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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나 3총사 : 성왕 - 소가씨 - 킨메이 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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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나 3총사 : 성왕 - 소가씨 - 킨메이 천황

[김운회의 '새로 쓰는 한일고대사']<55> 성왕과 가야(임나) 삼총사 ②

(1) 임나 3총사 : 성왕 - 소가씨 - 킨메이 천황

백제의 역사에는 목라근자(木羅斤資 : ? ~?)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구체적인 생몰연대는 알 수가 없지만 근초고왕·근구수왕 때의 장군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에 관한 기록이 한국쪽에서는 거의 없고 주로 『일본서기』에 나옵니다. 일본에서는 '모꾸라 곤시(Mokurakonshi)'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아마 이 말이 당시의 말에 더 가까울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가급적 이 말들을 사용할 예정입니다. 그는 현재의 창녕·경산·함안·합천·고령 등의 가야와 신라 지역을 공략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신라의 여인을 맞아 모꾸마치[목만치(木滿致 또는 목리만치)]를 낳습니다. 모꾸마치(木滿致)는 구이신왕에서 문주왕의 시기에 활약한 백제의 유명한 대신입니다.

일본의 역사를 공부하다보면 소가씨(蘇我氏)가 나옵니다. 천황보다 더 큰 권력을 1백여년을 장악했던 집안입니다. 그런데 이 소가씨가 바로 이 모꾸마치(木滿致)의 후예로 알려져 있죠. 모꾸마치는 개로왕의 조신(朝臣)으로 국란을 당하자 피신하여 문주왕(475~477)을 등극시켰던 사람입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일본 천황이 모꾸마치를 일본으로 불러들였다고 하는데 그 후 백제에서는 그에 관한 기록이 없고 『일본서기』에는 소가노마치[소가만치(蘇我滿智)]라는 인물이 등장하여 일본 조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 두 인물은 성씨에 차이가 있지만 이름이 같고 활약한 시기가 같은데다가 한반도에서 활약한 이후 일본으로 갔고 이후에는 일본에서만 기록이 나타나는 점으로 미루어 대체로 동일인으로 간주하는 것이 대세입니다. 물론 소가노마치가 백제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사실을 명확히 입증할 수 있는 자료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나 소가노마치의 행태를 보면 그는 모꾸마치가 분명해 보입니다.

그러니까 모꾸라곤시[목라근자(木羅斤資)]의 아들이 모꾸마치[목만치(木滿致)]였고 이 사람이 바로 『일본서기』의 소가노마치(蘇我滿智)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아들들의 이름들이 모꾸마치의 출신을 짐작하게 합니다. 먼저 소가노마치(蘇我滿智)의 가계를 보시죠.

소가노마치(蘇我滿智) ― 소가노가라꼬[蘇我韓子(소가한자)] ― 소가노코마[(蘇我高麗(소가고려)] ) ― 소가노이나메[蘇我稻目(소가도목)] ― 소가노우마꼬[蘇我馬子(소가마자)] ― 소가노젠도꾸[蘇我善德(소가선덕)] ― 소가노이루까[蘇我入鹿(소가입록)]

이들 소가씨 가문은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후반까지 약 100여년 간 일본의 실질적 지배자였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들의 이름이 한국인을 의미하는 한자(韓子 : 한국아이), 고려(高麗) 등이 나타나고 있고 특히 소가노이루까(蘇我入鹿)의 정식이름은 소아대랑임신안작(蘇我大郞林臣鞍作)인데2) 여기서 안작(鞍作)이라는 이름은 백제계의 씨족명과 같고 씨에 해당하는 임씨(林氏)는 『신찬성씨록』에 따르면, "백제인 목귀(木貴)의 후예"라고 합니다.

그런데 모꾸마치는 475년까지는 가야지역에 남아 그 지역의 실질적인 권한을 행사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3) 그렇다면 모꾸마치 즉 소가노마치는 가야지역이 바로 자신의 영역이니 이 지역에 대한 집착이 유난히 강했을 가능성도 있겠지요. 그러나 이에 대한 기록은 찾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일본서기』를 보면 백제의 성왕과 일본의 킨메이 천황이 유난히 이 가야지역에 대한 강한 집착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다른 천황의 기록에서는 보기 어려운 대목입니다. 즉 가야지역 구체적으로 보면 임나 지역(금관가야 : 현재의 김해지역)에 대한 킨메이 천황과 성왕의 집착은 마치 동일인처럼 느껴집니다. 실제로 일본의 천황이 가야지역에 대해 이만큼 집착한 예는 잘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일부(일본)에서는 킨메이 천황이 임나 출신의 왕자가 아닌가 하는 말이 돌고 있는 형편입니다. 그렇다면 킨메이 천황이 소가씨의 혈통과 어떤 관계가 있을 수도 있겠군요.

6세기 당시의 가야지역은 여러 세력의 각축장이었습니다. 신라가 강성해지기 시작하자 정치관계가 더욱 복잡하게 된 것입니다.

4~5세기의 가야는 철생산이 풍부하여 여러 정치 세력들에 철을 공급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예를 들면 『삼국지』「변진(弁辰)」조에는 가야의 철이 한(韓), 예(穢), 낙랑(楽浪), 대방(帯方) 등에 까지 철을 공급된 내용이 기록되어있죠. 이것은 한편으로는 고구려, 신라, 부여(반도부여 및 열도부여) 등의 공격 대상이 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 과정에서 가야는 근초고왕의 정벌 이후 전통적으로 부여계(백제, 야마토)와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지만 5세기경 고구려가 신라를 강력하게 지원함에 따라 큰 타격을 받게되었고, 6세기 경에는 신라의 세력이 강성해짐에 따라 친신라계와 친부여계로 분열되어 가야 자체의 결속력이 매우 약화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결국 532년 법흥왕이 본가야(本伽倻: 金官國)를 병합하여 금관군(金官郡)을 설치하여 낙동강 유역을 확보하고 561년 신라 장군 이사부(異斯夫)가 대가야(大伽倻)를 평정함으로써 가야는 사실상 역사에서 사라집니다.

그리고 이와 맞물려 6세기 이후 『삼국사기』에 줄기차게 나타나 신라를 괴롭히던 왜(倭)가 사라져 버립니다. 즉 『삼국사기』에는 500년 이후 왜가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이 시기에 가야가 신라에 병합되었기 때문입니다. 한창 신라의 침공으로 정신이 없는데 웬 침략을 하겠습니까? 532년 금관가야가 신라에 병합되고, 554년 백제·가야 연합군이 관산성에서 신라에 대패한 이후 대부분 가야의 소국들은 신라에 투항합니다. 6세기 중반 대가야도 신라에 멸망당합니다(562). 즉 전기가야 연맹의 수장이었던 금관가야(현 김해 지역)는 532년에 멸망하고 후기가야연맹의 맹주였던 대가야는 562년 멸망한 것이지요.

앞서 말씀드렸지만 500년 이전의 신라를 줄기차게 공격한 왜(倭)는 일본(日本)이 아니라 경남해안 지방의 가야인 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통상 말하는 이 시대의 왜구(倭寇)는 일본이 아니라 한반도 남해안 지방에 광범위하게 거주하던 가야인들이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국제정세의 변화 즉 가야의 멸망에 가장 큰 타격을 입은 세력은 반도부여계입니다. 당시의 국제정세나 성왕의 심경을 알수 있는 기록이 있습니다. 『일본서기』에는 성왕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예로부터 신라는 무도하였고 식언(食言)을 하고 신의를 위반하여 탁순(卓淳)을 멸망시켰다. 옛날에는 (신라가) 우리에게 둘도 없는 충직한 나라[股肱之國]였으나 이제는 사이좋게 지내려 해도 오히려 후회하게 될 뿐이다."4)

당시 반도 부여(백제)는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고구려의 남하를 저지하고 잃었던 한강유역을 회복해야할 뿐만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는 가야지역(임나)을 반도부여의 영역으로 확실히 해두어야 하는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가야지역은 신라와 각축을 해야했고 한강유역의 회복은 신라와 힘을 합치지 않으면 안되는 매우 어려운 처지였던 것이지요. 이 상황에서 반도부여는 결국 두 지역을 모두 신라에 빼앗기게 되는 상황으로 몰리게 됩니다.

성왕의 숙부인 게이타이 천황은 527년(? : 게이타이 21년) 오미노게누노오미(近江毛野臣)를 대장으로 삼아 가야를 구원하기 위해 군대를 파병했지만 신라의 사주를 받은 이와이(磐井)의 반란으로 실패로 끝났다고 합니다. 이 시기에 반도와 열도의 역사에는 매우 중요한 두 가지 사건이 일어납니다. 하나는 게이타이 및 그의 직계 자손들이 멸족을 당했으며 다른 하나는 금관 가야(이른바 임나)의 김구해왕은 532년에 왕자 2명을 데리고 신라에 항복하고 있습니다(금관 가야의 멸망). 일부에서는 소가씨가 이 금관가야의 왕자 가운데 한 사람을 일본의 천황으로 옹립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지나친 말입니다. 왜냐하면 부여계의 직계혈통이 아닌 사람으로 천황을 옹립했을 경우 정통성의 시비는 물론이고 당시 소가씨가 이런 정치적 상황을 무시하면서까지 천황을 옹립할 정도로 권력을 독점하지는 않았던 상황입니다. 오히려 킨메이 천황과의 연합을 통해서 권력을 장악해가는 과정이 소가씨의 역사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소가씨는 킨메이 천황가와 겹겹이 혼인을 함으로써 '소가씨의 시대'를 열어간 것입니다.

제가 보기엔 킨메이 천황은 친소가씨(親蘇我氏) 계열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킨메이 천황이 과연 성왕인가 하는 문제는 좀 더 많은 분석을 필요로 합니다.

게이타이 천황의 직계 혈족들이 몰살당했고 이후 소가씨와 킨메이의 연합세력이 정권을 장악한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소가씨(임나)와 킨메이(야마토)를 이어주는 사람으로 성왕을 고려하지 않을 수가 없겠군요. 따라서 설령 킨메이 천황이 성왕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적어도 이 두 사람의 정치적 이데올로기나 지지기반은 서로 다르지 않다는 점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 세 사람 즉 성왕 ― 소가씨 ― 킨메이 천황을 연결하는 고리는 임나 즉 가야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마치 임나 삼총사와 같이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상의 분석을 토대로 다시 홍윤기 교수와 고바야시 교수가 제기한 '성왕 = 킨메이 천황' 이라는 문제로 다시 돌아갑시다. 우리는 이 분석을 통해 '성왕 = 킨메이 천황'라는 가설을 밝힐 수 없을지는 몰라도 열도 부여의 역사를 보다 심도있게 이해하는 계기는 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앞서 본 대로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는 성왕과 깊이 관련되어있고 이것이 성왕과 킨메이 천황이 동일하다는 하나의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 이 부분을 살펴봅시다.

임나일본부와 관련하여 특이한 점은 『일본서기』에서는 킨메이 천황조에 이른바 임나일본부 관련 기사들이 집중적으로 나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임나일본부는 이미 그 일부를 살펴보았고 그 동안 많은 논란이 있었던 사안이라 여기서 상세히 다룰 필요는 없지만 간략히 살펴보고 넘어갑시다.

임나일본부는 일본이 한일합방을 앞두고 강조하게 된 대표적인 정치적 사안이기도 합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4세기 후반에서 6세기 후반까지 약 2백여 년 동안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으며 그 지배기구로서 임나일본부라는 것을 두었다는 것이 골자인데 이것을 요약 정리한 사람은 서울의 경성제국대학 교수였던 스에마쯔 야스카즈(末松保和)였지요.

우케다 마사유키(請田正幸)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일본부는 유라쿠 천황조에 1건이 있기는 하지만 설화적 요소가 강하여 조작으로 의심이 되고 나머지는 킨메이 천황조에 집중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우케다마사유키 교수는 제25대 부레쯔 천황 이전에 나타나는 임나 관련 기사들은 신뢰하기 어렵다고 선언하였습니다.5)

그렇다면 킨메이 천황, 한반도로 말하면 성왕 때에 임나일본부가 설치되었고 성왕 이후에는 임나일본부가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기록상으로 임나문제에 관해 야마토 정권이 임나일본부에 직접적인 의사를 전달한 예는 전혀 발견되지 않고 다만 백제를 통해서 의사를 표시한 예는 4회나 확인이 됩니다. 『일본서기』킨메이 천황 4년 4월, 11월, 5년 2월, 11월 등입니다.6) 즉 임나일본부는 야마토의 직속기관이 아니라 백제의 직속기관이라는 말입니다. 또 이것은 성왕이 열도에 대해 많은 일본계 관료들을 보낸 문제와도 깊은 관련이 있는 듯합니다. 즉 이 시기에 백제 - 가야 - 열도의 효율적인 커뮤니케이션 체제(Communication System)가 제대로 구축되었다는 말입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관료들이 반도와 열도로 교환 근무하였을 것입니다.

『일본서기』에 임나일본부 문제가 가장 많이 나타나는 시기는 게이타이 천황 ― 킨메이 천황의 시기의 대략 50여년입니다. 그리고 이 기간 동안 일본은 중국과 사신을 교환한 흔적이 전혀 없으며 고구려와 신라에서 일본에 사신을 보내왔지만 일본은 전혀 반응을 하지 않았습니다.7) 즉 백제 - 가야 - 열도의 통치구조를 제대로 구축하려고 한 시기이기 때문에 대외적인 관심을 가질 여유가 있었을 리가 없습니다. 아마 성왕의 꿈은 백제 - 가야 - 일본을 연결하는 범부여 제국의 건설이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남부여였던 것이지요. 만약 가야가 신라나 고구려에 넘어가게 되면 남부여는 허리가 짤리는 형국입니다. 만약 백제와 야마토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하면 임나의 상실이 일본의 국가적인 과제가 될 수는 없는 일이지요.

그렇지만 신라의 입장에서도 성왕의 이러한 정치적 책동에 대하여 방치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가야 - 왜 지역이 백제와 강하게 결합된다면 신라는 북으로는 고구려라는 강력한 세력에 의해 큰 압력을 받아야 하고 남으로는 범부여 제국이라는 강력한 세력에 의해 식민지로 전락하는 운명만이 남아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신라는 두 가지의 국가 전략을 수립한 듯합니다. 신라의 한반도 남부 전략은 가야의 소국들을 멸망시켜 백제의 허리를 자르는 것이고, 한반도 북부 전략은 당과 연합하여 고구려를 견제하는 방향으로 틀을 잡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국가 전략의 한 가운데 김유신(金庾信)과 김춘추(金春秋)라는 인물이 있었던 것이지요.

『일본서기』킨메이 천황 23년 (562)에 "신라는 임나의 관가를 쳐 없앴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바로 이 해가 신라가 대가야를 병합한 해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기록이 또 있습니다. 신라가 가야를 빼앗았다는 『삼국사기』의 기록과는 달리 『송서(宋書)』에서는 신라가 백제로부터 가야를 빼앗았다고 되어있습니다.8) 다시 말하면 가야는 남부여(백제 : 반도부여)가 지배하는 영역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임나니 임나일본부니 하는 것도 결국은 백제의 지배영역에 속하는 기구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 동안의 연구에 따르면, 임나일본부가 외교교섭 창구의 역할로 굳어지고 있습니다. 요시노 마코트(吉野誠) 교수에 따르면, 임나일본부에 관한 기록은 『일본서기』 이외에 없으며, 8세기 초에 완성된 『일본서기』는 천황 통치의 정통화를 목적으로 한 책인데, 이 목적과 관련해서, 한반도 국가들이 원래 번국(蕃國)이었던 만큼 일본에 복속돼야 한다는 점, 천황이 한반도 국가들을 조공국으로 거느리는 존재라는 점 등을 보여주는 것이 주요한 주제였다는 것입니다.9) 다시 말해서 요시노 교수의 분석은 이 같은 천황국이라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많은 역사적 사실들이 이에 맞추어 변조되었고 임나일본부도 그 하나의 예라는 주장인데 타당한 분석입니다.

이와 같이 그 동안 논란이 극심했던 임나일본부 역시 만약 성왕이 킨메이 천황과 동일인이거나 천황과 백제왕계가 같은 계보라면, 상당한 일관성이 있게 됩니다. 즉 임나일본부는 백제의 직속기관이었고 가야 역시 백제의 지배영역(또는 백제가 가야 연합세력의 맹주역할)에 속하는 지역이었기 때문에 킨메이 … [관계 모호] … 성왕 → 임나일본부의 관계의 관계는 킨메이 천황과 성왕이 동일인일 가능성을 증가시킵니다. 쉽게 말해서 백제의 성왕 또는 킨메이 천황이 동일인이면, 이 분은 백제(반도부여 또는 남부여) - 가야(임나일본부) - 왜(열도부여)를 제대로 통치한 것이며, 백제 - 가야 - 열도의 효율적인 커뮤니케이션 체제(Communication System)를 제대로 구축한 임금이 되는 것이죠.

무엇보다도 임나에 대한 심정적인 태도가 성왕과 킨메이 천황이 거의 유사하다는 점을 지적해야 합니다. 킨메이 천황은 죽는 날까지 임나의 부흥을 꿈꾸었다고 합니다. 킨메이 천황 32년에 천황은 황태자의 손을 잡으며 "그대는 신라를 쳐서 임나를 세워라. 옛날처럼 두 나라가 친하면 죽어서도 한이 없을 것이다."라는 유언을 남기도 서거합니다. 그런데 이 말투가 성왕이 임나에 대해 말하는 부분과 거의 흡사합니다. 성왕의 임나에 대한 행한 많은 연설들이 『일본서기』에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몇 가지를 보시죠.

"과거 우리의 선조 근초고왕, 근구수왕께서 가야에 계신 여러분들과 처음으로 서로 사신을 보내고 이후 많은 답례들이 오고가 관계가 친밀해져서 마치 부자나 형제와 같은 관계를 맺었습니다."10)

"우리는 마치 형제처럼 가까우니 우리는 그대들을 아들이나 아우로 생각하니 그대들도 우리를 아버지나 형처럼 대하세요."11)

『일본서기』에는 킨메이 천황의 조서(詔書)를 가지고 성왕이 연설을 하는 장면들이 많이 연출됩니다만 이것은 오히려 조작된 사료라는 느낌을 줍니다. 왜냐하면 킨메이 천황이 『일본서기』의 기록대로 게이타이 천황의 아들이라면 이들은 사촌 간이고 서열상으로도 대등하고, 무령왕과 게이타이 천황의 관계를 본다면 오히려 성왕이 킨메이 천황보다도 서열이 더 높을텐데 마치 성왕이 황제의 명을 받은 신하처럼 행동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요시노 마코토(吉野誠) 교수의 지적처럼 『일본서기』가 정치적 목적으로 내용들을 많이 조작했다는 증거가 되는 부분입니다. 하나의 예를 들어 봅시다.

"성왕이 임나일본부에게 말했다. '천황(킨메이 천황 - 필자 주)이 조서를 내려 말씀하시기를 만일 임나가 멸망하면 그대(성왕 - 필자 주)는 거점이 없어질 것이고 임나가 흥하면 그대는 구원을 얻을 것이다. 지금 임나를 재건하여 옛날과 같게하여 그대를 도우며, 백성을 어루만지고 기르게 하라'고 하셨다. 나는(성왕 - 필자 주) 삼가 천황의 조칙(詔勅)을 받들어 송구한 마음으로 가슴이 벅차 정성을 다할 것을 맹세하고 임나가 융성하게 할 것을 기원하였다. 나는 옛날처럼 오래 천황을 섬길 것이다."12)

위의 말은 실은 성왕이 한 말로 추정됩니다. 왜 그럴까요? 무엇보다도 천황이라는 말이 이 시대에는 없었고 따라서 조서(詔書)나 조칙(詔勅)이라는 게 있을 리가 없지요. 『일본서기』에 헤아릴 수도 없이 나타나는 백제왕이 천황에게 올리는 표(表)라는 것도 있을 수가 없는 일이지요. 무령왕과 게이타이 천황과의 관계를 참고해보더라도, 백제 성왕의 서열과 킨메이 천황의 서열이 대등했거나 오히려 부여계 전체로 본다면 성왕의 서열이 더 높은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옛날처럼 오래 천황을 섬길 것이다"는 말도 앞뒤가 맞지 않지요. 지금까지 본대로 야마토를 실질적으로 개척한 사람은 근초고왕·근구수왕이고 유라쿠 천황이 곤지왕인데 언제 누가 어떤 천황을 섬긴다는 말입니까? 또 이 때까지도 열도의 통일도 제대로 되지 못했는데 누가 누구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겠습니까?

위에서 인용된 문장은 『일본서기』의 편찬자들의 작문 실력을 보여주는 많은 예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사관의 태도는 '술이부작(述而不作)'이거늘 『일본서기』의 편찬자들이 역사를 날조하는 수준이 스탈린 치하의 소련이나 북한(DPRK)의 주체사상 하의 한국사 편찬 수준과 다르지 않군요. 이것이 어떻게 역사가 됩니까? 그리고 왜 이런 사실을 고칠 생각도 하지 않고 국민들이 모두 믿게 만드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열도쥬신(일본)은 위험한 나라입니다. 지금이라도 이런 태도를 고쳐야 합니다. 반도쥬신(한국)은 소중화주의 근성에 빠져 역사를 왜곡·날조한다면, 열도쥬신은 소중화주의뿐만 아니라 유아독존식 사관으로 역사를 날조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들의 행태는 쥬신의 미래를 한없이 어둡게 하고 있습니다. 소중화주의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며 반도(한국)는 자기비하(自己卑下)에 빠져있고, 열도(일본)는 과대망상(誇大妄想)에 빠져있습니다.

『일본서기』에 나타나는 성왕의 그 많은 말들은 그저 남부여 제국으로서 백제(반도부여) - 가야(임나) - 일본(열도부여) 등이 하나의 공동운명체(共同運命體)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실제 기록들로 보면 타당합니다. 그리고 이 가야 지역이 매우 위기에 처해있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죠.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신라가 가야를 점령하지 못하게 하려는 성왕의 노력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기록입니다.

제가 보기엔 『일본서기』 킨메이 천황조에 있는 임나에 대한 수많은 연설들은 사실상 한 사람이 한 말로 추정됩니다. 만약 킨메이 천황과 성왕이 다른 인물이었다면 굳이 성왕의 입을 통해서 킨메이 천황의 말이 나올 이유가 없지요. 그저 사신이나 신하를 통해서 전달하거나 조정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그대로 기록하면 될 일입니다.

그러니까 킨메이 천황이 성왕과 같은 사람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말입니다.

필자 주

(2) 참고로 고대의 일본에서는 만주 쥬신들에게서 보이는 것처럼 씨와 성을 따로 사용한다. 예를 들면 아시끼다군 일라(葦北君日羅)라고 하면 葦北은 지명에서 따온 씨이고 君은 수장에서 전환된 성이고 日羅가 이름이다. 김현구 『백제는 일본의 기원인가』(창비 : 2007) 90쪽.
(3) 김현구, 앞의 책, 67쪽.
(4) 『日本書紀』欽明 5년 冬10月
(5) 請田正幸「6世紀前期の日韓關 - 任那日本府を中心として」『朝鮮史硏究會論文集 11』40쪽.
(6) 김현구 「6세기의 한일관계사」『한일역사 공동연구보고서 1』(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 2005) 387쪽.
(7) 김현구 『백제는 일본의 기원인가』(창비 : 2007) 55쪽.
(8) 김현구, 앞의 책, 76쪽.
(9) 요시노 마코트(吉野誠) 『동아시아속의 한일천년사』(책과함께 : 2005)
(10) 킨메이 천황 2년에 성왕이 가야 사람들에게 한 말. 원문은 "欽明 二年 夏四月 百濟聖明王謂任那旱岐等言…昔我先祖速古王貴首王之世 安羅加羅卓淳旱岐等 初遣使相 通厚結親好 以爲子弟"(『日本書紀』欽明天皇 2年 여름)
(11) "昔我先祖速古王貴首王與故旱岐等始約和親 式爲兄弟 於是 我以汝爲子弟 汝以我爲父兄"(『日本書紀』欽明天皇 2年 가을)
(12) 『日本書紀』欽明天皇 2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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