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는 작고하신 김용호시인이 《조선일보》1960년 4월 28일자 석간에 발표한 시입니다. 「해마다 4월이 오면」이란 이 시를 읽다보면 4월 혁명이 왜 일어났는지를 상세하게 알게 됩니다. 그리고 4월 혁명의 배경을 이야기하면서 직설적으로 쏟아 붓는 목소리가 오늘 우리가 처한 상황을 보면서 던지는 질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당시에는 참으로 많은 시인이 4.19에 대한 시를 썼습니다. 김춘수시인은 "죄없는 그대들은 가고 / 잔인한 달 4월에 / 이제야 들었다. 그대들 음성이 / 메아리 되어 / 겨레의 가슴에 징을 치는 것을,"(「이제야 들었다 그대들 음성을」)이라고 노래했고, 김남조 시인은 "마침내 총으로 겨냥하여 / 정의와 생명을 쏘고 // 조국의 기에 / 검은 손으로 피 묻히던 / 4월 19일"(「기적의 탑을」)이라고 안타까워하였으며, 황금찬 시인은 "4월의 정신은 강물이 되어 흘러 가는데 / 나는 이 강가에 설 털끝 같은 면목도 없구나"(「학도위령제에 부쳐」)하고 애도하였습니다.
박희진 시인은 "피로써 찾은 우리의 주권! / 그것을 다시 더렵혀 되겠는가. / 어떻게 세운 나라라고! / 오 뉘우쳐라 아직도 한방울 피와 눈물이 있다면 뉘우쳐라. 아니 차라리 혼비백산하라!"(「썩은 탐관오리들에게」) 이렇게 매섭게 질타하였습니다.
제가 지금 예를 들고 있는 시인들은 굳이 성향을 나눈다면 보수적인 시인으로 분류할 수 있는 분들이십니다. 이 무렵에는 신동엽, 신동문, 김수영 같은 진보적인 생각을 가진 시인들 말고 박목월, 박두진, 조지훈, 유치환, 정한모, 구상, 박남수, 장만영, 김현승, 이원수, 김요섭 등등 말하자면 거의 모든 시인이 4.19혁명에 대해 동참하는 시를 썼습니다. 심지어 초등학교 학생도 이런 시를 썼습니다.
"잊을 수 없는 4월 19일 / 학교에서 파하는 길에 / 총알은 날아오고 / 피는 길을 덮는데 / 외로이 남은 책가방 / 무겁기도 하더군요 / 나는 알아요, 우리는 알아요 / 엄마 아빠 아무말 안해도 / 오빠와 언니들이 / 왜 피를 흘렸는지......"
당시 서울 수송국민학교 4학년 강명희 어린이가 쓴 시「오빠와 언니는 왜 총에 맞았나요」입니다. 어린이들도 다 알고 있던 4.19혁명을 교육부에서는 데모로 격하시키고 이를 전국의 학교에 자료로 만들어 배포하여 왜곡된 역사교육을 시키려고 하는 걸 보면서 가슴이 막힙니다. 우리 역사를 4.19 이전의 역사 그러니까 이승만 독재와 부패와 민주주의가 질식당하던 시대로 후퇴시키려는 것이라고밖에 생각되지 않습니다. 이들의 역사인식이 50년 전의 낡고 구태의연한 상태에 머물러 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5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수많은 곡절과 변화와 역경을 겪으며 성장한 이 나라 민주주의 성숙도를 전혀 체감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조지훈 시인은 1960년 4월 27일 《경향신문》에「마침내 여기 이르지 않곤 끝나지 않을 줄 이미 알았다」라는 시에서 "그것은 피눈물의 꽃파도였다 / 보았는가 너희는 / 남대문에서 대한문으로 세종로로 경무대로 넘쳐 흐르는 그 파도를 / 이것은 의거 / 이것은 혁명 / 이것은 안으로 안으로만 닫았던 민족혼의 분노였다" 라고 말하셨습니다. 조지훈 선생이 살아계신다면 뒤늦게 4.19단체 사무실을 찾아 사과한다느니 하면서 대충 사태를 덮으려 하는 장관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 같습니다.
"불의한 권력에 붙어 / 백성의 목을 조른 자들아 / 불의한 폭력에 추세하여 / 그 권위를 과장하던 자들아 / 너희 피묻은 더러운 손을 / 이 거룩한 희생자에 대지 말라 (......) // 너희 죄 지은 자의 더러운 피를 수혈하지 말라 / 이대로 깨끗이 죽어갈지언정 / 썩은 피를 그 몸에 받고 살아나진 않으리라"(조지훈, 앞의 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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