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반도에서 열도로 : 헤게모니의 이전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반도에서 열도로 : 헤게모니의 이전

[김운회의 '새로 쓰는 한일고대사']<43> 안동장군 신라제군사 왜국왕 ③

(4) 반도에서 열도로 : 헤게모니의 이전

백제가 멸망(475)하자 열도부여는 반도부여(백제)의 재건에 총력을 다합니다. 그래서 이 시기를 전후하여 반도부여(백제)와 열도부여(왜)의 헤게모니가 서서히 교체되고 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문제는 반도부여에서 열도부여로 헤게모니가 넘어가는 이 시점의 중심인물에 일본 천황 가운데는 왜왕 무(武) 즉 유라쿠 천황이 있고 백제에서는 곤지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앞서 본대로 이 두 사람은 동일인이었습니다.

부여계의 헤게모니가 반도부여에서 열도부여로 이전된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가 바로 유라쿠 천황이 스스로를 고구려왕에 준하는 지위를 자칭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고구려와 적대적인 관계에서만 나올 수 있는 조치입니다. 뿐만 아니라 반도부여의 몰락에 즈음하여 새로운 고구려 대항세력임을 대내외적으로 천명한 것이기도 합니다. 나아가 이것은 왜왕의 작호가 대고구려전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군사적 전략이었다는 점에 대한 또 다른 증명이 됩니다. 이 점을 구체적으로 봅시다.

478년 왜왕 무(武) 즉 유라쿠 천황은 송나라에 사신을 통해 보낸 국서에 스스로를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라고 칭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삼사(三司)는 태위(太尉) ·사도(司徒) · 사공(司空) 등으로 삼공(三公)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이 관직은 중국에서는 황제를 제외하고는 국가의 대사를 관장하는 최고의 관직입니다. 그러니까 개부의동삼사란 이 삼공에 준하면서 부(府) 즉 관청을 열 수 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사카모토 요시타네(坂元義種) 교수에 따르면, 송나라를 기준으로 송나라 황제가 이 개부의동삼사를 인정해준 사람은 4명 뿐이었다고 합니다.14) 그 만큼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의미 있고 영향력이 있는 작호인 셈이죠. 『삼국사기』「장수왕」51년조(463년)에는 고구려의 장수왕이 송나라 세조로부터 정동대장군고려왕(征東大將軍高麗王)이라는 작호에서 거기대장군개부의동삼사(車騎大將軍開府儀同三司)로 격상됩니다.

그런데 왜왕 무(곤지왕)가 이 관직을 스스로 칭했다고 하는 것은 여러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말은 반도부여가 몰락했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만약 반도부여가 건재한 상황이라면 천년의 숙적에 대해 대등하게 라이벌 의식을 가진 이 용어를 사용할 수가 없는 것이죠. 그러니까 개로왕의 생전에는 사실상 고구려의 남침을 저지하는 중책을 총괄하는 사람이 개로왕이었는데, 개로왕 사후에는 이 중책을 맡을 사람이 바로 유라쿠 천황(곤지왕)이었던 것입니다. 고구려의 장수왕이 개동의부삼사라는 작호를 받은 것이 463년으로 이 시기는 고구려가 본격적으로 남하하는 시기입니다. 그리고 12년 후 개로왕은 피살(475)되고 이로부터 3년뒤에 유라쿠 천황은 장수왕과 대등한 작호를 스스로 칭하고 있습니다.

설령 유라쿠 천황(곤지왕)에게 있어서 '개동의부삼사'라는 작호는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든 안 받든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당면한 과제인 고구려의 남하에 대해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막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부여계의 총사령관으로서 유라쿠 천황은 스스로를 '개부의동삼사'로 부른 것으로 추정됩니다. 실제로 유라쿠 천황(곤지왕)은 458년 개로왕의 주선으로 송나라로부터 정로장군 좌현왕(征虜將軍左賢王)에 봉해집니다. 여기서 말하는 좌현왕이라는 말은 주로 쥬신계의 호칭으로 개로왕을 이은 제2인자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개로왕이 서거했으니 곤지왕은 개로왕의 권한과 책임 모두를 떠맡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지요.

지금까지 우리는 왜왕들의 작호문제를 중심으로 그 역사적 의미와 실체를 살펴보았습니다. 험난한 부여계의 역사가 어떤 경로를 통해서 열도부여로 이어지는 지를 충분히 알 수 있었습니다.


▲ [그림 ⑤] 곤지왕 신사(아스카베 신사)

[부록]

오사카에는 아스카베신사(飛鳥神社)가 있습니다. 927년 일본 황실이 제정한 『연희식(延喜式)』에 따르면 현재 오사카의 아스카베 신사는 일본 황실의 사당인데 이 사당은 원래 이름은 곤지왕신사(昆支王神社)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일본 제국주의 시대에 곤지왕신사는 아스카베신사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720년 경의 기록에 의하면, 곤지왕 신사의 제신은 아스카베미야쓰코(飛鳥戶造)인 백제숙이의 조상인 곤지왕이라고 합니다.15)

참고로 일본 군국주의 시대에는 이렇게 한일동족론에 관한 많은 사실들을 숨기기에 바빴습니다. 일본은 본가, 한국은 분가(分家)라는 사실에 위배되는 어떤 것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다시 몇 가지를 상기해보고 지나갑시다.

앞서 본대로 14세기의 키타바타케 치카후사(北畠親房 : 1293~1354)는 자신의 저서인 『신황정통기(新皇正統記)』에서 "옛날 일본은 삼한(三韓)과 같은 종족이라고 전해왔다. 그런데 그와 관련된 책들이 칸무 천황(桓武天皇 : 재위 781~806) 때 모두 불태워졌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일본후기(日本後記)』에 따르면, 헤이죠(平城) 천황 대동(大同) 4년(809년)에는 일본과 삼한이 같은 종족이라는 서적을 관청에 바치라는 포고령을 내리고 "만약 이를 감추는 자가 발견된다면, 엄벌에 처한다."라는 칙령을 내렸다고 합니다.16) 18세기 에도시대의 저명한 고증학자인 도데이칸(藤貞幹 : 1732~1797)은 일본인들의 대부분은 백제인에 의해 조직되었다고 단정합니다.17)

그리고 제국주의 시대 당시 1915년 6월 29일 일본정부는 치안상의 이유로 김해(金海) 김씨(金氏)의 족보(族譜) 발행을 금지합니다. 당시 김해 김씨의 족보에는 김씨의 시조인 수로왕의 왕자들 가운데 7명이 구름을 타고 가야를 떠나 일본으로 간 것으로 나타나있습니다. 앞서 본대로 일본에서는 그들의 조상신이 다까마노하라[고천원(高天原)]에서 다카치호노미네[고천수봉(高千穗峰)]로 내려왔다고 믿고 있는데 이 지역은 규슈 남부지역을 말하고 있죠. 이 지방 일대에는 일본 궁내청에서 직접 관할하는 신사들이 많다는 것이죠.18)

필자 주

(14) 坂元義種『ゼミナ―ル日本古代史(下)』(光文社 : 1980) 385∼387쪽.
(15) 『延喜式』「神祇志料」(927)
(16) 『日本後記』券17 平城天皇 大同 4年 2月5日
(17) 藤貞幹 『衝口發』
(18) 朴炳植『韓國上古史』(敎保文庫 : 1994) 206쪽.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