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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논어(論語)라도"

[김운회의 '새로 쓰는 한일고대사']<66> 텐무, 세상을 속이다 ①

제 23 장. 텐무, 세상을 속이다

들어가는 말 : "폐하, 논어(論語)라도"

열도 역사의 대표적인 화두는 바로 천황(天皇)입니다. 일본의 천황은 실권도 없는 명목상의 통치자이지만 일본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오히려 실권이 없었기 때문에 천년 이상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 또한 천황제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일본의 중요한 역사적 분기점에서 천황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기도 합니다.

7세기 중엽에 이르자 야마토 정권은 왕권강화를 위해 당나라의 율령제를 모방하여 정치개혁인 다이카개신(大化改新 : 646)을 시작합니다. 그 후 율령제의 기초가 무너지고 귀족세력이 대두하면서 다시 천황권이 약화되었고, 이 과정에서 지방의 무사세력이 강대해집니다. 이들이 독립하면서 강력한 무사집단으로 변모하였고 이들이 통치권을 행사하게 된 것이 바쿠후 체제(幕府體制)입니다. 바쿠후 체제는 무사계급이 군사력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권력과 조직을 가지고 통치한 정치형태입니다. 1185년 카마쿠라 바쿠후 수립이후, 일본의 역사는 아시카라(足利) 바쿠후 ― 센코쿠지다이(戰國時代 : 전국시대) ― 오다노부나가(織田)·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 ― 도쿠가와(德川) 바쿠후(에도바쿠후)로 전개됩니다.

▲ [그림①] 도쿠가와이에야스-도요토미 히데요시-오다 노부나가(왼쪽부터)

천황의 본질을 파악하기란 여러모로 어려운 일입니다. 요즘도 천황에 대한 보도들이 많지 않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천황의 존재를 느끼기도 어렵습니다. 그런데 일본 왕실에 경조사(慶弔事)가 있을 때는 매우 다른 양상을 보이게 됩니다. 대부분의 국민이 마치 자기 일처럼 기뻐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천황 가족의 출생은 일본의 영속성(永續性)이 유지된다는 의미로 파악이 됩니다.

지나간 역사를 돌이켜 보면, 천황은 정치적 실권이 없는 상태로 있다가 정치적 변혁기에는 실제로 권력을 장악하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좀 시간이 지나면 또 그 권력이 약화되어 원래대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천황은 힘이 있다고 보기도 어렵고 또 없다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천황에 대한 정치권의 태도입니다. 1930년대 일본이 군국주의로 치달아 대동아 공영권을 꿈꾸던 당시 천황은 개인적으로 생물학(生物學)에 대한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천황은 정치문제에 별로 관심이 없었고, 대부분의 일들은 군부가 처리하고 있었던 것이죠. 제가 보기엔, 어차피 천황이 관여한다고 해서 군부의 동향을 통제할 수 있는 상황이라고 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군부는 천황에 대해 크게 우려합니다. 그래서 천황을 알현하여 "폐하, 폐하께서는 이 비상시국에 생물학 연구나 하고 계시다니 될 법이나 한 일입니까?"라고 힐난합니다. 그리고 시종으로부터 "폐하께서 너무 자연과학에 기울어지시는 것보다는 하다못해 논어(論語)라든지 뭐든지 한문선생이라도 부르셔서 들으시면 어떻겠습니까?"하고 주의를 받았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하라다쿠마오니끼(原田熊男日記)』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천황이 마치 엄한 부모나 과외선생을 만나서 닥달을 당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유명한 정치학자 이시다타케시(石田雄) 교수는 "천황이 무력화(無力化)된 것이 오히려 천황을 더욱 신비화·절대화되는 아이러니를 낳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1)

일본 군국주의는 태평양 전쟁을 통해서 절정에 달합니다. 당시 일본의 군부는 천황 즉 대원수가 직접 통수하는 '천황의 군대'임을 자랑하였습니다. 군부는 천황의 권위를 절대시하고 "상관의 명을 받드는 것을 곧 짐의 명령을 받듯이 하라(『군인칙유(軍人勅諭)』)"고 함으로써, 일본 군대는 엄격한 계급 구별과 상급자에 대한 절대복종으로 다져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시기의 천황은 앞서 본대로 실권이 거의 없는 존재였습니다.

▲ [그림 ②]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결정하는 어전회의(그림)

1천만 명에 달하는 일본제국의 군인들은 실제로는 군부나 이와 관련된 일부 재벌 과 같은 특정 권력에 몸을 바치는 상황인데도, 제국주의 시대 일본 군부는 마치 일본을 대표하는 신적인 천황이라는 존재를 위해 죽는 성전(聖戰)의 형태를 띠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군부나 특정 정치 경제세력들의 입장에서 보면 약간의 양보로부터 엄청난 열매를 거두고 있습니다. 남아도 많이 남는 장사지요.

(1) 텐무, 세상을 속이다

유구한 부여계의 역사에서 일본의 부여계로서의 역할이 강조되는 시기는 6세기 이후라고 할 수 있습니다. 6세기부터 반도부여는 상대적으로 약화되고 있으며, 신라 또한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함에 따라 반도부여의 고뇌가 깊어집니다. 따라서 부여의 숙적인 고구려와의 관계에 있어서 헤게모니가 반도부여에서 열도부여로 넘어갑니다.

6세기 열도와 반도의 관계를 기록상에 나타난 부분만을 살펴봅시다. 김현구 교수는 당시 열도부여와 반도부여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요약합니다.2)

① 열도(야마토 정부)는 임나에 3회에 걸쳐 사자를 파견.
② 임나는 열도에 5회에 걸쳐 사자를 파견.
③ 열도는 15회에 걸쳐 반도에 사신을 파견하거나 군사적 지원을 제공.
④ 반도는 24회에 걸쳐 선진문물을 제공하거나 사자를 파견.

당시 열도 부여(야마토)에서는 고구려나 신라에 대해 사신을 파견하지 않았지만 고구려나 신라는 열도부여에 대해 각각 2회에 걸쳐서 사신을 파견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당시의 세력판도나 정세가 급변한 것이 원인으로 추정됩니다. 반도부여의 군사지원 요청에 대해 열도부여는 10회에 걸쳐 말, 배, 화살, 군량 등의 군수물자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열도부여가 신라와 고구려에 대해 냉담한 반응을 보이는 것과는 매우 대조적인 것으로 이것은 열도부여와 반도부여가 가진 유기적 연관성을 설명하는 기록상의 중요 자료입니다. 특히 반도부여가 열도에 대해 관산성전투(554)를 전후로 하여 독촉사를 5회 이상 파견하였다는 점도 특기할 사항입니다.

사토츠구노부(佐藤信)교수에 따르면, 6세기의 왜의 대왕은 후일 일본율령국가와 같은 일원적인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일본의 학계에서는 엄밀한 의미에서 고대국가가 형성되는 것은 6세기 이후라는 견해가 지배적입니다. 사이다마(埼玉) 고분군, 이나리야마(稻荷山) 고분군에서 출토된 철제의 검에 새겨진 명문에 의해 와카다케루 대왕(유라쿠 천황 : 곤지왕으로 추정됨)의 시대인 5세기 후반 열도에서는 연합정권적 성격에서 중앙집권적 성격으로 일련의 변화가 나타나고 있습니다.3)

즉 6세기까지 열도에서는 야마도 정부와 지방 호족과의 사이에 많은 갈등이 있었고 이 반란의 시대가 끝난 뒤인 7세기 경에 지방제도가 점차 정비되고 있습니다. 야마토의 대왕(大王)과 중앙호족과 지방호족과의 관계는 아직은 대왕(大王 : 오키미)과 王·君(키미)이라는 규모의 대소관계에 어느 정도 머물러 있기는 하지만 오키미가 막강한 권위와 권력을 확립하여 스메라미코토(天皇 : すめらみこと)로 되어간 것은 7세기 후반의 단계였습니다. 즉 일본의 국가원수를 의미하는 천황이라는 칭호도 이 시기 즉 텐지(天智) 천황의 기간 중이나 『일본서기』의 편찬기인 7세기 후반을 즈음해서 나타났을 것이라는 것이 통설입니다.

제가 종합적으로 고찰해 볼 때 호족들의 복잡한 세력관계를 종식시킨 대왕은 텐지 천황이고 이 시기 이후부터 '명실공히' 열도의 주요 지역들을 통일하여 중국과 유사한 중앙집권적 고대국가가 형성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 행정력과 전국력을 동원하여 반도부여(백제) 부흥군의 해외파병이 가능했던 것입니다(이 점은 앞에서 충분히 고찰한 사항입니다). 그리고 이 중앙집권적 고대국가가 제대로 뿌리를 내리게 한 것이 텐무·지토 천황의 시기였습니다. 텐지 - 텐무를 거치면서 이제 천황 권력은 신적인 단계에 진입하게 됩니다.

천황(天皇)이라는 말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먼저 다른 쥬신의 경우들을 살펴봅시다. 쥬신 천하기(5호16국 시대)에서 이 16국의 군주들은 황제, 왕, 공, 대선우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어졌습니다. 물론 16국 전부가 황제로 일컬었던 것은 아니죠. 칭제(稱帝 : 군주를 황제로 부름)한 나라는 성한(成漢), 전조(前趙), 염위(冉魏), 전연(前燕), 전량(前涼), 전진(前秦), 서연(西燕), 남연(南燕), 후진(後秦), 하(夏), 북위(北魏) 등 13개국이고 또한 이들 대부분은 초기에는 왕(王) 또는 천왕(天王)을 일컬은 뒤에 황제로 등극합니다. 여기에는 천왕의 칭호가 다수 사용되고 있는데 천왕은 주(周) 왕조의 왕을 나타내는 말로 『춘추(春秋)』와 『순자(荀子)』등에 보이고 『사기』와 『삼국지』에서는 황제의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쥬신 천하기에서는 천왕(天王)이 바로 황제에 준하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4)

그런데 천황(天皇)이라는 호칭은 고대 중국이나 한국의 사료에서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천황은 어떤 의미에서 유목민인 천손족(天孫族)의 전통과 농경민인 황제(皇帝)의 정치적 전통이 결합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거시적으로 본다면 농업과 유목을 겸했던 원부여계의 역사를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또 다른 면에서는 천황이라는 호칭은 천손족이 열도로 진출하여 토착민들을 다스리는 과정에서 나타난 열도 고유의 군주개념으로 여기에 '중화의식'이 결합하여 생성되었던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천황은 일본의 고유음으로서는 '스메라미고토(すめらみこと)'라고 읽고 한자음으로는 덴노(天皇)로 읽죠. 천황은 제사장의 의미인 천자(天子)와 현세의 군주인 황제(皇帝)를 합한 개념으로 단군왕검의 개념과 거의 같은 의미를 지닙니다. 이 점에 있어서 일본은 쥬신의 전통을 가장 오래 간직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천황은 천손이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천황의 자매나 딸과만 결혼할 수 있습니다. 이른바 신들의 결혼인 셈인데, 이것이 근친혼의 원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쇼오무 천황(聖武) 천황이나 현재의 아끼히도(明仁) 천황은 민간인과 결혼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좀더 깊이 들어가 보면, 엄밀한 의미에서 천황이란 황제가 가진 순 인간적인 개념도 아니고 단군왕검이 가진 반신반인(半神半人)의 개념과도 차이가 있습니다. 즉 단군왕검은 토착민과의 결합(융합)이 강조된 반신반인(半神半人)의 개념입니다. 그러나 열도에서 사용하는 천황의 개념은 문자 그대로 아라히또가미(現人神)나 아끼즈가미(現神 : 살아있는 신) 즉 '하늘의 황제'라는 개념입니다. 천손족(天孫族)의 원형이 오히려 더욱 강화된 형태로 나타납니다. 이 같은 개념이 나타난 것에는 두 가지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나는 천손족들인 유목민들이 이리저리 옮겨다니면서 오히려 민족 정체성을 더욱 강화한 형태일 수도 있고,5) 다른 하나는 문화나 무력의 격차가 토착민에 비하여 월등한 경우 '정벌자'의 입장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파악한 개념으로 볼 수 있습니다.

천황의 호칭은 비조정어원령(飛鳥淨御原令 : 681∼685)의 공식령(公式令)에서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사용되었으며 사료상으로 보면 대체로 682년경으로 보고 있습니다. 천황에 대한 기록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는 나라현 하세데라[장곡사(長谷寺)]에서 소장하고 있는 법화설상도(法華說相法圖)에 있는 "奉爲飛鳥淸御原大宮天下天皇敬造"라는 문구로 알려져 있습니다.

▲ [그림 ③] 나라현 하세데라[장곡사(長谷寺)]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보다 심각하고 중요한 사실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천황이라는 말이 대체로 7세기 이후 구체적으로는 백제(반도부여)의 멸망기에 구체화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반도부여의 몰락으로 부여계는 심각하게 위축되고 있는데 왜 다른 한편에서는 천황이라는 개념이 나타고 있을까요? 일단 열도부여는 반도부여라는 형제국가가 소멸되는 아픔은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적 부담이 없어지기도 했습니다. 반도부여의 제왕이 존재할 때에는 천황이라는 호칭을 공식적으로 사용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반도부여의 멸망은 천황의 지위를 정립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열도부여가 부여계의 맹주의 지위를 가지게되면서 나타난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텐지(天智) 천황은 백제 부흥군을 파병하면서 왜에 머물러 있던 의자왕의 아드님인 여풍장(余豊璋)을 백제왕으로 봉합니다. 이 행위는 천황이 주변의 나라에 대해 소중화주의적인 지배체제를 구축하려는 시도를 공식화했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7세기 후반에 열도에서는 천황에 대한 존칭으로 아라히또가미(現人神)나 아끼즈가미(現神 : 살아있는 신)라는 말도 등장하는데 이 말은 진신(壬申)의 쿠데타(672)를 전후로 천황 권력이 더욱 강화되면서 나타난 말이라고 합니다.6) 당시 역사가 편찬되면서 천황가는 아마테라스의 적손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스메미마노미코토(皇孫尊), 히노미꼬(日御子)라는 호칭이 일반화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7) 물론 실제에 있어서 아마테라스나 스사노오는 가야계이고 야마토 왕조는 부여계이기 때문에 서로 동일계열은 아니죠. 다만 이것은 보다 정치적인 목적이 강한 것입니다.

즉 열도에서는 아마테라스가 태양신으로 널리 인식되고 있으니, 그 명에 따라서 일본을 통치함으로써 정치적 정통성과 정당성을 가질 수 있다는 생각으로 신화와 역사를 한데 묶은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점들을 보면 부여계는 이리저리 모으고 통합하여 하나로 만드는데 놀라운 재능을 가진 듯합니다. 하여튼 열도 군주의 지위가 대왕(大王)에서 천황(天皇)으로 변화해갔으며 열도는 율령국가의 형성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8) 이 점은 『수서(隋書)』에서도 확인이 됩니다.9)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본다면, 텐지 천황이 『일본서기』를 편찬했다면 전혀 다른 형태가 되었을 것입니다. 부여계 천손을 중심으로 편찬을 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만약 그렇게 했다면, 오늘날과 같이 일본 고대사가 '비밀의 커튼' 속에 감춰지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 텐무는 자신의 출생과 진신의 쿠데타에 대한 많은 의혹이 있었으므로 초기의 가야계 신들도 포용하고 후기의 부여계 천손족들의 역사가 이들을 계승한 형태로 편찬함으로써 자신에 대한 많은 의혹들을 불식시키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텐무는 역사 왜곡의 원흉이자 부여계 역사 전체를 혼란에 빠드린 천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쥬신의 역사에서도 매우 불행한 사태가 발생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보아온대로 『일본서기』는 너무 많은 일들을 짜깁기하고 새로 만들어서 쓰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다른 일반적인 사서들과는 달리 『일본서기』는 암호해독을 하듯이 읽어야 할 지경이 되었습니다.

근대 일본의 대표적 사가인 쯔다소기치(津田左右吉)는 『일본서기』의 편찬자가 천황중심제의 입장에서 전체적으로 개작되었다고 하였고,10) 미시나아키히데(三品彰英)는 『일본서기』의 내용은 '백제삼서(百濟三書)'가 그대로 전제된 것이라는 것을 지적하기도 하였습니다.11) 그런데 천황의 개념이 반도부여의 멸망 이후 성립된 것으로 본다면 반도부여(백제 또는 남부여)의 역사는 극도의 왜곡을 거치지 않으면 안되겠죠 ?

이노우에히데오(井上秀雄) 교수는 6세기 이전의 문헌 사료들은 불확실하다고 지적하였고12), 야마오유키하사(山尾幸久) 교수는 일본으로 망명한 백제인 또는 백제왕족들의 후손들이 자기들이 가지고 있던 자료 가운데서 백제가 일본에게 협력한 부분들을 조작 재편집하여 『일본서기』의 편찬자들에게 제출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13) 따라서 백제의 역사를 기록한 책들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중요한 것이 이른바 '백제삼서(百濟三書)'였고, 이 기록들이 일본 조정에 제출되었으며, 이 기록들이 천황을 중심으로 다시 서술 개작된 것이 바로 『일본서기』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편찬의 기간이 40여년에 걸쳐 있었기 때문에 상당히 오랜 기간을 조직적으로 작업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어떤 경우라도 초기의 역사를 신화화하는 것까지 비난하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수용한다기보다는 건국(建國)과 관련한 영웅들의 일대기를 찬양하는 것까지도 수용할 정도의 넉넉함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일본서기』는 이런 정도의 단계를 훨씬 뛰어넘어 복합적인 열도의 역사 전체를 하나의 패러다임 속으로 몰아넣어 세상을 속이려 한 것입니다. 그 시작은 텐무 자신의 출생과 관련된 비밀을 은폐하기 위한 것이죠. 그러니까 거짓말은 그것을 감추기 위해 다른 거짓말을 낳고, 또 그 거짓말은 또 다른 거짓말을 낳는 법입니다.

『일본서기』는 '권력을 통한 역사의 지배'라는 좋지 않은 선례를 남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대부분의 군주들은 이 같은 유혹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텐무는 이 유혹을 이겨내지 못했고, 결국 『일본서기』는 그 유혹의 결과물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일본서기』에 과장되거나 날조된 기록들이 후일 다른 구실로 악용되는 일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예를 들면 근초고왕이 한반도 남부와 열도로 진출한 것이 거꾸로 영문을 알 수도 없는 진구황후의 이야기로 둔갑하여 피를 나눈 형제국가인 한반도를 침략하는 구실이 되는 어이없는 일들이 벌어집니다.

그러나 어쨌든 백제의 멸망은 강력한 천황 개념의 성립과 더불어 유구했던 부여계의 역사가 전혀 다른 방향에서 새로 쓰여지는 계기가 됩니다. 즉 반도부여(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668) 후 제40대 텐무 천황(672~686) 때에 부여계의 역사를 모두 열도부여를 중심으로 편찬하게 된 것입니다. 이 책이 바로 『일본서기』입니다.

그 동안 『일본서기』에 대한 학문적인 연구는 반도나 열도에서 헤아릴 수도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그 많은 연구들을 제가 다 아는 바도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일본서기』에 대해 기존의 학문적인 연구를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대체적인 내용을 소개하면서 유구한 부여계의 역사에서 나타나는 의미를 중심으로 살펴보고 있습니다.

필자 주

(1) 이시다 타케시「이데올로기로서의 천황제」차기벽·박충석編『일본현대사의 구조』(한길사 : 1980) 100쪽. 이시다 타케시(石田雄)교수는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와 더불어 태평양 전쟁 전기 일본의 천황제 파시즘적 지배를 가능하게 한 사회적 기반을 찾고자 노력해온 학자로 『근대일본정치구조의 연구(1958)』에서 천황제를 이데올로기로서 파악하고 있다.
(2) 김현구 「6세기의 한일관계사」『한일역사 공동연구보고서 1』(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 2005) 391쪽.
(3) 佐藤信 「6세기의 왜와 한반도 제국」『한일역사 공동연구보고서 1』(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 2005) 397쪽.
(4) 三崎良章『五胡十六國』(景仁文化社 : 2007) 157쪽.
(5) 상세한 설명은 김운회『대쥬신을 찾아서 1』(해냄 : 2006) 4장. 똥고양이와 단군신화.
(6) 진신의 난(진신의 쿠데타)으로 정부의 기록들이 많이 소실되어서 진신의 난 이전의 『일본서기』와 진신의 난 이후의 기록에 상당한 차이가 있다고 한다.
(7) 김현구 『백제는 일본의 기원인가』(창비 : 2007) 187쪽.
(8) 佐藤信 「6세기의 왜와 한반도 제국」『한일역사 공동연구보고서 1』(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 2005) 405쪽.
(9) "有軍尼一百二十人, 猶中國牧宰. 八十戶置一伊尼翼, 如今里長也. 十伊尼翼屬一軍尼. 其服飾, 男子衣裙 , 其袖微小; 履如 形, 漆其上, 繫之脚. 人庶多跣足, 不得用金銀爲飾. 故時, 衣橫幅, 結束相連而無縫, 頭亦無冠, 但垂髮於兩耳上. 至隋, 其王始制冠, 以錦綵爲之, 以金銀鏤花爲飾."(『隋書』「東夷傳」倭國)
(10) 津田左右吉『古事記及日本書紀の硏究』(岩波書店 : 1924)
(11) 三品彰英 『日本書紀朝鮮關係記事考證 上』(吉川弘文館 : 1962)
(12) 井上秀雄 『任那日本府と倭』(東出版 : 1973) 28-29쪽.
(13) 山尾幸久 「百濟三書と日本書紀」『古代の日韓關係』(塙書房 :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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