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극적 평화'란 전쟁의 반대개념으로서 '단지 물리적 폭력이 없는 상태'를 말하고, '적극적 평화'란 전쟁의 원인이 되는 구조적 긴장관계를 없애나간다는 뜻의 평화다.
따라서 지구촌의 참다운 평화란 단순히 총소리가 나지 않는 소극적 평화를 가리키는 게 아니고, 갈등집단 사이의 협력을 통해 궁극적으로는 통합을 이뤄나가는 적극적 평화일 것이다.
한반도 평화의 3단계
갈퉁의 평화 2분론을 20세기와 21세기 한반도에 적용한다면 어떤가. 큰 그림으로 보면 3기간으로 나눌 수 있지 않을까 싶다.
1단계(1953-2000년)는 6.25 한국전쟁이 끝나고 거의 50년 동안 한반도엔 전쟁이 없었으나 크고 작은 갈등관계를 이어져 왔으니 '소극적 평화'의 시대를 살았다.
2단계(1998-2007년)는 2000년과 2007년 두 차례의 남북정상회담을 비롯해 남북이 모처럼 손을 잡고 화해와 경제협력을 통해 '적극적 평화'를 추구하는 모습을 보였다.
3단계(2008년-현재)는 지난 10년 동안의 남북화해정신을 휴지통에 처넣고 다시금 남북대결구도를 되풀이하는 '소극적 평화'의 시대로 후퇴하는 모습이다.
지금 한반도 상황은 너무나 답답하다. 이명박 정부의 잘못되고 오만하기까지 한 반통일적 대북정책은 '6.15 공동선언'(2000년)과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10.4 선언'(2007년)을 휴지처럼 내던졌다. 금강산 관광 중단에 이어 '6.15공동선언이 낳은 옥동자'라 일컬어지는 개성공단도 문이 닫힐까 걱정되는 상황이다.
케케묵은 반공논리로 국민을 속이고 남북대결구도로 정권을 이어가려는 이명박 정부의 태도로 말미암아 한반도엔 싸늘한 기운이 감돌게 됐고, '소극적 평화'조차 위태로운 위기상황 속에 있다.
▲ 한반도의 '적극적 평화'를 일구어내려 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을 기리는 봉하마을의 대형 현수막 ⓒ김재명 |
누가 그를 죽였나
바로 그런 판에 많은 이들의 가슴을 정말로 시리도록 만든 사건이 터졌다. 지난 5월 23일 새벽 노무현 전 대통령이 바위 아래로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거두었다는 소식은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노무현이 누구인가. 사람마다 평가는 다르겠지만, 한반도에 적극적 평화를 심으려 노력했던 인물이 아니었던가.
따지고 보면, 분단한국의 60년 정치사에서 진정성을 지니고 '적극적 평화' 심기에 힘썼던 대통령은 '햇볕 전도사' 김대중과 더불어 노무현 말고 또 누가 있었나. 6.25 뒤 극우파들이 활개쳐온 한국정치 지형을 바꿔 좌파를 끌어안고 남북화해와 한반도 평화 쪽으로 나아가려던 인물이 아닌가.
지지자들이 바랐던 것처럼 그렇게 유능하지 않았을지는 모르지만, 정치인 노무현이 죽은 동물의 시체를 뜯어먹는 하이에나 같은 극우보수 언론과 검찰로부터 모욕에 시달리다 끝내 스스로 목숨을 거두어야 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도대체 어떤 자들이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갔을까. 대뜸 몇몇 얼굴들이 떠오르지만, 굳이 그 부끄러운 이름들을 꼽아 이 귀한 지면을 더럽히진 말기로 하자.
다만, 인간 노무현이 그 나름의 자존심을 지녔고 '원칙'을 중요시했기에, 지역주의와 계파정치가 판을 치고 눈치와 약삭빠름, 줄타기에 찌들을 대로 찌들은 한국 정치풍토에 신선한 충격을 던진 인물로 기억하고 싶을 뿐이다.
"오늘 죽더라도 떳떳하지 못한 일 타협 못해"
신선한 충격에 관련된 개인적 이야기 하나. 1992년 3월 초 늦은 밤, 14대 총선에서 부산 동구에 출마한 노무현 민주당 후보를 따로 만난 적이 있다. 그때 노 후보의 경쟁자는 서슬 퍼런 5공 신군부의 핵심 허삼수.
1987년 6월항쟁 뒤 치러졌던 총선(1988년)에서 당시 집권당(민정당) 후보로 나왔던 허삼수를 누르고 국회에 나갔던 노무현은 이른바 '5공 청문회'에서 논리정연한 추궁, 그리고 명패를 집어던지는 불같은 열정으로 민초들의 사랑을 받는 전국적 정치인이 됐다.
그러나 노태우-김영삼-김종필이 손을 잡은 3당 합당(1990년)이 '정치적 야합'이라며 김영삼을 따라나서지 않은 탓에 92년 총선에서 고전 중이었다.
그런데 정작 노 후보를 만나보니 의연했다. "내가 3당 합당에서 김영삼 씨를 따라 민자당으로 가는 게 현실적으로 이익이 된다고 사람들은 말했지만, 떳떳하지 못한 일에 타협해선 안 된다는 생각이다. 오늘 죽더라도 잘못된 정치행태에 타협하지 않아야 하고, 그것이 나의 최소한의 자존심"이라고 했다.
이런 말도 했다. "국회 노동위에서 해야 할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닌데 (허 후보처럼) 유권자 표나 챙기려고 지역구 뒷골목 방범등 달아주고 상갓집 드나드는 일을 정치인의 제1 덕목으로 꼽을 수야 없지 않느냐."
결과는 낙선. 그 뒤 여의도 어느 음식점에서 우연히 만났다. 낙선소감을 묻자, "사람들은 나를 바보라 하지만, 자존심을 지닌 떳떳한 바보가 더 낫지 않아요?"라고 빙그레 웃는 얼굴이 지금도 삼삼하게 떠오른다.
▲ 5월 29일 노무현 전 대통령을 마지막으로 떠나보내는 길엔 눈물이 넘쳐났다. ⓒ김재명 |
반통일 극우 세력의 정치적 타살
명분과 도덕성을 중요시했던 '바보 노무현'의 자존심은 그가 대통령 재임 중에는 몰랐던 일로 말미암아 큰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이명박 수구정권과 극우언론들이 한국의 법전에도 없는 '포괄적 뇌물죄'란 흙탕물을 튀기려고 기를 쓰자, 끝내 죽음으로 맞섰다.
필자는 그의 서거 소식을 듣는 순간, "이 땅의 수구 보수 반통일 극우 세력의 정치적 타살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떠올랐다.
정치인 노무현을 말할 때, 다른 것은 몰라도 민족화해와 상생을 통해 '적극적 평화'를 이루려 한 것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그가 집권 기간 동안 기울였던 '적극적 평화' 노력들은 성공과 실패 여부를 떠나 값진 것이다.
2008년 정권이 바뀌면서부터 한반도에 냉기류가 흐르는 모습을 보면서 노무현의 마음은 몹시 무거웠던 것으로 알려진다.
"실용주의냐, 이념주의냐"
지난해 초가을(2008년 10월 2일) 노무현 전 대통령의 개인 홈페이지 '사람사는 세상'에 '대북정책 근본적 전환이 필요하다'란 제목으로 올린 200자 원고지 70매 분량의 글을 읽다 보면, 그 진지한 글을 한자 한자 써내려가면서 퇴임 뒤 한반도 상황을 걱정했던 그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 글의 요점은 △지난 반세기 동안의 한국의 대북정책은 갈등만 있고 성과는 없었고 △"평화통일이 아닌 통일은 없다"며 평화통일의 원칙 아래, 협상 상대(북한)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성실한 자세로 협상을 하되 △협상의 결과는 반드시 이행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특히 이 글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은 "국가보안법이 남북 대화의 걸림돌"이라고 문제를 제기하면서, 한미동맹이란 이름 아래 지금도 북한을 자극하고 신뢰를 흔드는 일이 많다는 점을 비판한다.
그러면서 이명박 정권에 묻는다. "국가보안법을 강조하는 것, (한미)동맹을 강조하는 것, 이런 것은 실용주의인가요, 이념주의인가요"
▲ 덕수궁 앞 분향소는 경찰에 파괴됐지만 조문 발길은 끊이지 않는다. 노무현의 죽음은 거리의 보통사람들에게 통일과 민주의 중요성을 다시금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김재명 |
노무현의 부활, 통일과 민주의 불씨 살리다
한반도에 '적극적 평화'를 일궈내려 애썼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현실정치의 무대 뒤로 사라진 지금, 그의 빈자리가 더욱 허전해 보인다. 노무현의 죽음은 한반도의 통일지향 세력에게 크나큰 손실이다. 오죽하면 김대중 전 대통령이 "내 몸의 반이 무너진 심정"이라고 탄식을 했을까.
그래도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버리고 싶지 않다. 5.23 서거 뒤 한반도의 남쪽에서 일어난 거대한 추모 열풍은 통일과 반통일, 민주와 독재의 흐려졌던 대치전선을 다시금 뚜렷이 긋고 저항의 불길을 지폈다. 무엇보다 거리의 보통사람들에게 통일과 민주의 중요성을 다시금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노무현은 죽음으로써 다시 부활했다.
노무현님, 한반도 평화통일의 날이 오기까지 편히 쉬소서.
* 참여연대 발행 월간지 <참여사회> 최근호에 실린 글을 수정 보완한 것입니다.
* 필자 이메일 kimsphot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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