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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계 내부의 권력투쟁

[김운회의 '새로 쓰는 한일고대사']<42> 안동장군 신라제군사 왜국왕 ②

(2) 헤게모니 쟁탈전 : 부여계 내부의 권력투쟁

『송서』「왜국전」에 나타난 왜왕의 작호는 마치 한반도 남부 지역이 왜왕의 지배영역처럼 묘사되어있습니다. 이 기록으로 살판이 난 것은 일본의 정치가들과 학자들입니다. 즉 『송서』「왜국전」에 나타난 왜왕의 작호는 왜왕이 일본열도를 포함하여 한반도 남부 일대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고 있다는 것을 제시하는 듯 보여서 일본 쪽에서는 이것을 한반도 남부의 지배권을 보증하는 수표처럼 인식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에 대하여 한국 측에서는 이 작호가 이미 멸망한 나라에 대한 지배권도 포함되어있어 자의적인 것으로 자칭하여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입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엔 이 두 견해는 모두 틀렸습니다. 왜왕실과 백제 왕실 자체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상황에서 그 변화나 추이를 감안하지 못한 분석들입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왜왕 작호 문제는 부여계 내부의 권력투쟁의 과정에서 나타난 일시적인 현상이거나, 아니면 對고구려전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한 하나의 군사적 전략으로 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 현상 즉 왜왕의 작호 요구는 곤지왕의 도일(渡日) 및 천황 즉위로 인하여 정리되어 버립니다. 이후 그 같은 문제가 정치적 이슈가 된 일은 없습니다. 이 시기 이후 일본은 이전보다 더욱 강성해지는데 만약 그러하다면 더욱 더 많은 관작의 요구가 있어야할 터인데 그런 모습들은 볼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열도는 더욱더 독립적으로 움직이면서 수나라가 건국될 시기에는 중국의 황제와 대등하다는 의식을 가지게 됩니다.

저는 지금까지 열도(일본)와 반도는 부여계이며 이들이 담로제도를 바탕으로 부여계의 정체성을 유지했을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특히 담로제도는 부여계의 확장과 정체성의 유지에는 매우 유리하다는 점을 충분히 말씀드렸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대륙 부여의 세력이 한강유역의 초기 부여세력과 합류하였고 이들 세력이 열도부여를 건설한 것이며 그 헤게모니가 개로왕의 서거(475)를 기점으로 반도에서 열도로 서서히 이전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중심에는 곤지왕(유라쿠 천황)이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열도와 반도의 부여계의 대립과 갈등이 고조되었고 그 결과로 나타난 현상들 가운데 하나가 왜왕의 작호라는 것입니다. 이 같은 사태의 근본적인 원인은 고구려의 남하에 대하여 반도부여(백제)가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했고, 갈수록 그 세력이 약화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00년 광개토대왕의 한반도 남부 침공이 있은 후, 413년 즉위한 장수왕은 한술 더 떠서 평양천도(427)를 단행합니다. 이후 4세기 중반 이후에는 고구려와 백제사이에는 극심한 전쟁과 갈등이 일어나고 이에 대응하던 반도부여는 국력의 한계 상황에 봉착하게 됩니다. 반도에서는 열도의 지원이 절대적인 상황에서 주도권 싸움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아니면 고구려의 거센 남침에 대한 무언가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그렇게 해온 것처럼, 열도는 반도의 헤게모니를 장악하려했을 수가 있습니다. 마치 반도부여계가 만주부여계를 떠나서 새롭게 부여로 거듭나듯이, 열도부여계들은 반도부여계의 멸망(475)을 기점으로 하여 다시 태어난다는 입장이었을 것입니다.

다만 이 주도권(헤게모니) 싸움은 단순히 주도권 쟁탈전이라는 것 이상으로 부여계의 정체성 유지라는 보다 숭고한 의미가 담겨있다고 봐야합니다. 즉 헤게모니 쟁탈전은 담로제를 기반으로 하는 부여계의 자가분열 과정에서 나타날 수밖에 없는 현상이지만, 보다 큰 의미에서 부여계의 생존을 위해 불가피한 것이기도 합니다. 나아가 천년의 숙적이자 강적인 고구려의 남침을 효과적으로 방어하려는 부여계의 전략으로 파악할 수도 있습니다(이 점에 대해서는 앞으로 상세히 분석합니다).

따라서 이제부터 왜왕 작호에 대한 분석을 두 가지 가능성을 열어두면서 살펴보도록 합시다. 하나는 부여계 내부의 헤게모니 쟁탈전이라는 관점과 또 다른 하나는 부여계 정체성의 유지를 위한 대고구려전 군사전략(전시군사통수권)이라는 측면입니다.

먼저 왜왕 작호 문제가 왜 결국은 반도부여와 열도부여 사이의 헤게모니 쟁탈전이 될 수도 있다고 하는 지를 살펴봅시다.

첫째, 5세기에는 왜왕(열도부여)과 백제왕(반도부여)이 서로 경쟁적으로 작호의 승인을 송나라에 요청을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과정을 한번 보시죠.

417년 백제(전지왕)는 동진의 안제(安帝)로부터 '사지절·도독백제제군사·진동장군·백제왕'으로는 작호를 받았고, 420년 백제는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 '진동대장군(鎭東大將軍)'의 작호를 받습니다.11) 그러자 421년 왜왕 찬(讚)이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고 벼슬을 제수받자, 431년 백제는 사신을 보내 선왕(전지왕)의 작호를 받습니다. 438년 왜왕 진(珍)은 '사지절·도독왜백제신라임나진한모한 6국제군사·안동대장군·왜국왕'의 작호를 송나라에 요구하자 송은 '안동장군(安東將軍)·왜국왕(倭國王)'만 인정해줍니다. 451년 송나라는 왜국왕에 대하여 '사지절·도독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6국제군사·안동장군' 라는 작호를 내려줍니다.

이와 같이 5세기초의 반도부여(백제)와 열도부여(야마토)는 마치 경쟁을 하듯이 작호의 승인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이 시기는 반도부여가 극심한 국가적인 위기에 처한 상황입니다. 마치 건달[유맹(流氓)] 사회에서 건달의 두목이 외부의 다른 건달 세력에게 크게 당하면, 이 건달 세력의 내부에는 극심한 동요가 일어나서 새로이 두목이 되려고 하는 사람들이 나타나는 것과도 같은 이치입니다.

둘째, 왜왕은 실제적이고 노골적으로 백제의 영역에 대해 지배권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반도부여의 멸망을 대비한 포석인 점도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송서』에 따르면, 왜 5왕 가운데 왜왕 찬(讚)이 영초 2년(421)에 사신을 보내어 벼슬(구체적 내용은 없음)을 제수받았고, 원가 2년(425)에 사절을 보내어 토산물 등을 보냈습니다. 왜왕 진(珍)은 438년 '사지절·도독왜백제신라임나진한모한 6국제군사·안동대장군·왜국왕'의 작호를 송나라에 요구합니다. 이에 대하여 송나라 황제는 안동장군(安東將軍)·왜국왕(倭國王)만 인정해 줍니다.12) 이 같은 송나라의 행태를 보면 백제가 건재한 상태에서 백제 땅을 요구하고 있는 점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고 봐야 합니다.

바로 이전에 『삼국사기』「백제본기」에 따르면, 전지왕(405~420)은 417년 동진의 안제(安帝)로부터 사지절·도독백제제군사·진동장군·백제왕'으로는 작호를 받았고, 이 작호를 비유왕(427~455)이 431년경 사신을 보내 받았다고 합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특이하게도 왜왕 진(珍)은 백제왕(비유왕)이 건재하고 송나라와의 관계가 긴밀한데도 백제의 군사에 대한 지배권을 요구하고 있는 셈이 됩니다. 열도와 반도(백제)지역이 부여계라는 점을 감안해 본다면, 이것은 열도와 반도사이의 헤게모니 문제가 대두한 것으로 봐야할 것도 같군요.

특히 이 시기는 백제의 비유왕 시기입니다. 개로왕의 국서로 판단해 보건데, 고구려와의 갈등이 극심한 상황이기도 합니다. 이 시기의 『삼국사기』의 기록은 대부분 부정적인 내용으로 가득합니다. 비유왕의 시기는 지진, 태풍, 극심한 가뭄, 이상기온, 흉년, 기근 등의 내용으로 가득하더니 결국 "흑룡이 한강에 나타나 안개가 자욱하더니" 왕이 돌아갑니다.

여기서 또 다른 이상한 점이 발견됩니다. 왜왕 찬(讚)의 기간 동안 반도부여(백제)의 왕은 구이신왕(420~427)인데 『삼국사기』에는 구이신왕의 행적이 완전히 없습니다. 이것은 지금까지의 분석들을 토대로 본다면, 구이신왕의 행적을 누군가가 다른 곳 즉 『일본서기』의 기록에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마치 『삼국사기』에서 사라진 근초고왕의 행적이 『일본서기』에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송서』에는 구이신왕이 영초 원년 즉 420년에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 '진동대장군(鎭東大將軍)'의 작호를 받았다고 합니다.13) 이 작호는 한(漢)나라의 사례를 본다면 안동장군(安東將軍)보다는 높은 지위입니다. 그리고 이 시기는 왜왕 찬(讚)이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고 벼슬을 제수받는 때(421)의 바로 1년전의 일입니다. 그리고 원가 2년(425)부터 백제는 해마다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바쳤습니다.

결국 비유왕이 431년 선왕의 작호를 받으러 사신을 보낸 문제도 부여계 내부에서 열도와 반도 사이에 갈등이 있었기 때문으로 추정할 수도 있죠. 즉 반도부여(백제)가 고구려의 남하로 인하여 지속적으로 흔들리고 있기 때문에, 열도에서는 반도의 상황을 회의적으로 보면서 반도부여는 고구려의 침공을 버틸 수 없을 것으로 파악한 듯도 합니다.

이상으로 왜왕의 작호문제를 헤게모니 쟁탈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보았지만, 그래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왜왕의 작호에는 "임나진한모한" 등의 말이 있는데, 이것은 다른 작호의 경우와는 달리 지나치게 시시콜콜하게 일일이 지역 전체를 지칭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특히 제군사(諸軍事)라고 하여 군사적인 동원권을 유난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신라에 대한 지배권도 없는 왜왕이 나제동맹(433) 이후에는 신라까지도 군사지배권에 포함시켜달라고 요구합니다. 참으로 이해하기가 어렵군요.

따라서 왜왕 작호의 문제는 부여의 헤게모니 쟁탈전으로만 파악하기에는 많은 다른 문제들이 다시 나타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본다면 왜왕 작호 문제를 부여계의 헤게모니 쟁탈전으로만 설명하기에는 크게 부족합니다.

(3) 부여의 대고구려전 군사전략 : 전시군사통수권

그러면 이제 왜왕 작호 문제를 해명하기 위해 좀 다른 시각에서 살펴봅시다. 제가 보기엔, 왜왕의 작호문제가 이 헤게모니 쟁탈전을 넘어서 만약 반도부여가 멸망할 경우 즉각 해당 지역의 맹주로서의 권한을 기득권화하고 재생시킬 수 있는 국제적인 인정 과정의 하나로 볼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즉 왜왕이 백제왕의 친족관계로 백제왕이 멸망하면 그 지역은 결국은 부여계의 땅이라는 논리로 작호를 요구한 측면도 분명히 있다는 말입니다.

생각해봅시다. 왜왕의 작호에는 특이하게도 두 가지 점이 포착됩니다. 하나는 왜왕은 백제왕보다도 높은 작호를 요구하지 않았다는 점, 또 다른 하나는 특이하게도 신라임나진한모한 등의 백제가 지배한 영역들을 포함하는데 이것은 백제왕이 요구한 작호에는 없는 내용입니다.

이것은 왜왕이 요즘으로 치면 일종의 전시(戰時) 부통령 개념으로 왜국을 통치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백제의 대통령(백제왕)이 죽게되면 그 대통령의 통치영역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일본에 있는 부통령(왜왕)이 전시 군사통수권을 받아서 한반도내에서 고구려에 대항하는 전쟁을 치루어야 합니다. 그런데 일본은 섬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상태이므로 왜왕이 이 기득권을 확실히 요구해두지 않으면, 한반도 남부의 백제(반도부여) 지배영역은 영원히 부여[왜왕(열도)]와는 상관없는 지역이 될 가능성이 크지게 됩니다.

쉽게 말해서 그 동안 백제왕은 이 지역의 맹주로서 임나진한모한 등의 지역에 대한 군사적 동원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만약 백제왕이 사거(死去)할 경우, 당장 왜왕은 고구려의 남하를 막는 전쟁을 치르야 하는데 임나진한모한 등의 지역의 지배자들이 왜왕의 명령을 제대로 따를 리가 없는 것이죠.

다시말해서 백제왕이 이 지역에 대한 군사적 관할권을 요구하지 않았던 것은 이미 이 지역을 군사적으로 지배할 수 있었던 상황이므로 굳이 그 부분에 대한 지배권을 요구할 필요가 없었겠지요. 그런데 만약 백제왕이 죽게되면, 이 지역에 대한 맹주로서의 권한을 왜왕이 제대로 이양받을 수가 없게됩니다. 따라서 왜왕들은 이 지역에 대한 맹주권을 어떤 형태로든 간에 명시해두거나 국제적으로 승인받지 않으면 안되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나제동맹(433)이 있은 이후에는 신라를 이에 포함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백제와 왜의 경쟁적인 작호 요구의 과정은 부여계 내부의 헤게모니 경쟁이 아닐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짧게는 3~4년, 길게는 5~10년을 주기로 백제왕들과 왜왕들은 작호를 받아두려합니다. 이것은 결국 대고구려전을 보다 원활히 수행할 수 있게하는 범부여계의 국제전략으로 봐야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왜왕의 국서에는 고구려에 대한 극심한 분노가 표출되어있으며, 반도부여가 재건된 이후에는 이 같은 작호문제가 다시 발생하지 않는 것이죠.

필자 주

(11) 『宋書』「武帝紀」 및 「百濟傳」
(12) "讚死, 弟珍立, 遣使貢獻. 自稱使持節、都督倭百濟新羅任那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國王. 表求除正, 詔除安東將軍、倭國王." (『宋書』「倭國傳」)
(13) 『宋書』「武帝紀」 및 「百濟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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