점을 감점해왔던 것에서 확대해 '의견 제시', '권고' 등과 같은 행정지도에 대해서도 동일 프로그램이 2회 이상 제재를 받을 경우 초과된 건수 별로 0.5점씩 감점하기로 했다.
가령 등장인물이 '빵꾸똥꾸'라는 표현을 일삼는 등 버릇없는 행동을 한다며 방통심의위로부터 '권고' 조치를 받은 MBC 시트콤 <지붕뚫고 하이킥>의 경우 또다시 '권고' 조치를 받는다면 MBC는 0.5점 감점이 되는 것.
이에 대해 MBC는 방송사 의견서에서 "권고 또는 의견 제시는 위반 정도가 경미해 제재 조치의 필요성이 없다고 인정하는 것임에도 이를 평가 점수에 반영하는 것은 방송법의 규정 취지에 반할 수 있다"고 비판했고 KBS도 "'권고', '의견 제시'까지 감점하는 것은 방송 내용의 지나친 제약으로 비춰질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박진형 PD연합회 정책국장은 "이미 방통심의위가 정권의 입맛에 맞춘 방송 장악, 통제 수단으로 전락한 상황에서 정권을 비판하는 시사·보도 프로그램이나 <지붕 뚫고 하이킥>과 같은 오락 프로그램에 언론의 자유, 창작의 자유를 옭죄겠다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고 비판했다.
"국민 화합 공익 프로그램 하면 가점 준다?"
방통위가 '국민 화합과 관련한 공익 프로그램 평가' 항목을 신설해 양극화·다문화 등 국민 화합과 관련된 소재를 다루는 프로그램을 편성할 경우 가점을 부여하기로 한 것도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MBC는 "국민 화합 프로그램이 무엇인가에 관해 명확하고 구체적인 개념 정의를 제시하는 것이 매우 어렵기 때문에 방통위의 자의적 평가가 우려된다"면서 "방송 편성의 자유와 독립을 침해할 소지가 높다"며 이 조항을 삭제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KBS도 "'국민 화합 프로그램'이라는 항목 자체가 추상적이어서 평가 척도로 맞지 않고 형식적인 비율이 아니라 내용 규제의 성격으므로 삭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냈다.
개정안에서 오락 편성 비율이 대폭 축소된 것도 각 방송사의 반발을 사고 있다. 현행 규칙에서는 전체 시간 대비 60퍼센트 미만으로 오락 편성 비율을 규정하고 있으나 개정안에서는 주편성시간(평일 오후 7~11시, 주말 오후 6~11시) 대비 50퍼센트 미만으로 제한하고 있다.
SBS는 검토 의견서에서 "방송사의 장르 편성 운용의 폭을 좁혀 편성 자율권을 침해하는 결과"라며 "장르 편성에 대한 제한이 없는 종합 편성 채널 출범을 앞두고 갑자기 오락 편성 비율을 하향 조정하는 것은 지상파에 대한 역차별을 초래할 수 있다"고 비판했다.
MBC 가장 긴장 "대량 감점 사태 우려"
특히 이러한 개정 움직임에 긴장하고 있는 것은 지상파 방송 3사 중 심의 규정 위반에 따른 감점이 가장 많은 MBC다. 2009 10월 31일 기준으로 MBC는 올 한해 '주의' 17회, '경고' 3회, '중징계' 1회를 받아 누적 점수 -47점을 기록, 각 -26점, -39점인 KBS, SBS보다 벌점이 많다.
전국언론노동조합 MBC본부는 지난 4일 낸 노보에서 "현 정권에 우호적이지 않다는 평가를 받는다는 이유로 방송 제재를 가장 많이 받는 상황에서, 개정안에 따라 방통위가 줄 수 있는 감점 폭이 대폭 늘어나게 됐으니 MBC는 대량 감점 사태를 배제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됐다"고 우려했다.
당장 MBC 경영진도 방통위 등으로부터 법정 제재 기준인 '주의 2회 또는 경고' 이상을 받은 경우 사규에 따라 인사위원회에 회부할 수 있도록 내용의 '심의 제재 최소화'를 위한 방안을 내놨다. MBC 노조는 "개정된 평가 규칙에는 방통위의 지상파 방송 통제 야욕이 숨겨져 있다"며 "그 발톱의 끝은 MBC를 향하고 있다"고 우려했다.
최상재 전국언론노조 위원장은 "이번 개정은 정권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 방송사는 가혹한 점수를 매겨 방송사 재허가 평가에서 불이익을 주겠다는 것"이라며 "<PD수첩> 등 프로그램에 대한 탄압으로 방송을 장악하려다 안되니 규칙을 바꿔 방송을 장악하겠다는 말의 다름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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