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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헌도 처음엔 '6등급'이었다"

[모 피디의 그게 모!] 배우의 등급

세 모 : 배우의 등급

'당신은 현재 6등급입니다. 하지만 이번 작품에선 7등급으로 상향 조정해 드리죠.'

배우에게는 등급이 있다. 배우 세계가 '클래스'에 따라 나뉜다는 건 이미 알고 있다고? 아니, 말 그대로의 등급이 실제로 존재한다. 방송사 자체 제작물에서 성인 연기자는 6등급부터 등급이 매겨지며, 18등급까지의 출연료 층위가 존재한다. 그리고 그 이상의 금액을 받는 사람들은 자유계약자가 된다. 방송국 공채 탤런트들은 일괄적으로 6등급으로 등록되어 연기를 시작한다. 저 하늘의 반짝이는 별인 '아이리스'의 이병헌(1991년 KBS 14기 공채 탤런트)도 '강마에' 김명민(1996년 SBS 6기 공채 탤런트)도, '대통령' 장동건(1992년 MBC 21기 공채 탤런트)도 다 그렇게 6등급으로 시작한 연기자들이다.

배우 등급제는 수많은 드라마를 급하게 제작해야 하는 방송국의 현실에서 상당히 편리한 제도였다. 시작하는 배우는 무조건 6등급이며, 활동 경력에 따라 한 등급씩 상향해가는 월급 인상 개념의 시스템이다. 활동이 미비하거나 인기가 없으면 등급을 올리기 힘들며, 어려서 큰 인기를 얻는다 해도 그 층위를 무시하고 높은 금액의 계약을 할 수도 없었다. 배우 등급제는 그 나름대로 게임의 규칙이었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로 배우들의 출연료가 대폭 상향 조정되면서, 시청자들이 '알만한' 배우들은 대부분 최고 등급인 18등급을 벗어난 자유계약자가 되었다. 18등급 이하의 출연료를 받는 연기자들 중에도, 주조연급으로 캐스팅 된다면 자유계약을 요구하는 사례가 늘어났다. 돈을 얼마를 받든 간에, '등급'이라는 개념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현재 프로듀서 입장에서 출연 계약을 성사시킬 때, '당신은 몇 등급'이라고 통보를 하게 되는 경우는 대부분 단역 연기자들을 상대할 때다. 그리고 그 협상 과정에는 항상 잠깐의 머뭇거림이 따른다. 지금 내가 사람을 등급으로 구분하고 있다는 자각, 그리고 과연 내가 통보하는 이 등급이 이 배우의 가치에 대해 얼마나 말해줄 수 있는가의 문제.

▲ 방송국 공채 탤런트들은 일괄적으로 6등급으로 등록되어 연기를 시작한다. 장동건, 김명민, 이병헌 등도 마찬가지였다. ⓒ뉴시스

시청자의 관심 밖에 존재하고 기억에도 잘 남지 않는 단역 연기는 실상 어려운 연기다. 먼저, 연기를 할 수 있는 여지가 대사 한 두 줄에 국한 된다. 그 안에 캐릭터를 표현해야 한다. 너무 튀어서도 안 된다. 씬의 주인공은 다른 배우이지 자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고정 배역으로 해왔던 드라마가 아닌지라, 자신이 드라마의 톤이나 맥락에서 벗어나지 않는지도 끊임없이 점검해야 한다. 경찰, 택배직원, 식당 손님, 아줌마, 의사, 간호사, 은행원…. 심지어 간호사에 어울려 간호사 역만 줄창 맡아온 어떤 단역 배우는 여느 연출부보다 간호사가 말해야 하는 전문 용어나 의료 기계 작동법에 빠삭하다. '나 엑스트라나 한 번 시켜줘'라는 보통 사람들의 농담이 부끄러울 만큼, 그들은 전문 배우들이고, 또 그래야 한다.

그러나 그들이 현장에서 부딪치는 현실은 녹록치 않다. 일단 스케줄에 있어서 거의 배려를 받지 못한다. 주연 배우들의 스케줄에 맞춰 곡예하듯 나온 촬영 일정에 따라, 하루 종일 대사 한 줄을 위해 의상 분장 다 차려입고 대기만 하고 있다가 씬이 취소가 되는 경우도 겪어야 한다. 찍는 순서 역시 주조연 급 배우들의 대사 분량을 먼저 진행한 후에 제일 늦게 자기 분량을 찍게 된다.

드라마 감독은 단역배우를 현장에서 처음 보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대체로 단역은 직접 캐스팅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처음 만난 배우에 대한 대화는 대충 이렇게 이루어진다.

- (연출부에게) '아줌마'랑 '택배', 그리고 '앞집 여자' 왔니?
- (손짓으로 부르며) '아줌마' 이리로 오시고, 여기까지 왔을 때 '택배' 지나가고 그 때 '앞집 여자' 문 열어요, 자 큐! (그리고 이어지는 그 씬의 주연 배우와의 대화)


이름이 아닌 배역으로 불리는, 기억되지 못하는 사람들. 여기엔 배우와 감독 간의 소통이나 교감이 끼어들 자리가 없다. 그들은 NG를 내기 전까진 관심을 받는 경우도 드물다. 주연 배우가 열 번 NG 끝에 간신히 대사를 제대로 했는데 그 때 상대 단역이 NG를 내면 현장 분위기가 금세 험악해진다. 열 번을 제대로 해도 보이는 건 실수 한 번. '왜 저런 사람을 불러'라는, 볼 멘 소리부터, 최악의 경우에는 감독이 그동안 쌓여온 스트레스를 단역의 NG에 확 풀어버리는 경우도 있다. 고정 배역을 맡은 배우들은 드라마 끝까지 계속 보면서 신경전을 벌여야 하지만 단역은 한 번 보고 말 사람이자, 권력 관계에서 절대 약자라는 얄팍한 계산이 은연중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들을 두 번 죽이는 것은 '재연 배우'라는 못 돼먹은 개념이다. MBC <신비한 TV 서프라이즈>나 KBS <TV는 사랑을 싣고>등의 교양 예능 재연 프로그램에 주로 출연하는 배우들은 '정극 배우'에 비해 연기력이 떨어진다는 편견이 존재하는 것이다. 재연물은 그 특성 상 상황을 전형적으로 약간 과장해서 표현할 필요가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건 프로그램의 연출 의도에 맞춘 배우의 연기지, 그 배우의 전부는 아니다. 장르의 특징 차이가 있을 뿐, 배우는 배우다. '재연 장르'는 있어도 '재연 배우'는 없다. 문제는 어떻게 연기를 '연출'하느냐 인데, 그 책임을 배우에게로 돌려버리는 것이다.

▲ <신비한TV서프라이즈>에 자주 출연했던 고 여재구 씨. 장르의 특징 차이가 있을 뿐, 배우는 배우다. '재연 장르'는 있어도 '재연 배우'는 없다. 문제는 어떻게 연기를 '연출'하느냐 인데, 그 책임을 배우에게로 돌려버린다.

배우는 대중의 욕망을 자신에게 투사시키는 매개다. 배우는 역할을 창조하고 사람들은 배우의 연기를 통해 그를 선망하거나 미워한다. 배우는 대중이 작품을 통해 보고자하는 바를 보여주고, 도달하고자 하는 감정 상태로 이끌어 간다. 그렇게 배우는 대중의 꿈과 욕망이 된다.

그러나 단역 배우에게는 대중의 욕망이 결여되어 있다. 역할을 창조하여 그 씬에 필요한 배역을 수행해야하는 임무는 모든 배우가 같지만, 그들은 주조연급 배우들에게 시청자의 욕망이 투사될 수 있도록 디딤돌 역할을 할 뿐, 스스로가 시선의 중심에 설 수 없다. 허나 어느 단역 배우가 그 디딤돌 역할이 자신의 전부라고 생각하겠는가. 조금 더 큰 배역을 맡을 수 있기를, 작은 배역이라도 그 안에 캐릭터를 녹여낼 만한 공간이 있기를, 그리하여 자신의 연기가 누군가의 욕망에 응하는 것이 될 수 있기를 꿈꾼다. 이렇게 단역 배우들의 연기 인생은 이어진다. 단역이라는 역할 자체의 어려움, 차별적인 현장 적응에의 어려움, 편견을 이겨내야 하는 어려움, 그리고 낮은 출연료라는 어려움을 이겨내고 그들은 오늘 이 드라마의 한 씬, 내일 저 드라마의 두 씬을 해내기 위해 준비를 한다.

배우에게는 출연료의 등급이 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등급이 없다. 더 나은 대우를 바라며 온 종일 스태프들을 눈치 보게 만들며 유난을 떠는 주연 배우와, 하루 종일 한 씬을 위해 묵묵히 대기하며 한 두 줄의 대사를 반복 연습하는 배우를 같은 현장에서 마주할 때, 출연료의 등급이 곧 사람의 등급이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맞다. 불평등하다.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출연료는 그 배우의 시장 가치를 말해줄 뿐, 배우 본연의 능력과 품위를 증명하지 못한다. 그들은 모두 타인의 욕망이 투과하는 통로로써, 배우라는 직종을 업으로 삼은 사람들이다. 귀하게 여겨야 할 것은 그들이 자신의 직업을 대하는 자세다. 굳이 나서서 관심을 갖지 않아도, 배우의 시장 가치는 인기와 능력에 따라 천차만별로 매겨진다. 하지만 가상현실을 통해 새로운 꿈을 타인에게 전해주고자 하는 희망은 이 직업을 가진 사람들 모두가 공유하는 것이다. 그 연대감이야 말로 정말 중요한 것, 즉 좋은 연기를 통해 좋은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열망으로 수렴되는 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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