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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꾸마치의 후예, 천황 위에 군림하다

[김운회의 '새로 쓰는 한일고대사']<56>성왕과 가야(임라) 삼총사 ③

(2) 불교 삼총사 : 성왕 - 소가씨 - 킨메이 천황

― 모꾸마치의 후예, 천황 위에 군림하다 ―

한국의 충남 부여에 가면 일본의 민간 단체가 세운 불교전래사은비(佛教伝来謝恩碑 : 1972)가 있습니다. 그 비문에는 한국어와 일본어로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일본 불교는 일본국 흠명조(서기 552년)에 백제 26대 성왕이 전한 데에서 시작된다. 그후부터 발전을 거듭하여 일본문화의 정화(精華)를 이룩하였다. 일본 불교도는 그 은덕(恩德)을 천추(千秋)에 잊을 수 없어 정성어린 감사의 뜻을 표하고저 한국불교도의 협찬을 얻어서 성왕의 옛 도읍지인 이곳에 사은비를 건립하고 한일양국민의 영원한 친선의 표로 삼음과 아울러 세계평화의 상징이 되기를 염원하는 바이다."13)

열도인들은 불교문화가 바로 일본 문화의 정수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과거 일본 메이지 시대의 불교계 지도자였던 다나까 찌가꾸(田中智学)는 "백제 성명왕의 은의는 천년에 잊어서는 안된다(百済聖明王の恩誼は千載に忘れてはならない)."라고 하면서 "일본은 우선 옛날의 불교 전래의 큰 은혜에 대해, 깊게 감사의 뜻을 나타내는 것을 가지고, 양국교류의 기초로 해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14) 물론 이 발언은 한일합방을 위한 또 다른 문화적 포석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본 불교계는 한일국교 정상화(1965) 이후 바로 한국에 친선 사절을 파견하고 '불교 전래 사은비' 건립을 추진하였습니다. 위의 '불교전래사은비'가 그 결과물입니다. 이 비석은 일본의 불교 종파를 초월한 시설물이라고 합니다. 그리하여 한일 국교정상화 이후 지속적으로 한일간의 불교문화 교류는 이어져 2008년에는 제29차 한일불교문화 교류대회(2008.6.9~6.13)가 열리기도 했습니다.

제가 지적하고 있는 것은 열도의 불교계의 정치성을 거론하는 것이 아니라, 성왕이나 불교가 가진 국가적 이데올로기로서의 비중입니다.

일본은 세계적으로 대표적인 불교국가입니다. 한마디로 불교의 나라지요. 일본의 거리를 가다보면 어디를 가나 불교 용품들을 파는 상점들이 늘어서 있습니다. 태국, 스리랑카와 함께 대표적인 불교국가가 일본입니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일본의 불교는 백제의 성왕이 전해준 것입니다. 그런데 일본이 불교를 수용하는 과정에서도 성왕이 킨메이 천황이 아니면 곤란한 사실들이 다수 나타납니다.

성왕은 일본에 불교를 전파한 임금입니다. 기존의 일본 사학계에서는 백제 성왕이 고구려와 신라의 압박에 대항하기 위해 왜와의 접근을 시도하는 가운데 불교전파(킨메이 천황 13년)를 무기로 삼았다고 보고 있습니다.15) 불교는 일본 열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상적 조류이며 신불습합(神佛習合)의 대표적인 나라가 일본입니다. 즉 일본은 불교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많은 갈등이 있었고 이 불교의 수용이야말로 새로운 일본의 구심점이 되었기 때문에 성왕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만약 '성왕 = 킨메이 천황'이라는 등식이 성립된다면, 새로운 불교적 이상국가 일본의 건설자가 바로 성왕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 성왕이 일본에서 천황의 역할을 동시에 했다면, 성왕은 일본의 정신적인 지주가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일본의 고문헌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간무 천황의 직계조상으로 신사에 모셔져 있다면 그것은 당연한 귀결이기도 합니다(다음 장에서 이 부분은 충분히 분석할 것입니다).

▲ [그림 ⑤] 불교전래지

당시 불교의 주도세력은 임나 삼총사의 하나인 백제계의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 : ?~626)입니다. 소가노 우마코는 토착종교 세력을 물리치고 불교전쟁(587)에서 승리함으로써 열도에는 불교문화 국가가 성립됩니다. 소가노 우마코는 5세기에 일본으로 온 백제의 고위 대신이었던 모꾸마치[목만치(木滿致 또는 목리만치)]의 후예로 알려져 있죠. 모꾸마치는 개로왕의 조신으로 국란을 당하자 피신하여 문주왕을 등극시켰던 사람입니다.

▲ [그림 ⑥] 소가노 우마코의 묘[石舞台古墳(奈良県高市郡明日香村 소재)]

고대 일본의 유력 호족들은 조상의 명복을 비는 씨족의 절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소가씨 씨족의 절이 바로 일본 최고(最古)의 아스카사(飛鳥寺)입니다.16) 특히 이 절의 기둥을 세우는 날에 소가노우마코 대신과 1백여 명이 모두 백제의 옷을 입고 있었고 이를 보는 자들이 모두 기뻐하였다는 기록이 『부상략기(扶桑略記)』에 보입니다.

▲ [그림 ⑦] 아스카사의 전경과 입구(蘇我馬子가 건립한 일본 최고의 본격적 사찰)

소가노우마코는 야마토노아야우지(東漢氏) 등의 도래계 씨족들을 끌어들여 결속하고 왕권의 재정을 담당하면서 세력을 신장시켜온 씨족입니다.17) 소가노우마코는 불교 반대파인 유력한 중앙호족인 모노노베모리야(物部守屋) 등을 멸망시키고[蘇我·物部戰爭], 588년 스슌(崇竣 : 587~592) 원년에 아스카테라(飛鳥寺 : 法興寺)를 조영하여 596년 11월에 완성합니다. 이 사찰은 열도에서 처음으로 조영된 것으로 열도 불교의 본산이 되었으며 찬란한 아스카 시대를 열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킨메이 천황 시기에 가장 큰 쟁점들 중 하나인 불교의 수용과정을 보면, 킨메이 천황과 성왕은 동일인이거나 아니면 친족 이상의 관계가 아니면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불교는 잘 알려진대로 백제가 일본에 전해 주었다고 합니다. 일본에서는 이를 '불교공전(仏敎公伝)'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이상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현재까지도 큰 쟁점이 되고 있는 부분은 전래 시기(538년설, 552년설)에 관한 문제와 전래의 원인과 호족간의 갈등 문제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불교는 일본의 간절한 요구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백제의 성왕이 일방적으로 사자를 보내어 불상이나 경전을 보내왔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이 일로 일본 조정은 격랑에 휩쓸리고 맙니다. 이 불교의 공전(公伝)으로 인하여 일본에는 '사실상' 반도부여(백제)의 직계로 알려져 있는 소가씨(蘇我氏)가 권력을 독점하는 발판을 마련합니다. 현재까지 일본의 연구로는 불교는 매우 정치적인 사안으로 불교를 매개로 하여 유력호족인 당시 모노노베(物部氏)씨와 소가씨가 심각하게 대립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상한 일은 불교공전을 전하는 사료가 두 종류가 있습니다. 즉 『일본서기』에는 552년(킨메이 13년) 10월에 백제의 성왕이 불교를 전해준 것으로 되어있는 반면, 『원흥사 연기(元興寺縁起)』나 쇼오토쿠 태자(聖徳太子)의 전기를 다룬 『우에노미야 마사노리 석가 여래제설(上宮聖徳法王帝説)』에서는 538년에 불교가 전래된 것으로 말하고 있고 이것을 보강하는 것이 『부상략기(扶桑略記)』입니다. 487년 부레쓰 천황이 사망후 20년 간의 천황 공석(혼란) 시대를 거친 후 오오토모씨(大伴氏)의 지지를 받은 게이타이 천황이 즉위했고 531년에 게이타이 천황이 서거한 후 소가씨의 지지로 킨메이 천황이 즉위 했습니다.18) 이 문제는 지금도 해결되지 않고 있지만 대체로 538년설을 타당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19)

일본에서 불교의 전래가 문제가 되는 것은 킨메이 천황의 즉위년도와 바로 관련된 사건일 수도 있고, 한국에서는 성왕과 킨메이 천황과의 관계와 밀접한 관계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일본서기』는 분명히 문제가 있습니다. 이 시기 『일본서기』의 기록을 보면, 킨메이 12년 성왕이 백제, 임라, 신라의 병들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쳐 한성을 되찾았고, 킨메이 13년 겨울에 노리사치계를 보내어 불교를 전하였으며 14년에 신라가 백제의 동북변을 취하여 나제동맹이 깨어지고 백제와 신라의 긴장이 고조되더니20) 킨메이 15년 성왕이 전사합니다. 불교의 전래가 엄청난 파문을 일으키는 정치적인 사안인 셈치고는 불교가 너무 급하게 백제에서 일본으로 이식되는 느낌이 듭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불교의 수용의 시기에 관한 논쟁 이전에 중요한 문제는 불교의 수용과 더불어 거대 호족들 즉 소가씨(蘇我氏)와 모노노베씨(物部氏) 간의 전쟁이 시작되어 거의 40여년을 계속한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불교는 하나의 구실로 보이기도 합니다.21)

소가씨와 모노노베씨 두사람의 대립의 본질은, 정계의 주도권을 둘러싼 권력 투쟁에 있었죠. 소가씨는 반도부여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 소가씨는 철저히 킨메이를 지지하고 있습니다. 소가씨는 개로왕의 총신(寵臣)인 모꾸마치[목만치(木滿致)]의 후손입니다. 킨메이 천황은 소가씨와 얽히고 설힌 결혼관계를 맺읍니다. 소가노우마코의 두 따님 모두 킨메이 천황의 황후였습니다. 큰 따님이 기다시히메(堅鹽媛 : 蘇我堅鹽媛), 둘째 따님은 오아네노키미(小姉君 : 蘇我小姉君)인데 이로 부터 천황 세 분이 탄생합니다. 즉 킨메이 - 비다츠 - 요메이 - 스이코에 이르는 천황가의 계보에서 반도부여(백제)계의 아버지와 반도부여(백제)계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분들이 열도의 지배자들이었죠. 이들을 흔히 소가계(蘇我系) 황족으로 부르기도 합니다.22)

아무래도 이상하지요?

그러니까 불교라는 구실로 무령왕의 직계가 열도를 장악해 가는 과정이 바로 킨메이 천황의 즉위 과정이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 주도 세력이 바로 소가씨라는 말이지요.

소가씨는 반도 부여인과 깊은 관계를 가져, 조정의 재정면을 담당하는 신흥 씨족이면서 보다 체계적이고 행정적인 지배체제를 목표로 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니까 이 생각이 바로 성왕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와 일치하는 것이지요. 당시로 보면 성왕은 보다 시스템적(Systematic)으로 행정구조나 국가조직을 운영하려 했던 분입니다. 상당히 개혁적이고 혁신적이며 국가체제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킨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하여 모노노베(物部氏)씨는 군사·경찰·제사를 담당하면서 보다 토착적이고 외래문화의 수용에 다소 비판적인 씨족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소가씨가 불교라는 세련된 철학과 종교 체계로 무장하여 모노노베씨를 제압하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성왕이 백제 호족들을 제압하려는 정치적·종교적 이데올로기와 일치하는 것이지요.

결국 성왕의 일방적인 불교의 공전으로 시작(538)된 이들의 전쟁은 587년 모리야는 히가시오사카(東大阪市) 키즈리(衣摺)에서 사살되고, 같은 해 8월 스슌 천황[崇峻天皇 : 泊瀬部皇子(하쓰세베노미코)]이 즉위하면서 막을 내리게 됩니다. 이렇게 하여 권력을 장악한 소가씨는 킨메이 천황이 서거한 이후 조정에서는 절대권력을 장악하게되고 이후 60여년 간을 권력을 독점하게 됩니다. 텐지 천황(天智天皇)이 이들을 제거(645)할 때까지 아무도 이들을 제어하지 못합니다. 소가씨는 천황의 생명도 좌우하는 '사실상'의 '천황위의 제왕'으로 군림하게 됩니다.

다시 백제의 성왕이 일방적으로 사자를 보내어 불교를 전래했다는 문제로 돌아갑시다. 지금까지 분석해보니 이 부분이 분명히 이상하죠? 성왕이 열도에 불교를 전해준 것이라는 부분도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왜 그럴까요?

첫째, 대개의 경우 불교는 승려들이 주도하여 전파하는 것인데 성왕이 주도했다는 점이죠. 둘째, 백제와 일본이 직접적인 혈연적 관계가 아니라면 불교 수용을 위해 그 많은 갈등과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했을까하는 점입니다. 특이한 수용과정임에는 분명합니다. 물론 토착종교와의 갈등은 있을 수가 있지만 열도에서 나타나는 현상은 지나치게 과격합니다. 셋째 불교가 전래되었을 때 킨메이 천황의 태도도 이상합니다. 이 부분을 좀더 구체적으로 봅시다.

이전에도 신라나 고구려로부터 일본에 불교전래가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왕이 불경과 불상 등을 보내자 킨메이 천황은 "너무 기뻐 춤을 덩실덩실 추면서, '짐이 지금까지 이렇게 미묘한 법을 들은 바가 없다.'라고 하면서 신하들의 의중을 물었다."라는 기록이 『일본서기』에 나타납니다. 이 말이 있은 후 소가씨는 "대부분의 나라에서 불교를 숭상하는데 우리라고 예외일 수가 있겠습니까?"라고 바로 호응합니다.23) 임라 삼총사의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죠? 그러니까 설령 킨메이 천황은 성왕과 동일인물이 아니라 할 지라도 그 이데올로기적 성향은 완전히 일치하고 있다는 점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는 것이지요.

참고로 고대 열도 쥬신의 터전이었던 오사카 지역에는 구다라역(百濟驛 : 백제역), 구다라사지(百濟寺趾 : 백제사지) 등이 있고 현재 오사카 평야와 히라노강(平野江)은 과거에는 각각 백제평야(百濟平野), 백제강(百濟江)이었다고 합니다. 일본이 세계에 자랑하는 대표적인 국보 불상은 구다라관음(百濟觀音 : 백제관음)인데, 이 불상은 녹나무(樟木)로 제작된 것으로 7세기 초에 반도부여(백제)가 나라(奈良)에 있는 열도부여(왜) 왕실에 보내진 것이라고 합니다. 이 구다라관음과 쌍벽을 이루는 것으로 백제의 위덕왕(성명왕의 제1왕자)이 왜에 보낸 구세관음상이 있습니다.

호류지(法隆寺)의 고문서인 『성예초(聖譽抄 : 1394~1427)』의 기록에 위덕왕은 아버지(성왕)를 그리며 이 구세관음상을 만들었으며 성명왕이 서거한 뒤 다시 태어난 분이 바로 일본의 쇼토쿠(聖德) 태자라고 합니다.24) 이 전생에 관한 내용의 사실성보다도 쇼토쿠 태자를 성명왕(성왕)의 후신으로 일반적인 생각이 퍼져 있음이 고려할만합니다. 즉 쇼토쿠 태자는 관세음 보살의 화신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일본에서 가장 존경받는 위인 가운데 한 사람인데 이 분이 전생에 바로 성왕이었다는 말입니다. 그저 "쇼토쿠 태자가 (조상) 할아버지(성왕)를 쏙 빼닮았다"는 말로 이해하시면 되겠군요. 그러면 성왕이 일본의 역사에서 어떤 위치와 역할을 하고 있는지 짐작이 가시죠?

사족으로 한 가지만 더 이야기합시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도요타(豊田)씨25) 의 선조가 바로 오오우치 가문이고, 이 오오우치가문의 시조가 바로 성명왕(성왕)의 셋째아들 린쇼(りんしょう) 태자(琳聖太子)라고 합니다. 물론 이 부분은 역사적으로 고증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후에 만들어진 전설이라고도 합니다만,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왜 성왕의 후예임을 굳이 가져다 붙이는가 하는 점은 고려할 부분이죠.

야마구치현(山口縣)에 전해오는 전설에 따르면 오오우치 가문의 선조들이 본래 임나(任那)에서 야마구치현으로 건너와서 본래 다다라씨(多多羅氏)를 사용하다가 오오우치씨(大內氏)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이 오오치씨의 가문은 이 지역의 유력가문으로 찬란한 오오우치문화를 꽃피웠고, 16세기 경에는 열도에서 가장 유력한 호족이었습니다. 이 지역 사람들은 성왕이 자기의 핏줄을 보존하기 위해서 셋째 아들을 열도로 보낸 것이라고 합니다. 이 가문의 대표적이자 마지막 인물은 16세기의 오오우치 요시타카(大内義隆 : 1507~1551)입니다. 그는 "마음의 달"을 보았던 독실한 불교도였을 뿐만 아니라 일본의 대표적인 문화인(文化人)입니다. 난세에 적응하기 힘들었던 인물입니다. 그가 남긴 말 가운데 유명한 명구를 소개합니다.

"죽는 사람도 죽이려는 사람도 모두 이슬과 같고 또한 번개 같구나. 그대로 보고 갈 밖에(討つ人も討たるる人も諸ともに如露亦如電応作如是観)"26)

▲ [그림 ⑤] 오오우치요시타카의 동상(山口県 山口市 龍福寺 소재)

지금까지 본대로 여러 정황적인 조건으로 보면 '킨메이 천황 = 성왕' 이라는 것을 추정해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이 문제를 완전하게 입증하기에는 다소 부족한 듯합니다. 아무리 정황이 비슷하다고 해도 동일인이라고 판정하는 것은 그 이상의 증거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필자 주

(13) "日本の仏教は 日本国欽明朝(西暦552)に百済国聖明王により始めて伝来され 爾来発展を重ねて日本文化の精華となった.日本の仏教徒はその恩義を千載に忘れることが出来ない.よってここに感謝の誠を現わすため韓国仏教徒の御好意のもと聖明王の旧都であるこの地に謝恩碑を建立しもって日韓両国民の永遠にわたる親善の証とし延いて世界平和の象徴たらしめたいと念願するものである"(이 비문의 일본어 내용)
(14) http://www.kokuchukai.or.jp/about/main4.htm 日本 國住會 자료.
(15) 佐藤信 「6세기의 왜와 한반도 제국」『한일역사 공동연구보고서 1』(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 2005) 408쪽
(16) 김현구 『백제는 일본의 기원인가』(창비 : 2007) 64쪽.
(17) 佐藤信 「6세기의 왜와 한반도 제국」『한일역사 공동연구보고서 1』(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 2005) 409쪽.
(18) 『上宮聖徳法王帝説』은 쇼오토쿠(聖徳) 태자의 전기(傳記)로서 『日本書紀』의 기사와 거의 동시대의 기록으로 볼 수 있는 일본 최고(最古)의 문헌 가운데 하나다. 킨메이천황으로부터 쓰이코천황(推古天皇)에 이르는 시기를 쇼오토쿠 태자를 중심으로 5代의 사이에 황실의 계보,재위년수,몰년(没年),능(陵)의 소재와,쇼오토쿠 태자의 생몰년(生没年),묘(墓)의 소재 등의 기록과 소가노우마코(蘇我馬子)의 사적 등을 기록하고 있는 사료이다.
(19) 불교 전래 그 자체에 관해서는, 『上宮聖徳法王帝説』(「志癸島天皇御世 戊午年十月十二日」)『元興寺伽藍縁起』(天國案春岐廣庭天皇七年歳戊午十二月)가 주요한 판단 기준이 된다. 여기서 말하는 무오년(538년)이 가장 유력하다. 이 이후 킨메이 천황 치세인 540년에서 571년까지는 무오(戊午)라는 간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20) 『三國史記』「百濟本紀」성왕, 「新羅本紀」진흥왕
(21) 모노노베(物部氏)씨의 본거지인 가와치노쿠니(河内国) 시부카와(渋川)군 시부카와 폐사(廃寺)[현재 동 오사카(大阪府) 야오시(八尾市)]에서 아스카 시대 초기의 헌구와(軒九瓦)가 출토하고 있어 모노노베씨는 소가씨와 같이 불교를 받아 들이고 있었다고 하는 설도 있다.
(22) 遠山美都男 『謎にみちた古代史上最大の雄族』(1987)
(23) 『日本書紀』欽命紀 13年 冬10月.
(24) 홍윤기 『일본 속의 백제 구다라』(한누리미디어 : 2008) 309쪽.
(25) 참고로 도요타 그룹의 창시자인 도요타 사키지(豊田佐吉) 사장의 좌우명은 '百忍鍛事遂全'로 알려져 있다. 그는 평소에 "어떤 사람도 성공의 그늘엔 많은 눈물이 있다. 편안히 사는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을 뿐이다. 모두가 백 번을 참고 천번을 단련하여 업무를 완수해야 한다. 즐기면서 성공하는 길은 없다"라고 하였다.
(26) 이 시(詩)는 오오우치 요시타카(大内義隆)가 총애했던 스에타카후사(陶隆房)의 배반으로 결국 고립무원의 지경이 되어 자결할 때에 남겼다고 전해지는 마지막 글이다. 끝 부분의 응작여시관(応作如是観)은 「金剛般若經」에서 유래한다. 이 시에서는 오오우치요시타카의 인생에 대한 회한을 넘어선 관조가 느껴진다. 자신의 신하가 배신하여 한쪽은 토벌군으로 한쪽은 반란군으로 된 부분과 끝없는 인생유전을 바라보면서 그를 원망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인생의 더 큰 본질로 나아가는 관조(觀照)의 정신을 볼 수 있다. 応作如是観이란 세상의 이치가 바로 끝없는 유전(流轉)의 과정이며 부처가 세상을 구하러 이 세상에 오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즉 스에타카후사가 자기를 죽이게 하는 것도 결국은 부처가 이 세상에 와서 자신의 몸을 여러 가지로 바꾸어 나타나 중생(자신)으로 하여금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을 깨닫게 하려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진리를 깨달아 누구를 원망할 일도 아니니 "있는 그대로" 보고 자기를 버리고 이승을 떠나는 자신을 관조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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