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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터의 사람냄새는 화약냄새보다 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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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터의 사람냄새는 화약냄새보다 진했다"

[화제의 책] 안석호 <분쟁기행-우리는 분쟁을 모른다>

세계일보에서 10년 남짓 국제부 기자로 일하며 지구촌 여러 곳의 분쟁 지역을 취재해 왔던 안석호 기자가 <분쟁기행-우리는 분쟁을 모른다>(공감인 펴냄)란 책을 냈다.

기자로서 국제 문제를 다룬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전쟁과 평화의 문제를 전하는 것인데, 그러다 보니 취재 현장은 대개 갈등과 분쟁을 겪는 외국의 어느 지역이다. 안석호 기자는 그 일을 착실하게 해 왔고, 이 책은 그간의 취재 활동을 한 차례 매듭짓는 의미가 될 것이다.

한국 언론의 국제부 기자들은 외국의 기자들에 비해 여건이 그다지 좋지 않아 '현장'에 약하다는 평가를 받곤 한다. 그러나 이 매체 저 매체를 관심 있게 훑어보면 '분쟁 전문' 이란 타이틀을 가지고 호주머니 사정의 압박 속에서도 전쟁터나 자연재해 현장을 누비는 한국인 저널리스트들이 곳곳에 있음을 알 수 있다.

▲ <분쟁기행> (안석호 지음, 공감인 펴냄> ⓒ프레시안
안석호 기자 역시 그러한 인물 중 하나인데, 어디를 몇 번이나 가봤냐는 것도 남들과 뒤질 바 없지만, 무엇보다 그가 현장에서 만난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그 만만찮은 취재 이력을 알 수 있다.

대표적인 인물은 아마도 팔레스타인 저항운동의 상징 고(故)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이 아닐까 싶다. 아라파트 인터뷰가 어느 정도의 의미였는지는 안 기자가 파키스탄에서 겪은 이야기에 잘 나와 있다.

"아미르(현지 가이드)는 그 후로 만나는 사람마다 나를 '아라파트 만난 기자'라고 소개했다. (…) 그때마다 상대편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관심을 보였다. 이번에도 효과는 있었다. 발티드성(城) 관리인이 놀란 눈썹을 치켜 올리며 반갑게 악수를 청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후르 샤입니다. 이곳 관리인이죠. 아라파트를 만나셨다고요. (…)큰 일 하셨네요.'"

안석호 기자는 무슬림이라면 지역과 국가를 막론하고 이처럼 추앙해 마지않는 아라파트를 '맨땅에 헤딩하듯' 찾아간 결과, 그를 인터뷰한 몇 안 되는 한국인 기자가 됐다. 만났다는 게 무슨 대수냐고? 기자란 직업의 세계에서 아라파트 급(級)의 인사를 인터뷰했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자랑할 만한 일임에 틀림없다.

그 외에 안석호 기자가 만난 거물을 들자면 셰바르드나제가 있다. 1990년대 초 한소 수교 당시 소련의 외무장관을 지낸 그는 수교 때의 비화는 물론이고 1983년 KAL858기 격추 사건, 고르바초프와 함께 페레스트로이카를 이끌던 시절 등 다양한 얘깃거리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셰바르드나제는 소련 붕괴 후 그루지야의 대통령이 됐다가 부정부패 혐의로 2003년 소위 '장미혁명'으로 하야했다. 그렇다고 해도 만나기가 쉽지 않은 인물이었음에 분명한데, 안석호는 기자적 근성과 기지를 발휘하고 거기에 운까지 겹쳐 그를 인터뷰할 수 있었다.

유명 인사를 만난 얘기가 책의 전부는 물론 아니다. <분쟁기행>에는 저자가 '분쟁'이라는 하나의 테마를 가지고 돌아다녔던 여러 지역의 역사와 문화, 전쟁의 상처가 다양한 측면으로 정리되어 있다.

인도와 파키스탄이 반세기 넘게 갈등하고 있는 카슈미르, 중동 분쟁의 중심지 팔레스타인, 최근 미국과 러시아의 신경이 곤두서 있는 카프카스 등이 이 책의 큰 주제다. 거기에 개성과 태국, 천리장성, 이집트 등을 다녀오고 쓴 짤막한 리포트도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사람 냄새, 글 냄새 나는 분쟁 리포트

<분쟁기행>이 긴장과 갈등의 현장에 관한 일반적인 책들과 가장 다른 점을 꼽으라면 '사람냄새'가 있다는 점이다. 저자는 취재 현장에서 만난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를 꼼꼼히 챙겨와 쏟아 놓았는데, 사실을 지루하게 나열하는 것 보다 그들의 입을 통해 '분쟁'이란 무엇인지를 자연스럽게 알게 하는 글쓰기를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책 제목만 보면 '총알이 빗발치는' 혹은 '포연이 자욱한' 등으로만 매 꼭지를 시작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카슈미르의 장수마을 훈자와 카프카스의 장수마을 홉챠의 이야기는 사람냄새를 제대로 맡을 수 있는 대표적인 대목이다.

비싼 돈을 들여 분쟁지역 취재를 나갔는데 왜 꼭 시간을 내서 장수마을 같은 데를 취재하려고 했을까 생각해 봤다. 우선은 그런 곳에서도 전쟁과 평화라는 화두에 맞는 무언가를 찾을 수 있으리란 계산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취재 계획을 짤 수 있었던 것은 어느 상황에서도 여유와 자신감을 잃지 않는 안석호의 성품도 한 몫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가 그런 발상을 하고 분쟁지역에서도 화약냄새만 있는 게 아니더라는 사실을 발견했던 이유는 저자 자신이 바로 진짜 사람냄새가 나는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셰바르드나제를 만난 자리에서 "뻔한 말만 하지 말고 특종 하나 주세요"라고 말할 수 있는 안 기자의 기질이 묻어나는 요소를 또 하나 들어 보라면 감칠맛 나는 문장이 아닐까 한다.

"높은 산 맑은 빙하가 한껏 머금었다 토해내는 공기는 상쾌하게 가슴 속을 파고들었다."

"무용수의 회전도 가속을 붙였다. 돌아가는 탄력을 받은 치마들이 원심력으로 이 남성을 돌리는 것인지, 남성이 치마를 돌리는 것인지 구분하기 힘들었다."

"화려한 서울의 야경을 접하자 '빛바랜' 개성에서 하루 종일 죽었던 오감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동맥처럼 끊 없이 늘어선 차량의 후미등 행렬은 북한의 선동구호를 대신해 대도시 서울의 생명 박동을 전달했다."


책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이런 문장들은 단지 저자의 여유에서 나오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이런 글을 쓰기 위해서는 많은 독서와 초동 취재, 눈썰미, 타고난 글 솜씨가 필요했을 터이고, 더 중요하게는 쓰고 또 써보는 고된 노동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가끔씩 과도하게 '예쁜' 문장에 약간 신경이 쓰이기도 했지만, 글 잘 쓰는 기자에 대한 질투 때문에 그렇게 느낀 건지, 정말로 과도해서 그런 건지는 아직 모르겠다.

안석호 같은 기자가 있고, 오늘도 전쟁터로 가는 비행기 표를 끊는 언론인이 어딘가에 있겠지만, 여전히 한국에는 그런 기자들이 더 많아야 한다고 본다. 편안한 취재를 거부하고 전쟁과 재난의 진짜 모습을 찾기 위해 발품을 파는 이들이 더 많아져야 세상을 보는 우리의 눈이 더욱 성숙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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