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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인들의 한국 영화 사랑에 답하는 한국 청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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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프랑스인들의 한국 영화 사랑에 답하는 한국 청년들

[김상수 칼럼] 제4회 한ㆍ불 영화제를 보고

제4회 한·불 영화제 - 프랑스 파리

뜨거웠다. 지난 11월 4일 프랑스 파리 '시네마 악시옹' 영화관(Cinéma Action Christine, 4 rue de Christine, 75006 Paris)에서 개막된 2009 제4회 파리 한·불 영화제(Festival Franco-Coréen du Film 2009)는 프랑스인들에게 한국인들의 마음을 전달하는 영화제로 이제 튼실하게 자리 잡기 시작했다.

쌀쌀한 초겨울 저녁 날씨에도 불구하고 개막 당일 한 시간 전부터 영화관에 입장을 하기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던 프랑스인들의 표정에는 기대와 설레임이 엿보였고 개막작으로 양익준 감독의 "똥파리"를 본 프랑스 관객들의 영화제 첫 날 표정은 흥분으로 들떠 있었다.

제 4회 한·불영화제가 열리고 있는 '시네마 악시옹' 영화관(Cinéma Action) 앞에서 개막을 기다리는 관객들

11월 17일까지 모두 네 개의 섹션으로 준비된 이번 영화제는 2007년 이후 제작된 프랑스 미개봉 한국 장·단편 영화 각각 10편을 중심으로 상영되는 '셀렉시옹', 프랑스 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한국 중견 감독의 미니 회고전 형식으로 진행되는 '시네아스트 2009', 1980년대 이전의 한국영화를 소개하는 특별 섹션인 'KOFA-FFCF 클래식', 한국과 프랑스 양국 10편의 단편영화를 소개하는 '교차된 시선' 등의 프로그램으로 영화제 구성이나 내용에서 알찬 영화제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제가 주는 의미는 파리에서 있었던 기존의 한국 영화제가 잘 알려진 이름의 감독 중심의 영화제라면, 이번 한·불 영화제는 잘 소개되지 않았거나 익히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한국인들의 '삶의 내용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다양한 장·단편 영화들을 발굴하여 소개하고, 한국과 프랑스 양국의 재능있는 신예 영화작가들을 프랑스인들에게 안내하는 내용과 형식에서는 기왕의 여타 영화제와는 뚜렷한 차별이 된다.

한·불영화제 차민철 사무국장, 상영 영화관 쟝-마리 호동 사장과의 만남

이 영화제의 사무국장을 4년째 맡아 경제적으로 어렵고 힘든 처지에서도 굴하지 않고 영화제를 계속 진행하면서 파리에서 다큐멘터리스트로 활동하고 있는 차민철(38)과 영화를 사랑하는 한국청년들의 열정에 좋은 인상을 받아 흔쾌히 상영 영화관을 빌려준 '시네마 악시옹' 영화관의 사장 쟝-마리 호동(Jean-Marie RODON, 65)을 개막 사흘째인 11월 7일에 만나 한·불 영화제 개최 배경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었다.
행사 프로그램 안내 영사자막
한·불 영화제 차민철 사무국장과 상영관 '시네마 악시옹' 쟝-마리 호동(Jean-Marie RODON) 사장

- 이번 영화제가 4회째를 맞았다. 개최 의미와 현실 문제를 요약한다면?

차민철 - 파리 한·불 영화제를 진행하면서 여러 가지 보람과 한계를 동시에 느낀다. 우선 기존 한국영화감독들의 영화에만 국한되어 프랑스 파리에서 소개되던 영화들에서 탈피하여 새로운 작품들의 소개를 통해 더 넓은 한국영화 관객층을 프랑스 파리에서 형성해 나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음에 보람을 느낀다. 그리고 흥행위주의 상업적인 스트림에서만이 아닌, 보다 구체적이고 확대된 네트워킹과 한,불 양국의 영화 및 영상 문화의 교류를 향해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어서, 지난 4년의 시간과 도전들이 결코 낭비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에 큰 위안을 얻는다.
하지만 영화제 앞에 한·불 이라는 두 가지 국적이 붙어 있는 것이 태생적인 한계로 다가오기도 한다. 두 나라의 영화들을 동시에 프로그래밍 해야 한다는 점이 여간 부담스럽지 않다. 특히 턱없이 부족한 재원은 영화제 진행에 가장 큰 제약이다. 아직 스탭들의 기본적인 활동비도 전혀 지급하지 못하고 있고 순전히 스탭들의 열정과 헌신만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은 너무나 안타깝다.

- 처음, 그러니까 첫 회 영화제를 준비할 때는 빚까지 졌다는 얘기도 들었다.
차민철 - 지원을 약속한 파리 주재 한국 정부의 기구가 갑자기 지원을 못하겠다는 연락을 해와 큰 어려움을 겪었다. 진퇴양난이었다. 진행은 이미 됐고, 하는 수 없이 프랑스 은행을 찾아갔다. 그래도 프랑스라는 나라의 은행이 외국인인 나의 뜻을 알아줘서 너무나 고마웠다. 아무런 담보도 보증인도 없이 그냥 어느 날 하루 종일 은행 문을 두드렸다. 은행 직원에게 열심히 영화제 취지를 설명했다. 프랑스 은행의 도움으로 급한 불은 껐지만 영화제가 끝나고 저는 빚을 갚기 위해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 등을 하느라고 저 개인 작업인 다큐멘터리 작업을 한동안 중단해야만 했었다. 2회부터는 한국문학번역원의 후원을 받았고 작년 2008년부터는 파리 주재 한국문화원의 지원을 받아 처음 영화제를 할 때처럼 그렇게 악조건의 어려운 상태는 조금씩 벗어났다.

- 영화제에 대한 프랑스인 관객들의 관심이 대단하다.

차민철 - 저도 놀랍다. 프랑스인 관객들은 한국에도 다양한 영화문화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 영화제를 통해서 알아봤다고 말한다.

- (영화관 사장, 쟝-마리 호동에게) 어떻게? 이 영화제를 2회째부터는 당신의 영화관에서 개최하게 되었나?

쟝-마리 호동 - 어느 날 민철이 나를 찾아왔다. 영화제 첫 회인 2006년에는 파리 시내에 있는 영화관을 돈을 주고 빌려서 영화제를 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나도 영화관을 운영하는 사람이지만 그건 영화제 취지와 맞지 않는다고 나는 생각했다. 더구나 제대로 지원을 받는 데도 없는데, 한 개인의 힘만으로는, 그것도 외국인인 한국인이 여기 파리에서는 한계가 있다. 민철이 얘기하는 영화제에 대한 설명을 다 들었다, 그리고 나는 그 자리에서 답을 줬다. 같이 하자, 그리고 나서부터 2회부터 올해 3년을 같이하고 있다.

- 어떻게 그렇게 빨리 수락할 수 있었나?

쟝-마리 호동 - 민철과 같이 나를 찾아온 한국 청년들의 인상에서 나는 영화를 사랑하는 청년들의 밝은 미래를 읽었다. 이들은 표정도 밝았고 또 준비해온 기획서가 꼼꼼했다. 물론 영화관도 수익을 생각해야 하지만 영화관이 반드시 그런 입장에만 있는 건 아니다. 수익은 장기적인 시점에서도 생각할 수 있었다.

- 수익면에서 한·불 영화제의 미래가 밝다고 보였나?

쟝-마리 호동 - 그렇다. 벌써 3년째인데 꾸준히 관객이 늘었다. 그리고 프로그램이 점점 발전하고 있다. 특히 이번 프로그램을 보자면 어떤 큰 영화제라도 본받을만한 내용과 구성이다.

- 영화관 운영의 경제 사정은? 프랑스 파리의 경우는 사정이 어떤가?

쟝-마리 호동 - 어렵다. 디지털환경이 되면서 영화 만들기는 쉬워졌다 해도 도리어 디지털이 되면서 영화관이 복합상영관으로 바뀌고 흥행위주로만 생각들을 하니까 영화배급이 획일화되는 경향이 심하다. 미국영화가 프랑스 영화관을 빠르게 잠식한지는 이미 오래고. 우리 영화관처럼 클래식영화나 예술영화전용관, 그리고 주제별로 영화를 보여주는 '주제 영화관'들이 점차 파리에서 사라져 가고 있다.

- 언제부터 영화관 운영 사업을 시작했나?

쟝-마리 호동 - 나는 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대학 졸업 후 보험회사를 다녔다. 어느 날 파리 시내 영화관 앞을 지나가는데 영화관을 판다는 공고가 붙어있었다. 같은 회사에 다니는 친구와 그 영화관을 인수하기로 했다. 그때가 1966년이고 내 나이가 스물 세 살 때였다.

- 당신의 인생에서 영화관을 경영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쟝-마리 호동 - 영화는 사람들의 감정을 공유하게 한다. 국경도 문화의 관습이나 경계의 벽도 허문다. 인간 존재의 기쁨과 사랑, 즐거움과 분노도 같이 느끼게 한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인간의 새로운 역사의 사실들을 발견하는 것에 영화의 가치가 있다. 한 작가의 예술을 통해 관객들이 서로 만나지면서 인생을 탐구하는 것이다. 나는 그 장소를 제공한다는 사실에서 보람을 찾는다.

- 당신이 영화관을 인수하고 2년 후인 1968년에는 프랑스에서 '68혁명'이 일어났다. 기존의 권위주의 가치들에 젊은이들은 반기를 들었다. 사회적 약자와 연대하면서 삶의 조건을 개선하려는 운동이 정치혁명에 버금하는 기운으로 불타올랐다. 금지하는 것을 금한다(Il est interdit d'interdire), 우린 요구하지 않는다. 우린 부탁하지 않는다. 우린 획득한다. 우린 차지한다(On ne revendiquera rien, on ne demandera rien. On prendra, on occupera) 등의 슬로건을 들고 젊은이들은 거리로 나섰다. 당시에 당신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나?

쟝-마리 호동 - 나는 영화관 문을 닫아걸었다. 그리고 조르주 프랑주Georges Franju)와 함께 '시네마테크 프랑세즈'(Cinematheque Francaise)의 공동 설립자였던 앙리 랑글루아(Henri Langlois)를 갑자기 해고한 정부 당국과 싸우기 시작했다. 누벨바그의 여러 감독들이 비상 대책 위원회를 열었다. 바로 그 장소가 내가 경영하던 악시옹 라파예트(Action Lafayette)영화관이다. 당시 고다르, 프랑수아 트뤼포, 르누아르, 레네, 로메르, 샤브롤 등이 내 영화관에 모여 대책회의를 했다.

- 프랑스 정부의 영화정책은 어떤가?

쟝-마리 호동 - 나는 국가나 정부의 영화정책을 그렇게 신뢰하지 않는다. 정치인들은 항상 말로만 떠든다. 그리고 중요한 태도는 영화인들이 예술인들로 자부심을 지니고 확고하게 자기정체성을 의식하면서 영화를 만들고 영화관을 지키는 것이다. 내가 클래식 영화를 틀거나 옛날 프랑스 영화를 상영하는 이유란 간단하다. 프랑스 파리에 왔는데 프랑스 영화는 없고 맥도널드 햄버그 집 같은 흥행위주의 미국영화만 돌리고 있다면 이처럼 한심한 경우란 없다. 1930, 40년대의 미국의 고전영화도 내 영화관에서는 얼마든지 볼 수 있다. 도리어 미국인들이 미국이 아닌 프랑스 파리 내 영화관에서 미국의 클래식영화를 만나는 것이다.

- 한국을 가본 적은 있나?

쟝-마리 호동 - 아직 없다. 한국에 대한 내 인상은 이중적이다. 7,80년대 한국의 군사 독재시대 때, 정치상황 때문에 한국에 돌아가지 못하고 여기 파리에서 공부하던 학생들을 내 장모님이 집에 머물게 한 사실이 있다. 그런 사실들은 한국에 대한 내 이미지를 어둡게 했다. 다른 하나는 3년째 내 영화관에서 상영되고 있는 한국 영화들을 만나면서 나는 한국의 다양한 문화를 접하게 되고 한국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게 됐다는 점이다.

영화제의 성과

이처럼 한·불 영화제는 감춰진 한국영화를 발굴하고 그 영화들을 관객에게 되돌려주는 형식의 새로운 한국 영화제를 해외에서 개최하는 것에 뜻이 있으며 획일적인 할리우드 시스템을 흉내 낸 스타시스템으로 투자, 기획, 홍보마케팅을 위주로 하는 한국영화 주류의 제작현실에서는 저절로 상실되고 만, 영화 문화의 다양성을 회복하자는 취지에서도 영화제 프로그램의 성격은 진취적이다. 이런 입장에서 파리에서 영화를 공부하면서 이번 영화제 프로그래머로 활약한 유동석, 전희진, 조경희, 질 콜롯(Gilles COLLOT)의 '젊은 눈'은 밝다.

더하여 영화제 행사 경비 조달이 너무나 열악한 현실이지만 홍보를 맡은 김미정, 비비안 안(Vivien ANNE), 정인호, 최효정, 영화자막 번역에 참여한 신현경, 정다정, 김아랑, 현정암, 라피안 모하메드(Rafiane MOHAMMED), 번역 감수를 맡은 심승자, 에릭 라미(Eric LAMY), 고인숙, 파멜라 루앙(Pamela ROUAM), 이지원, 가브리엘 뒤퐁(Gabrial DUMON), 피에르 아익포(Pierre AHIEKPOR), 자막기술팀장을 맡은 문충식, 사무차장 김지영, 행사 코디네이터로 활약한 김광복, 유순희, 이상훈, 그래픽 디자인 김미정, 로고디자인 최진성, 그리고 이들을 리드하는 집행위원장 배용재 등의 역할에서 이들 한국청년들은 어떻든 '한국인들의 삶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그리고 있는 영화'들을 프랑스에 소개하겠다는 열정으로 헌신이 있었다.

이제 이들의 열정과 헌신은 본국인 한국에서의 한국영화진흥위원회와 문화체육관광부가 적극 호응할 때다. 그래서 내년부터는 최소한 소요경비 6만 유로라도 제대로 조달이 되어 이 영화제가 명실상부한 한,불 영화제로 성과와 가치를 더할 수 있도록 한층 박차를 가할 때다.

그리고 나의 소회

영화는 그 본질에 있어서 인간을 말하고 인간의 삶을 그리는 리얼리즘에 있다. 이는 그럴듯하게 현실처럼 묘사되는 것으로의 리얼리즘이 아니라, 세계와 세상의 구체적인 현실에서의 사람들 삶의 본질적인 의미를 찾는 입장에서의 리얼리즘을 나는 말한다.

나는 고백하자면 14년 만에 한국영화를 프랑스 파리에서 봤다. 그간 거의 한국영화를 보지 않았다. 나는 오래전부터 영화나 연극 작업이란 "시대의 정신과 눈"이란 '믿음'을 가지고 있다. 지금부터 26년 전 1983년 당시, 남산의 '드라마센터'에서 <191931>이란 제목의 연극으로 3.1 운동과 '반민족특위재판'을 다룬 연극을 쓰고 연출할 때 나는 그 연극을 소개하는 카탈로그에 연극이나 영화는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의 '현재 문제'를 다루는 "시대의 정신과 눈"이라는 표현을 사용했고, 이후 이런 '믿음'에는 한 치 변함이 없다.

따라서 그저 돈벌이나 궁리하는 영화나 예술작업이란 나와는 거리가 있다. 나는 우리 한국인들 삶의 정체를 여하히 제대로 밝혀내는가에 연극이나 영화 장르가 예술로의 역할이 있다고 믿기 때문에 '찧고 까부는 더러운 연극이나 영화, 텔레비전 드라마'들을 볼 마음의 여유나 시간이 없었다. 특히 한국 사람들이 살아온 지난 과거의 역사를 함부로 돈벌이에 이용하여 '망가(漫畵)'를 만드는 짓거리에는 분노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리얼리즘'이 빠진 영화 연극이나 '리얼리티'가 없는 작업들에는 나는 동의하지 못할뿐더러 아예 관심이 없었다.
▲ 영화<똥파리>
▲ 영화<M>

더하여 개인적인 얘기를 하자면, 1986년 이십대 중반에 처음 영화시나리오 작업을 했을 때 영화시나리오를 잘 쓴다면 영화감독이 될 수 있다는 '순진한 생각'으로 중견 연극배우 소개로 한 영화감독을 만나 당시 영화사 황기성 사단에서 제작 예정이었던 '안개기둥'이란 영화에 시나리오를 작업하면서 영화계에 들어섰다.

그 당시 감독을 맡은 이가 독일 소설 한권을 건네면서 나에게 각색을 부탁했을 때, 나는 저작권은 해결됐느냐고 질문했던 기억이 난다. 남의 나라 번역 저작을 허락도 받지 않고 마구 각색이 가능하다는 비상식이 공공연한 당시 현실이었다. 그래서 재차 질문했다. 이런 류의 이야기를 원하는가? 알았다, 그렇다면 굳이 외국 책을 저작권도 안 물고 몰래 각색할 이유란 없다, 새로 우리 실정에 맞게 하나 쓰겠다, 그리고 돈 이백 오십 만원을 어음으로 할인받으니 이백 십만원 정도, 딱 일주일 걸려 시나리오를 썼다, 영화는 그 해 대종상 작품상, 남녀 주인공상 등을 받으면서 주목을 받았다. 나는 잘하면 곧 영화감독이 될 수도 있다는 착각을 일으켰다.

그 때부터 열심히 '우리의 문제'를 시나리오로 썼다. 일본에 강제징용으로 피폭을 당한 원폭피해자와 재일한국인 얘기도 썼고, 황폐해져가는 농촌문제, 소녀가장의 이야기 등도 썼다. 그러나 내가 주제로 다룬 시나리오들은 영화화하겠다는 영화사가 한 군데도 없었다. 그 무렵 우리 전통 장례식을 배경으로 삶과 죽음의 현대인들 이야기를 또 썼다. 그 시나리오는 몇 년 후에서야 '학생부군신위'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됐다. 대종상 시나리오 상을 준다고 대종상 사무국에서 연락이 왔다. 그런데 수상자가 나 말고도 한 명이 더 있단다. 무슨 얘긴지? 원작자인 내가 허락도 안했는데 시나리오 작가가 더 있다고? 아무리 영화작업이란 게 감독의 예술작업이지만 사회의 일반 상식과는 거리가 한참 멀었다.

나는 시나리오를 전라남도를 배경으로 썼는데, 만들어진 영화는 감독이 경상도 출신이라고 죄다 경상도 말로 바꿨고, 내가 쓴 시나리오 작품 의도와는 거리가 멀었다. 내 시나리오를 읽은 대종상 심사위원장 김지헌 작가가 대종상 시나리오 상을 강력하게 추천해 수상을 하게 됐다는데, 나는 당연히 시상식에 불참했고 대종상 트로피는 시상식이 끝나고 한참 후에 대종상 사무국으로부터 소포로 받았다. 나는 그 당시 영화계 현실이 낯설었고 적응이 어려웠다. 그리고 나는 세상에서 영화보다도 할 일은 얼마든지 더 많다고 느끼면서 영화계와 거리를 두게 됐다. 그간 쓴 시나리오를 작품 당 한 권씩 묶어서 모두 9권의 책으로 출판하고는 충무로 발길을 어느 날부터 접었다.

그 때 쓴 시나리오 선집이 1권 <새야, 새야 파랑새야> 2권 <학생부군신위> 3권 <너무 늙은 빨래> 4권 <남방한계선> 5권 <피아니시모> 6권 <짜장면> 7권 <무지개 나라의 물방울> 8권 <새> 9권 <엘비스는 죽지 않는다>로 박영률 출판사에서 출판했다. 그런데 이번엔 또 다른 사단이 생겼다. 시나리오를 정식으로 필자인 내 허락을 받지 않고 장면들이나 소재가 도둑을 맞기 시작한 것이다. 전부 25권을 출판하기로 한 시나리오 선집 출판 약속은 그냥 접었다. 그 이후 나는 영화계 근처는 발길을 접었고 심지어 한국 영화 보기도 그만 두었다. 그 무렵이 1996년이다.

파리에서 만난 한국 감독들

나는 14년 만에 파리에서 한국영화를 다시 봤다고 미리 말했다.

십년도 넘어 반갑게 파리에서 해후한 중견감독 이명세(52)의 영화 <M>은 이명세 감독이 시네아스트(Cinéaste)로 원숙한 경지에 들어선 면모를 보았다. 좁은 골목길 너머 정면 중앙으로 하늘이 보이고 주인공이 자전거를 타고 과거로 들어서는 장면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를 넘나드는 그의 카메라는 한 편의 아름다운 시(詩)와 회화(繪畫)를 만나는 즐거움을 경험할 수 있었다.
▲ 이명세 감독
▲ 양익준 감독

그리고 젊은 신예감독 양익준(34)의 영화 <똥파리>를 만났다.

2009년 한국의 오늘, 그 사회의 실상을 너무나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었고, 나는 깊은 자극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대를 이어 내려지는 폭력의 공포가 일상이 되고만 현실, 용산강제 철거시민의 참상을 그대로 연상하게 하는 제복의 폭력들에 빌붙어사는 조무래기 폭력들의 전횡과 잔인함, 인간 사회의 정당한 소통이란 소통은 죄다 끊어지고 오로지 조악한 폭력만이 세상을 지배하는 비참한 현실이 아주 거칠게 그려지고 있었다. 양익준의 딥카메라와 몽따쥬는 인간을 그리는 데 있어서 어떤 주저함도 없었고 거침이 없었다.

마치 한국의 현대사를 압축하여 보여주듯이 파괴된 가정에서 무기력한 가장들의 계속되는 폭력이란 그들이 겪은 거대한 사회정치적 폭력의 후유증을 앓고 있음이고, 그 배경이 바로 한국의 사회정치적 참상임을 냉정한 르포르타주((Reportage)처럼 그려내고 있었다. 조잡한 관념이나 덜 익은 사회의식이 아닌, 그저 그대로의 있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냉정하게 목도하고 있었다. <똥파리> 영화가 끝나고 청년감독과 새벽까지 술을 했다.

"제가 한국의 근대사 현대사를 잘 몰라요. 이제부터 공부를 해야 하겠지요. 그리고 조용하게 혼자 좀 있으려고 해요."

갑자기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가 청년에게는 부담스러울 것이다. 두런두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연거푸 독한 위스키를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몇 시간 후 해가 밝아오면 런던 영화제에 참석하기 위해 유로 라인을 타야 된다고 했다. 나는 잠시라도 눈을 붙이라고 서둘러 그를 일으켰다. 내 아틀리에로 돌아오니 미명(未明)이 밝아오고 있었다. 나는 청년의 장도(壯途)에 단정함이 흐트러지지 않기를 바랐다.  

프랑스 파리에서
(☞바로 가기 : 필자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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