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는 '인권'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북한은 자기네도 '인권'은 있다고 주장한다. 북한에 심각한 인권 침해가 실재하고, 그래서 인권을 개선하라고 요구하는 '밖'의 요구와 항상 평행선을 긋고 있다.
그럼 북한이 말하는 '우리식 인권'은 무엇일까? 우리가 북한의 인권 문제를 제기하고 개선을 요구하기 전에 북한이 인식하는 인권 개념을 한 번 알아볼 필요는 있지 않을까? 물론 서구의 인권 개념과는 다른 북한의 인권 인식을 인정하자는 얘기는 아니다. 북한의 '우리식 인권'은 분명 우리가 알고 있는 '인권'과는 거리가 있다. 북한의 체제가 지구상 어느 정권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특성을 지닌 체제라면, 그들이 말하는 '인권' 개념을 알아두는 것도 북한 인권상황 개선을 유도해 나가는 전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상대방을 알아야 이긴다'는 말이 있듯이 상대방을 모르고 계속 같은 말만 되풀이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북한의 '우리식 인권' 개념의 문제점을 찾아내고 지적하기 위해서는 기준이 될 보편적인 인권 개념을 머릿속에 넣고 출발할 필요가 있다.
'인권'의 탄생
국제사회는 인권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실질적 이행은 어떻게 가능한지, 그리고 각각의 권리의 실체는 무엇인가에 대해 지속적으로 논의해 왔다. 서구와 비서구권, 자유주의 국가와 사회주의 국가 및 권위주의 국가 사이에 인권에 내재된 권리의 성격과 실행을 두고 갈등과 대립이 진행되어 왔다. 이는 궁극적으로 '인권'이 '권력'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인권 투쟁은 그 시대의 지배 권력에 대한 저항 담론으로 출현했었다. 역사적 투쟁 과정 속에서 특정한 형태의 인권이 출현했는데, 결국 모든 형태의 인권을 한데 묶는 공통의 개념은 바로 '억압권력'에 대한 '대항권력'의 관계였다.
예컨대 18세기에는 지배적이었던 절대주의 국가권력에 대해 시민적·정치적 권리가 요구되었고, 19세기에는 자본주의-제국주의 권력에 대해서 민족해방 권리가 요구되었다. 최근에는 주류사회의 권력에 대항한 소수자 인권 요구가 대두하고 있다.
서구의 인권 개념
그럼 인권이 발아(發芽)한 서구의 인권 개념부터 살펴보자. 서구 인권이론의 사상적 기원은 자연권사상으로부터 출발한다. 고대의 자연법사상이 근대의 자연권사상으로 발전했는데, 고대에서 자연법사상은 권리보다 삶의 원칙 또는 기준으로서 의무의 개념이 강했었다. 자연법사상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의 스토아학파는 '자연의 이치(law of nature)'를 중요시했다. 인간은 자연의 이치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해야 하고, 인간의 행위가 옳은지 그른지 여부는 자연의 이치에 의해 분별된다고 믿었었다. 여기서 '자연의 이치' 또는 자연법(natural law)은 성문화된 실정법과 거리가 먼 도덕률이었다.
"아무리 엄격한 국가의 법이라 하더라도 그보다 근본적인 자연법을 거스를 수는 없다"고 했다. '자연의 이치'는 곧 하늘의 이치이고, 이런 하늘의 이치를 따르는 모든 인간에게 '당연하고 자연스런 권리(자연권, natural rights)'가 생기게 되었다. 시·공을 초월하는 자연법의 인간적 보편성은 오늘날 인권 개념의 토대가 됐다.
인권의 역사적 전개
정치권력에 대한 대항 담론으로 인권이 등장한 뒤 인권은 점차 개념화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역사적 흐름에 따라 그 시대의 정치적 상황을 반영해 왔다. 기독교가 지배하던 중세에는 신(神) 우위의 가치가 인간의 존엄성으로 대체되면서 인권 개념이 등장했다. 자연법이 인정되었던 중세라 할지라도 인간의 평등을 무시한 노예제가 존재했으며, 계급사회가 엄연히 존재했었다. 이 시기에 언급된 인간에 관한 문제는 보편적 인간의 가치가 아니라 소수의 특권계급에 관한 것이었으며, 존재하는 인간으로서 갖는 기본적 권리라는 인식은 아직 존재하지 않았었다. 인간에게 태어날 때부터 부여되었다고 하는 절대권으로서 자연권이 자연법사상에서 유래되었지만 소수에 국한되었고, 중세 이후에야 인간의 권리를 지향하는 역사적 변화들이 일어난다.
이후 인권에 담겨 있는 주요 개념인 생명, 자유, 권리, 소유, 재산, 평등, 그리고 개인과 사회, 공동체, 국가 등의 개념은 토마스 홉스와 존 로크, 장 자크 루소의 다양한 논의를 거쳐, 자연권이 인권 개념으로 변화되어 가기 시작한다. 이들 철학자가 주장했던 이론의 핵심을 짚어보면, 홉스는 일단 생명을 보존할 수 있어야 사회의 다른 모든 활동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주권자에 대해 사람들이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대신, 주권자는 그들의 안전(생명)을 보장해 주어야 한다고 했다. 로크는 개인권리를 존중하는 것이 국가존립의 근거라고 보았으며, 루소 인권론의 핵심은 평등권이었다. 소유권과 관련해서 루소는 개인이 소유권을 갖더라도 그것은 타인의 소유권 및 공동체 전체의 욕구와 균형을 맞춰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따라서 루소가 제시하는 권리는 소유권이든 정치적 권리이든, 개인중심적 권리라기보다 공동체형 권리이었다. 로크의 인권론이 미국독립혁명의 기초가 되었다면, 루소의 인권론은 프랑스 혁명의 기초가 됐다. 이후 인권은 개인의 천부적 권리이며 양도할 수 없고 침해 할 수 없는 절대적 권리로 인식되기 시작한다.
이들 사상가들의 심오하고 복잡한 이론을 단 한 마디로 정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여기서 우리는 국제사회 일반, 그리고 유럽연합과 미국이 각기 북한의 인권문제에 접근하는 인식과 실행에 있어서의 차이를 인권 개념의 역사적 전개과정을 통해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미국독립선언(1776)', 프랑스 혁명의 산물인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1789)'은 인권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후 인권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최종 권위의 위치에 인간 개개인을 세우며, 각 개인의 자유의지는 스스로 포기(계약이나 합의에 의한)하지 않고는 국가나 사회의 권위에 의해서 침해될 수 없게 된다는 논리로 발전했다. 그리고 19세기 산업혁명과 자본주의 발달과정을 통해 서구의 인권 이론은 상당한 변화와 발전을 거듭하게 된다.
서구 인권 개념의 특성
인간의 권리(rights of human)인 '인권(human rights)'는 일반적인 권리개념에 비해 독특하다. 우리는 인권은 천부성, 자연권성, 불가양성, 절대성, 보편성을 갖고 있다고 한다. 천부성이란 인권이 인간의 선천적인 권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권리라고 말하기 이전에 이미 권리로 존재하는 것, 그것이 인권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현실의 법과 무관한 자연권적인 성격을 지니는 권리로 규정되기도 한다. 또한 타인에게 양도하거나 함부로 포기할 수 없는 불가양성의 권리라고 할 수 있다. 인권 목록에 등재된 권리 사이에는 우선순위나 가치의 차이가 있을 수 없고, 국가와 개인에 따라 인권이 서로 다를 수 없다는 의미에서 절대성과 보편성을 지닌다.
인간은 자신들이 당연히 누릴 수 있는 것을 누리지 못하고 위협당할 때 권리를 요구한다. 정의가 지배하는 곳에서는 권리에 호소할 필요가 없다. 집행 가능하지 않은 권리는 아예 권리가 아니라고 말하기도 한다.
오늘날 인권은 그 성격과 한계에 있어서 초기 인권 이론과 다르다. 이는 국제사회와 개별국가, 국가와 개인, 그리고 개인과 집단 간의 역할과 권리 규정, 그리고 인권 실행의 문제에 있어 논쟁의 여지가 남아 있음을 의미한다. 단지 자유주의적 자연권 사상 중심으로 발전되어 온 서구 인권 개념이 자본주의의 확장과 더불어 변화하면서, 서구 인권 개념에 대해 많은 반론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권의 확산은 국제정치에서 주류 담론으로서 이슈화되어 가고 있고, 하나의 행동 원칙이나 규범으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인권의 본질과 범위는 물론이고 다른 가치와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문제에서 완전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인권의 내용과 인권의 정당한 범위, 인권에서 주장되는 권리의 우선순위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이는 국제사회의 북한인권 문제제기에 있어서도 피할 수 없는 논쟁이다. 국제사회와 북한의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북한주민의 인권을 개선하고자 하는 '밖'의 행위자가 해결해야 할 과제이기도 하다.
북한인권의 개선 가능성은?
북한은 자신들에게는 '우리식 인권'이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로서는 이해가 안 되는 주장이다. '인권 최악국'이라는 오명을 완전히 무시하고, 북한주민의 인권침해를 북한당국은 당연시하고 있다. 그렇다고 북한이 국제사회에서 '인권'을 운운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북한은 일찍이 유엔의 인권활동에 한국보다 먼저 참여했고, 현재 북한은 시민적·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 아동권리협약, 여성차별철폐협약 등 4개 조약에 가입해 있다. 2009년 사회주의헌법 수정을 통해 인권조항을 집어넣기도 했다. 그러나 북한당국의 이러한 인권관련 국제활동은 사실 무의미하다고 할 수 있다. 용어는 같지만 개념이 다른 인권을 머리속에 넣고 움직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북한주민들이 인권 개념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가 있다는 것조차 알지 못하고, 위협당하고 있음에도 인권을 요구할 수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다는 것이다. 이는 북한체제의 특성에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불행히도 북한 체제는 일반적인 사회주의 체제와는 또 다른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주민의 인권을 개선하는 데 있어 '밖'의 문제제기와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그러기에 단기간 내에 가시적인 효과를 기대하기가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밖'에서 북한 인권 개선 유도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북한에 대한 인권 문제제기를 멈추어서도 안 될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북한주민들이 인권에 대해서 인식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중국의 경우를 보면 이런 일이 불가능하지는 않다고 생각된다. 일부 중국의 학자들도 인권문제는 사회와 경제 발전을 통해 점진적으로 해결될 문제라고 했다. 이는 중국의 인권 상황이 보편적 인권 개념에 비추어 볼 때, 아직은 열악하다는 것을 에둘러 인정하고 있는 셈이다. 실제로 개혁 개방 이후 사회적·경제적으로 발전과 변화를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에는 아직 인권문제가 남아 있고, 중국 당국도 인권문제에 민감하다.
그러나 긴 호흡으로 중국의 인권 상황 변화 과정을 분석해 보면, 중국의 사례는 앞으로 대북 인권정책을 개발해 나가는 데 있어 예비적 검토로서 주목해 볼 대목들이 적지 않다. 개혁개방 이후 중국 경제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인권문제에 대한 중국 당국의 자세 변화와 중국인들의 인식 변화를 보면, 북한의 변화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서구에서도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부르주아(bourgeois)라는 중산층이 생기고, 그들에게 '개인'의식과 '권리'의식이 싹 텄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런 의식들이 지배 권력에 대한 저항 담론을 형성하는 토대가 되었음을, 북한의 인권 상황 개선 문제와 관련하여 다시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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