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9일 오바마가 노벨평화상을 받게 됐다는 소식은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취임한 지 1년도 되지 않은 '새내기 대통령'이 그 상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는 두고두고 논란거리로 남는다.
더구나 오바마는 지금 전쟁을 수행중인 '전쟁 대통령'이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많은 민간인들이 미군에 희생돼 논란을 빚어온 전쟁을 현재 시점에서 총지휘하는 미군 최고사령관이다.
오바마는 지난 10월 노벨상 수상 소식을 오전에 듣고 바로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정치-안보-군사 분야 고위 참모들과 더불어 3시간 동안 아프가니스탄 전쟁 전략을 논의했다고 한다. 그날 오바마의 머릿속은 평화보다는 전쟁으로 채워졌을 것이다.
▲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 |
'죽음의 상인'이란 말은 '전쟁에 쓰이는 무기를 팔아 돈을 버는 사람'을 가리킨다.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해 엄청난 돈을 벌어들였던 노르웨이의 과학자 알프레드 베른하르드 노벨(1833-1896)도 '죽음의 상인'이란 소릴 들었다.
노벨은 '다이너마이트의 끔찍한 살상력으로 말미암아 전쟁에서 숱한 사람들이 죽고 다친 원인제공자'라고 손가락질 받았다. 그런 비판에 부딪쳐 노벨은 말년을 괴로움 속에 보냈다고 한다. 다이너마이트로 번 돈을 노벨상 기금으로 내놓는다는 유언을 작성하고 세상을 떠난 것도 그로선 속죄의 의미가 담겨있다.
노벨상 탄생의 배경이야 어떠하든, 6개 분야(평화상, 문학상, 물리학상, 화학상, 경제학상, 의학상)의 노벨상 가운데 하나를 받는다면 개인은 물론 국가적인 기쁜 소식으로 여겨져 왔다. 1901년부터 지금껏 100년이 넘도록 노벨상이 주어지는 과정에서 특히 관심을 모아온 상이 노벨평화상이다.
앙리 뒤낭에서 오바마까지
이 상을 받은 사람들을 꼽아보자면, 앙리 뒤낭(국제적십자사의 설립자이며 제네바 협약의 제안자, 1901년 1회 수상자), 알베르트 슈바이처(독일 의사로 아프리카에서 의료활동, 1952년 수상), 다그 함마르셸드(유엔 사무총장으로 아프리카 콩고분쟁 해결을 위해 갔다가 비행기 추락사, 1961년), 마르틴 루터 킹 목사(미국 인권운동가, 1964년), 빌리 브란트(서독 총리로 동서독 화해에 기여, 1971년), 테레사 수녀(인도 빈민구호활동, 1979년), 데즈먼드 투투 신부(남아프리카 인권운동, 1984년) 등이다.
그들뿐 아니다. 달라이 라마(티베트 인권운동, 1989년), 아웅산 수치(버마 민주화운동, 1991년), 넬슨 만델라(남아프리카 흑백차별폐지와 민주화, 1993년), 그리고 2000년대 들어선 한국의 김대중(2000년), 코피 아난(유엔 사무총장, 2001년), 지미 카터(전 미국 대통령, 2002년), 앨 고어(전 미국 부통령, 2007년)를 비롯, 대부분 오랜 기간에 걸쳐 지구촌 평화를 위해 애쓴 이들이 상을 받았다.
노벨평화상이 한 개인에게만 주어진 것은 아니다. 평화를 위해 애쓴 국제기구(IGO)나 민간단체(NGO)들도 평화상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국제적십자위원회(제1차 세계대전 기간 중이던 1917년과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4년, 그리고 1963년), 국제적인 난민구호기구인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 1954년과 1981년), 국제아동기금(UNICEF, 1963년), 국제노동기구(ILO, 1969년), 국제사면위원회(Amnesty International, 1977년), 유엔평화유지군(1988년), 지뢰금지국제운동(1997년), 국경없는 의사회(1999년), 유엔(코피아난 사무총장과 공동수상, 2001년), 국제원자력기구(엘바라데이 사무총장과 공동수상, 2005년)가 그러하다.
일제의 한반도 침략 묵인한 루스벨트
지구촌 전체가 전쟁의 광풍에 휩싸였던 제1차,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엔 노벨평화상 자체가 주어지지 않았다. 이름 그대로 노벨평화상은 세계의 평화와 인권을 위해 오랫동안 온몸 바쳐 일해 온 사람들과 단체에게 주어져 왔다.
그런데 수상자 명단을 뜯어보면, "아니, 저들은 전쟁 잘 했다고 전쟁상을 받으면 몰라도 어떻게 평화상을 받았을까?"하고 고개가 절로 갸우뚱거려지는 사람들도 들어있다.
전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1906년, 러시아-일본 전쟁에서 평화조약을 이끌어냈다는 공로), 전 미 대통령안보보좌관과 국무장관을 역임한 헨리 키신저(1973년, 베트남 평화 회담을 이끌어냈다는 공로), 전 이스라엘 총리 메나헴 베긴(1978년, 이집트-이스라엘의 평화정착을 위해 노력했다는 공로)이 문제의 수상자들이다.
먼저 1901년부터 8년 동안 미국 대통령을 지냈던 시어도어 루스벨트를 보자. 그는 부통령 시절부터 대외팽창을 위한 미 군사력 증강(특히 해군력 증강)을 주장했고, 스페인과의 전쟁(1898년)을 벌여 미국이 쿠바와 필리핀을 식민지로 삼는 데 앞장선 강경론자이자 전쟁론자였다. 그가 대통령일 무렵인 1905년 육군장관 윌리엄 태프트를 일본 도쿄로 보내 일본 총리 가쓰라 다로와 밀약을 맺도록 했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에 따르면, 미국은 일본의 한반도 침략을 인정해주는 대신 일본은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식민지 통치를 인정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루스벨트는 우리 한국인의 눈으로 봐도 고울 리가 없다. 그런 사람이 동아시아 패권전쟁 성격을 지녔던 러일전쟁의 평화회담에 개입한 것은 다름 아닌 한반도를 희생양 삼아(20세기 초 영일동맹, 미일동맹을 축으로 한) 미국의 국가이익을 챙기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그런데도 노벨평화상이라니.
키신저와 달리 레득토가 평화상 거절한 까닭
헨리 키신저는 또 어떤가. 그는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 집권한 칠레에 들어 선 남미 최초의 사회주의정권을 뒤엎은 피노체트의 군부쿠데타(1973년)를 배후에서 지원했던 사람이 아닌가. 베트남과 이웃 캄보디아의 숱한 민간인들을 마구잡이 공습과 고엽제 살포로 죽이고 다치게 만든 워싱턴의 고위정책 책임자(대통령안보보좌관) 아니었던가.
그가 상을 받은 파리평화협정(1973년)도 따지고 보면 미군 사상자는 늘어만 가는 데다 밑 빠진 독에 물 붙기처럼 한 달에 20억 달러 전쟁비용을 잡아먹는 '베트남 수렁'에서 서둘러 빠져나오려는 냉정한 손익계산에 따른 것이었다. 그런데 노벨 평화상이라니.
키신저를 상대로 평화협상을 벌였던 북베트남의 레득토(베트남 공산당 정치국위원)가 키신저와 함께 노벨상 공동수상자로 뽑혔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그런 상이라면 받지 않겠다"고 손을 내저은 것도 그런 반발심에서였다.
'피의 과거' 지닌 이스라엘 총리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총리의 1978년 노벨상 수상도 논란거리다. 이스라엘은 하마스를 '테러단체'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하마스는 그들의 투쟁을 팔레스타인 민족자결을 위한 '순교 작전'이라 주장한다. 그러면서 "이스라엘도 지난날 숱한 테러를 저질렀다"고 지적한다. 그 한 보기가 1978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던 베긴 전 이스라엘 총리(1977-83년 재임)이다.
베긴의 삶은 한마디로 테러리스트의 삶이었다. 1913년생인 베긴은 극단적인 시오니즘(팔레스타인 땅에서 아랍인들을 쫓아내고 유대인 국가를 세우자는 이념)으로 뭉친 이르군(Irgun)의 간부로 활약했다.
이르군은 1948년까지 팔레스타인을 다스렸던 영국군이 '극렬 테러리스트 조직'으로 낙인찍은 유대인 과격단체였다. 숱한 아랍 현지인들과 영국 점령자들, 1948년 노선을 달리 하는 온건 유대인들이 이르군의 폭탄테러 또는 암살로 죽었다. 1946년 7월 22일 영국 행정기관과 영국군 사령부로 쓰이던 예루살렘 다윗왕호텔 폭파사건(영국 장교와 사병을 포함한 91명 사망)도 이르군의 짓이었다.
1948년 이스라엘 독립국가가 들어선 뒤 메나헴 베긴은 다른 많은 이르군 간부들과 함께 정치인으로 변신했고, 1977년 총선에서 이스라엘 총리가 됐다. 그리고 1978년 미국이 주선한 이스라엘-이집트 평화협상으로 이스라엘이 시나이반도를 돌려주는 캠프 데이비드 평화협정에 서명함으로써 이집트 사다트 대통령과 함께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그렇지만 그 무렵 이스라엘은 이미 중동의 '깡패국가'였다. 1967년 이른바 6일전쟁(제3차 중동전쟁)으로 차지한 팔레스타인 서안지구와 가자지구에서 가혹한 인권탄압을 벌이고 있었다. 시리아 골란고원도 점령 중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더구나 지난날 숱한 사람들을 테러로 죽인 '피의 과거'를 지닌 베긴에게 노벨평화상이 주어지다니. 지구촌 평화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은 그 소식을 듣고 놀라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간디나 문익환도 못 받은 상이니까…
그런데 올해 오바마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 결정소식은 또다시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논란거리가 됐다. 한평생을 비폭력 무저항 운동에 바쳤던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도 받지 못한 노벨평화상인데, 오바마가? 노벨상이 앞으로 잘해달라는 '주문형' 상인가? 팔레스타인 점령지에 유대인 정착촌 건설을 중지하라는 오바마의 요청을 이스라엘이 들은 척이라도 했나? 이런 물음들이 길게 꼬리를 물며 나온다.
한마디로 오바마 노벨평화상의 무게는 지난 2000년 김대중 노벨평화상의 무게에 견주면 너무나 가볍다.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란 말이 떠오를 정도다. 그러면서 한반도 통일일꾼 늦봄 문익환 목사(1918-1994)가 그리워진다. 꼭 20년 전 방북을 했다가 옥고를 치렀던 문익환 목사는 왜 노벨평화상을 받지 못했나 하는 안타까움이다.
하기야 마하트마 간디도 받지 못했으니, 심사과정이 불투명하고 때로는 의아스럽기도 한 노벨평화상에 굳이 매달릴 것도 없을 것 같다.
* 참여연대가 발행하는 월간지 <참여사회> 최근호에 실린 글을 수정 보완한 것입니다.
* 필자 이메일 kimsphot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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