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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대장군 왜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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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대장군 왜국왕

[김운회의 '새로 쓰는 한일고대사']<41> 안동장군 신라제군사 왜국왕 ①

제 14 장. 안동장군 신라제군사 왜국왕

들어가는 글

다음은『북사(北史)』「열전(列傳)」에 나오는 왜국(倭國)의 주요 내용들입니다. 여기에서는 백제와 신라가 일본을 큰 나라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 있습니다.

"왜국은 백제와 신라의 동남쪽에 있다. … 그 땅의 형세는 동쪽이 높고, 서쪽은 낮다. 야마퇴(邪摩堆)에서 살고 있으며 이 야마퇴를 『위지(魏志)』에서는 야마타이(邪馬臺)라고 한다. … 풍속은 문신을 하는데, 스스로 태백(太伯)의 후예라 한다. … 호수는 거의 십만에 달한다. 이 나라의 풍속에서는 살인하거나 강도·강간을 범한 사람들을 모두 죽였다. … 백성들은 편안하고 말이 없는 편이어서 다툼과 송사가 적고 도적이 적다. … 문자는 없어 나무에 줄을 맺어 새긴다. 불법을 숭상하여 백제에서 불경을 구하니 이것이 문자의 시작이다.

점치는 것을 알아서 무당과 박수를 더욱 믿는다. … 여자가 많은 편이고 남자가 적어 결혼은 같은 성끼리는 못하게 한다. … 사람이 죽으면 죽은 자는 관과 곽에 넣고 가까운 사람들은 관 가까이에서 노래하거나 춤을 춘다. … 진귀한 구슬이 나오는데, 그 색이 청색이고 큰 것은 학의 알만하고, 밤에도 곧 빛이 있으니, 이것을 마치 물고기의 눈이라고 하였다. 신라와 백제는 모두 왜를 대국이라고 생각하는데 왜에는 진귀한 물건이 많아 이것들을 중시하여 늘 사신들이 왕래하여 서로 통하였다(新羅·百濟皆以倭爲大國 多珍物 仰之 恒通使往來).

한나라 광무제 때에 사신을 보내어 입조하고 스스로 대부라 칭하였다. 안제 때에 또 조공을 받치고 왜노국(倭奴國)이라 하였다. 한나라 영제 광화 중에 나라에 분란이 있어 왕이 없었다. 히미코라는 여자가 있어 귀신도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나라사람들이 그녀를 왕으로 추대했다. … 위나라 정시 때 히미코가 죽자 남자왕이 다스렸으나 분란이 심해 히미코의 딸을 왕으로 세웠다. 그 후 다시 남자 왕들이 들어섰고, 이들은 중국에서 작위를 받았다."

(1) 안동대장군 왜국왕

일본고대사의 가장 큰 쟁점 가운데 하나가 이른바 왜 5왕이라고 했습니다. 왜 5왕이란 『송서』「왜국전」에 나타난 찬(讚), 진(珍), 제(濟), 흥(興), 무(武)라는 휘(이름)를 가진 다섯 사람의 왜왕(倭王)들을 말합니다. 저는 지금까지 이 왜왕에 대해서 많은 분석들을 하여 이제는 이 왜 5왕의 실체에 대해서 여러분들도 잘 이해하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왜왕들의 행적과 작호(爵號)로 인하여 한국과 일본 양국의 사학자들이 기나긴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내용은 이러합니다.

『송서』「왜국전」에는 왜의 5왕이 송나라 황제에게 작호를 요구하고 이에 대하여 송나라 황제는 그 작호를 승인 또는 거절하는 대목들이 나옵니다. 앞서 본대로 438년 왜왕 진(珍)은 '사지절·도독왜백제신라임나진한모한 6국제군사·안동대장군·왜국왕'의 작호를 송나라에 요구하자 송나라 황제는 안동장군(安東將軍)·왜국왕(倭國王)만 인정해줍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왜 왜왕(倭王)이 신라, 백제는 물론이고 이미 없어진 진한과 모한 등의 지배권도 요구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 동안 이 부분에 대한 논쟁이나 연구는 충분히 있었습니다. 따라서 제가 여기서 새삼스럽게 이 과정들을 하나씩 다 분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그 동안의 연구들은 한국과 일본 모두 "철저히 자국 이해의 관점"에서 논의되어왔기 때문에 이제는 좀 더 다른 각도에서 한번 살펴봐야 합니다.

먼저 그 동안의 경과에 대해 살펴봅시다.

400년 : 광개토대왕(영락대제) 한반도 남부 침공.
413년 : 장수왕 즉위.
417년 : 백제(전지왕)는 동진의 안제(安帝)로부터 '사지절·도독백제제군사·진동장군·백제왕'으로는 작호를 받음.
420년 : 백제는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 '진동대장군(鎭東大將軍)'의 작호를 받음.
421년 : 왜왕 찬(讚)이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고 벼슬을 제수받음(히미코 이후 최초의 남자 왜왕에 대한 기록).
427년 : 장수왕 평양천도.
431년 : 백제는 사신을 보내 선왕(전지왕)의 작호를 받음.
433년 : 나제동맹 성립.
438년 : 왜왕 진(珍)은 '사지절·도독왜백제신라임나진한모한 6국제군사·안동대장군·왜국왕'의 작호를 송나라에 요구하자 송은 '안동장군(安東將軍)·왜국왕(倭國王)'만 인정.
450년 : 고구려 장군 실직(현재 삼척)에서 피살.
451년 : 송나라는 왜국왕에 대하여 '사지절·도독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6국제군사·안동장군' 라는 작호를 내려줌.
461년 : 곤지왕 일본으로 감.
464년 : 고구려의 신라주둔군 (신라군에 의해) 100명 피살.
472년 : 개로왕 북위에 국서를 보내 고구려에 대한 응징을 호소하지만 실패.
북위는 고구려에게 이를 통보. 장수왕은 공격 준비.
475년 : 백제 멸망(이른 바, 한성백제의 멸망).
478년 : 왜왕 무(武)가 보낸 국서에서 왜왕 무(武)는 '사지절·도독왜백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 7국 제군사·안동대장군·왜국왕'으로 자칭.

이 같은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하여 열도(일본)에서는 한반도 남부에 대한 지배권을 열도의 왜왕들이 확실히 가지고 있었다는 입장입니다.

열도 사학계의 입장을 간략히 살펴봅시다. 사카모토 요시타네(坂元義種) 교수는 왜왕은 4∼5세기에 중국의 남조로부터 책봉을 받았으며, 신라나 백제로부터 인질들이 왜국으로 온 것으로 보아 왜국과 백제·신라는 상하복종관계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시대의 작호로 판단해 보건데 왜왕은 한반도 남부지역을 군사적으로 압도한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합니다.1) 히라노 쿠니오(平野邦雄) 교수는 야마토의 일본열도의 통일은 5세기 후반이며, 왕권이 강화되고 발전된 것도 5세기 말이라고 하고 그 이전의 남부 조선지역에로의 병력을 파견하다는 것은 불가능하지만2), 왜왕 제(濟)의 451년의 작호는 신라와 임나·가라는 왜의 군사영역에 편입된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합니다.3) 야마오 유키하사(山尾幸久) 교수는 왕권은 닌도쿠 천황 시대에 시작되었고, 유라쿠 천황 시대에 확립되었으며4), 5세기에 열도는 통일되었다고 하면서5), 왜왕의 작호에 나타나는 가라, 모한 등은 한반도 남부 해당 지역에 있어서 징병하여 전쟁에 동원할 수 있는 정도의 군사적 지배권을 의미한다고 주장합니다.6) 스즈끼 히데오(鈴木英夫) 교수는 왜왕 무의 상표문(국서)을 토대로 보면, 동으로는 간토(關東), 서로는 규슈, 북[海北]으로는 한반도까지 그 지배권을 가졌다고 주장합니다.7) 카사이 와진(笠井倭人) 교수는 왜5왕이 송나라에 대해 강력하게 작호를 요구한 것은 한반도 남부 지역 내의 기득권을 국제적으로 공인받으려 하였다고 주장합니다.8)

이에 대하여 반도 사학계는 이 전체를 부정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① 작호(爵號)는 대개 요청하는 측이 원하는 대로 주는 경향이 강한 점, ② 모한, 진한 등 이미 없어진 나라에 대해서 지배권을 요청한 점, ③ 신라는 왜의 영역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고 또 신라가 왜의 지배를 받은 적도 없는데도 지배권을 요구한 점, ④ 작호의 책봉은 보다 정치적인 요소가 강한 점 등을 들어서 큰 의미를 두고 있지 않습니다. 특히 연민수 교수는 왜왕의 장군호인 안동대장군이 백제왕의 그것(진동대장군)보다 서열이 낮으면서 한반도 남부를 군사적으로 지배한다는 것은 의문이라고 합니다.9) 최재석 교수는 5세기의 왜국이라는 것은 쓰시마(對馬島)를 포함한 규슈지역에 불과한 상태이기 때문에 왜왕들의 작호라는 것은 형식적인데 불과할 뿐이고 오히려 백제가 일본에 일종의 경영팀을 파견하여 일본을 다스렸다고 주장합니다.10)

그러나 냉정하게 보자면, 작호는 그것을 요구하는 사람이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국제정치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모한·진한 등도 이미 없어진 나라가 아니라 그 지역을 지칭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즉 한국인들을 통칭하여 아직도 조선, 고려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습니까? 신라는 왜의 영역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고 지배를 받지도 않았다는 문제도 그리 간단하게 대답할 문제는 아닙니다.

이와 같이 하나의 기록에 대하여 두 나라의 입장이 완전히 다릅니다. 그러나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열도(일본)는 끊임없이 한반도의 일부에 대한 종주권을 주장하고 있고 이것은 장기적으로 한반도를 지배하려는 의도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마치 중국이 지속적으로 한반도는 중국의 영역인 것처럼 주장하면서 동북공정을 강행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일본은 독도도 일본의 영토라고 하고 중국은 제주도 남쪽의 수중암초(이어도)까지도 중국땅이라고 합니다.

저는 같은 쥬신의 나라이면 형제의 나라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개별적인 불필요한 민족주의는 가지고 있진 않습니다. 다만 현재 자신의 영역을 지켜내면서 쥬신으로서의 공통성과 정체성을 바탕으로 국제협력을 도모하여 어려운 난국에 대처하여 쥬신이 사멸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임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독도 문제나 이어도 문제는 심합니다.

지도책을 꺼내놓고 한번 보세요. 울릉도에 연해있고 열도와는 1천리도 더 떨어진 곳이 어떻게 일본의 영토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한국이 제주도 가까이 있는 수중암초 위에 해양기지를 만들어 놓으니 이제는 중국이 자기의 땅이라고 주장합니다. 이것이 국제 정치 현실입니다. 제가 생각할 때는 적어도 같은 쥬신들만큼은 국제정치에 서로 협력해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사안들에 대해 공동대처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것만이 쥬신의 사멸을 막을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앵글로 색슨들은 이 점에 있어서 하나의 이상적인 모델일 수가 있습니다.

다시 이제 본론으로 돌아갑시다. 왜 열도의 제왕들은 한반도에 대한 군사적 지배권을 가진 작호들을 요구했을까요? 이 문제들을 지금까지와는 다른 측면에서 심층적으로 분석해보도록 합시다.

필자 주

(1) 坂元義種『古代東亞細亞の日本と朝鮮』(吉川弘文館 : 1978) 202∼203쪽, 354쪽.
(2) 平野邦雄 『大化前代政治過程の硏究』(1980) 43쪽.
(3) 平野邦雄 「金石文の史實と倭五王の通交」『岩波講座 日本歷史』(1980) 254∼256쪽.
(4) 山尾幸久「日本古代王權の形成と日朝關係」『古代の日朝關係』(塙書房 : 1898)
(5) 山尾幸久 『日本國家の形成』(1977) 머리말.
(6) 山尾幸久 「日本古代王權の形成と日朝關係」『古代の日朝關係』(塙書房 : 1989) 221∼223쪽.
(7) 鈴木英夫 『古代の倭國と朝鮮諸國』(靑木書店 : 1996) 93쪽, 160쪽.
(8) 笠井倭人 『古代の日朝關係と日本書紀』(吉川弘文館 : 2000) 312∼313쪽.
(9) 연민수 『고대한일관계사연구』(혜안 : 1998) 121∼130쪽.
(10) 최재석 「中國史書에 나타난 5세기 '왜5왕'기사에 대하여」『아세아연구 』102호(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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