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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도로 간 곤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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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도로 간 곤지왕

[김운회의 '새로 쓰는 한일고대사'] 〈34〉 의문의 고리, 곤지왕 ③

(2) 열도로 간 곤지왕 : 흑룡이 곰고을에 날고

백제의 가수리왕(개로왕)이 곤지 왕자에게 명하여 자신의 임신한 아내와 결혼을 시켜 일본으로 가게 하였습니다. 이 일은 반도부여사(백제사) 전체를 통해 보더라도 다른 시기에는 나타나지 않는 황당한 사건입니다. 하지만 이 사건을 시각을 넓혀 좀 다르게 생각해보면, 그 만큼 반도부여가 위태로왔음을 의미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 동안 곤지왕이 일본으로 간 이유에 대해서 반도 사학계에서는 몇 가지 분석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일본서기』를 근거로 하여12) 왜국에 고구려에 대항할 군대를 청하기 위해 온 청병사(請兵使)라는 견해가 오랫동안 제기되었습니다. 다음으로는 왜국에 정착한 백제 유민들을 관리하기 위하여 일본으로 갔다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엔 청병사라는 것은 다소 지나친 분석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이 당시 열도에서 고구려를 대항할 목적으로 군대를 보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당시 열도에서는 군대를 보낼 주체인 야마토 왕권이 열도 전체에 동원령을 내릴 수 있는 정도의 강력한 지배체제를 구축하지 못한 상태라는 점입니다. 앞서 본대로 이노우에 미쓰사다(井上光貞) 교수는 5세기를 야마토 조정의 구성기로 보고 있고 히라노쿠니오(平野邦雄) 교수는 야마토 왜의 일본열도의 통일은 5세기 후반이며, 왕권이 강화되고 발전된 것도 5세기 말 즉 왜왕 무(武) 다시 말해서 유라쿠 천황시대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니까 6세기 초반이나 되어야 야마토 왕조가 숨을 돌릴 만한 상황이라는 것이지요. 따라서 열도에서 군대를 제대로 파견할 정도가 되려면 6세기 이후에나 (그것도 매우 어렵지만) 가능할 수도 있는 정도의 일이라는 말입니다.

둘째, 당시의 항해술로는 야마토 지역에서 바로 한강 유역까지 고구려에 대항할만한 군대를 파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고구려에 대항할 정도의 병력이라면 아무리 적어도 1만여 명을 동원해야할 상황입니다. 반도부여의 2차 멸망기에 있었던 백촌강 전투(663)를 제외하고는 이 정도의 병력이 이동한 어떤 기록도 없기 때문입니다. 거리도 문제지만 수백 척(또는 1천 척 이상의)의 군선(軍船)을 동원해야하는 문제도 해결하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야마토 지역에서 출발하여 시코쿠를 거쳐 북규슈를 지나 한반도 남해안을 따라 긴 거리를 이동하여 한강유역에 이르는 항로가 고대에서 많은 병력들이 일시적으로 이동하기에는 너무 먼 거리입니다.
▲ [그림 ③] 군대이동 관련 지도

셋째, 설령 열도(일본)의 군대가 야마토 - 시코쿠 - 규슈 - 한반도 남부를 거쳐 육로(陸路)로 이동하여 한강유역까지 도달할 경우에는 수많은 산맥과 소국들을 거쳐 가야하는 상황이므로 병참선(兵站線)이 너무 길어지기 때문에 고구려의 남하를 저지할 정도의 군대의 이동은 불가능하다는 말입니다.

히라노 쿠니오교수는 "야마토 왜가 상당한 정도의 통일국가로 성장한 것은 5세기 후반 이후이며, 그 이전의 남부 조선지역에로의 병력을 파견하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라는 주장하였는데13) 매우 타당한 분석입니다. 따라서 반도사학계에서 흔히 지적하였던 청병사로 곤지왕을 보냈다는 것은 일본의 사정을 무시한 탁상공론(卓上空論)이라는 말입니다.

제가 보기에 곤지왕이 일본으로 간 이유는 고구려의 남하에 따른 국난의 위기 속에서 '부여'의 새로운 터전을 확고히 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즉 이 시대에는 천년의 숙적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해 반도부여를 기지화하고 열도부여를 건설해야 하는 책무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개로왕이 북위(北魏)에 보낸 국서와 왜왕이 중국 남조(南朝)에 보낸 국서(國書)들을 보면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다음 장에서 소상히 분석할 것입니다).

곤지왕은 461년 일본에 건너가 약 15년간 머물면서 간사이(關西)지방 가와치(河內) 등에 머물면서 부여계의 열도 기지 강화에 온힘을 기울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곤지왕은 주로 군대를 지휘한 왕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곤지왕에 대해서는 정로장군 좌현왕(征虜將軍左賢王 : 『송서(宋書)』)이라든가14) 군군(軍君 : 『일본서기』)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15) 그러니까 곤지왕은 왕의 직계로서 군사권을 가지고 특정 지역을 지배한 일종의 군벌(軍閥)의 우두머리라고나 할까요? 앞서 본 담로의 우두머리가 아마 이 같은 형태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반도부여(백제)는 475년 개로왕이 고구려군의 공격을 받아 서거하고 '사실상 멸망'합니다. 문주왕이 웅진(熊津)으로 피신하여 천도하여 이를 수습하려 하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이들 문주왕, 삼근왕이 각각 3년을 못 버티고 피살 혹은 변사하여 부여의 중흥이 매우 어려운 상황에서 곤지왕은 다급히 반도로 가서 477년 4월 내신좌평(內臣左平)에 취임하였으나, 그해 7월에 암살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 후 곤지왕의 두 아들인 동성왕과 무령왕이 차례로 등극하여 이 난국들을 수습하고 있습니다.
▲ [그림 ④] 가와치(河內) 지역(현재의 오사카)

천하의 곤지왕도 백제의 멸망기의 혼란 속에서 죽음을 비껴가지는 못했던 것이죠. 하지만 곤지왕의 죽음과 관련하여『삼국사기』에는 이상한 표현이 있습니다. 『삼국사기』 문주왕 3년(477) 5월에 흑룡(黑龍)이 웅진에 날고, 7월에 곤지왕은 서거합니다. 어쨌든 이후 반도에서 부여계의 중흥을 이룩한 왕들은 곤지왕의 후손들입니다. 즉 동성왕(곤지의 둘째 아들인 모대왕)과 무령왕이 일본에서 건너와 멸망한 부여를 중흥시킵니다. 이들은 모두 개로왕의 직계 자손들이죠.

여기서 우리가 주의 깊게 봐야할 부분 가운데 하나가 반도부여(백제)의 멸망(475)이라는 비보(悲報)를 접한 열도 부여인들이 침착하게 대응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위기에 처한 반도부여에 대해 대규모 군사적 지원 등이 전혀 나타나고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열도부여가 그만큼 안정적이거나 강력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다른 각도에서 본다면 이 같은 침착성과 냉정함은 부여인들의 특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열도부여와 반도부여의 관계가 하나의 국가라고 한다면 고구려 군사 자체가 강력한 상태에서 이미 왕을 포함한 주요인물들이 사망하였기 때문에 서두를 문제는 아니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미 이 같은 상황은 예견된 것일 수도 있고, 주로 공성전(攻城戰)을 기반으로 하는 고대 전쟁에서 전쟁이 끝난다고 해서 바로 그 지배권을 신속히 이양받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에서 웅진 천도를 거쳐 문주왕의 피살, 삼근왕의 급서(急逝) 등 백제 왕실이 극도로 불안정한 상황 속에서 일본에서 성장한 동성왕이 국내 정치를 평정할 목적으로 500명의 호위군사와 함께 온 것입니다.16) 그런데 이 때 호위 군사 5백이라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기나긴 여정에 해외에 5백인의 호위 군사를 파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야마토 왕실과 백제왕실이 어떤 하나의 가족관계가 아니고는 힘든 일이죠.

6세기에 들어서 백제와 고구려의 적대관계는 더욱 악화되었고 열도부여(야마토)에서는 마진성(馬津城) 전투에 병력과 축성인부 파견(548), 화살 30具(550), 병력과 병선 3隻(551) 및 보리종자 천석(551), 좋은 말 2필, 병선 2척, 弓 50張, 箭 50具 등을 보내고 있습니다(553)17)(주의해서 보세요! 6세기 후반에 일본에서 백제에 보낸 병선이 겨우 2척입니다. 그러니 그 이전 곤지왕이 일본에 청병사로 갔다는 것은 말이 안되죠).

그런데 곤지왕과 관련해서 특이한 점은 461년경 곤지왕이 일본으로 갈 무렵에 일본에서는 큰 정치적 변화가 감지됩니다. 이 무렵 야마토 지역에는 많은 사람이 죽으면서 천황이 바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당시의 천황은 유라쿠 천황이므로 이 사람이 곤지왕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런데 곤지왕이 일본으로 갈 당시 일본은 유라쿠 천황이 등극한 지 5년이 경과한 것으로 되어있어 유라쿠 천황을 곤지왕으로 보기 힘들 듯 합니다.

이상한 일은 『일본서기』에 따르면 유라쿠 천황의 초기 기록에 유라쿠 천황이 공식적으로 활동한 내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즉 유라쿠 천황 6년에야 비로소 정치적인 사건들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유락쿠 천황 6년 여름 4월 중국의 남조(오나라) 사신이 와서 공물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사건이 유락쿠 천황의 최초의 공식적인 행사로 볼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을 좀더 상세히 검토합시다.

『일본서기』에 나타난 유라쿠 천황의 행적을 간략히 봅시다.

먼저 유라쿠 천황기에는 다른 부분과는 달리 유라쿠 천황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거의 없고 엉뚱하게 "3년 8월 안코오천황(安康天皇 : 아나호 덴노)" 이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즉 누구의 3년 8월인지 알 수도 없이 안코오 천황이 7살 소년에게 살해 당하니 유라쿠 천황이 이를 잡아 죽이기 위해 천황의 형제들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을 죽이는 장면으로 유라쿠 천황조가 시작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3년 8월은 안코오 천황 3년을 말하는 것이기는 한데, 이 기록은 마땅히 안코오 천황조에 들어갈 기록인데 유라쿠 천황조에 기록되어있어 한 마디로 뒤죽박죽입니다. 그 해 10월에는 유라쿠 천황은 리쭈우천황(履中天皇 : 이자하와께 덴노)의 장자를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이어 11월 즉위합니다.

유라쿠 천황 2년에는 사통한 백제 여인(공녀)을 불태워 죽이고, 이 때의 기록에 "기사년(己巳年)에 개로왕이 즉위하였다"고 하는데 이 기사년은 429년으로 유라쿠 천황(456~478)의 시대와는 맞지 않습니다. 그리고 개로왕의 즉위는 455년인데 유라쿠 천황 2년이라면 458년경이므로 3년 정도 차이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같은 해 10월에는 자신의 묻는 말에 대신들이 대답을 하지 않았다고 하여 유라쿠 천황은 마부를 죽이고 "왜(倭)에서 보내온 공녀"를 보고 그녀의 육체를 탐합니다. 이 부분도 이상합니다. 왜(倭)에서 온 공녀라니오? 그러니까 이 왜는 원래 부여계가 아니거나 야마토 지역의 여자를 의미할 것입니다. 아니면 가야에서 온 채녀(采女)를 말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때 유라쿠 천황은 사람들을 너무 많이 죽여서 흉악한 천황(大惡天皇)이라는 말을 듣습니다. 유라쿠 천황 3년에도 황녀가 자살하는 등 흉사가 기록되어있고, 4년과 5년에는 사냥간 이야기가 간략히 있습니다.

그런데 유라쿠 천황 5년조에는 곤지왕이 일본으로 가는 과정과 무령왕의 탄생이 매우 소상하게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난 뒤 유라쿠 천황 6년 4월에 중국의 남조에서 사신이 와서 공물을 바칩니다.

그러니까 곤지왕이 일본으로 가기 전까지 유라쿠 천황기의 내용은 합리적으로 이해하기가 힘듭니다. 기록의 일관성이 없음은 물론이고 그 내용이 역사적 기록이라기 보다는 미스테리한 설화적인 내용을 담은 듯합니다. 그리고 내용도 살인과 방화, 사냥, 엽색 행각 밖에는 없는 형편입니다. 그렇지만 이 이후에는 매우 정치적인 기사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기록들이 어느 정도 제대로 정리되어 사서(史書的) 요소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물론 유라쿠 천황 7년에도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고 있지만 죽은 인원이 정확한 수치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유라쿠 천황 시기에 무언가 엄청나고 심각한 사회적 소요나 세력 다툼이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상의 분석을 통해 본다면 곤지왕이 일본에 간 시점(461) 이전의 유라쿠 천황조의 기록들은 신빙성이 매우 떨어지는 기록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아무리 고대라 하더라도 7살 소년이 천황을 죽이는 환경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대신들에게 "육회(肉膾)를 우리 스스로 해보면 어떨까?"라고 물었는데 아무도 대답을 안하니 천황이 마부를 찔러 죽이는 등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되는 일들이 기록되어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백제에서 공녀(貢女)로 바친 여인을 불태워 죽이는 것도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지요. 물론 공녀는 강약에 관계없이 위에서 아래로 하사하는 수도 있겠지만 불태워 죽이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오히려 이 시기까지의 헤게모니(hegemony)로만 본다면 백제가 일본보다는 더 큰 세력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상세히 보시겠지만, 이것은 중국이 백제왕과 왜왕에 대한 외교적 책봉을 한 기록들을 비교해보면 쉽게 알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곤지왕이 일본에 가기 이전까지 유라쿠 천황기의 기록은 편집된 기록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지요. 쉽게 말하자면 유라쿠 천황 5년까지의 기록은 '곤지왕 = 유라쿠 천황'이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다른 부분을 집어 넣었을 가능성이 큰 기록이라는 말입니다.

나아가 곤지왕의 서거에 즈음하여 당시 왜왕인 유라쿠 천황도 서거합니다. 즉 『일본서기』에 따르면, 유라쿠 천황 20년 고구려왕이 군사를 크게 일으켜 백제가 멸망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 해가 475년이고 유라쿠 천황의 재위는 456~478년입니다. 당시 백제(반도부여)에는 문주왕, 삼근왕이 각각 3년을 못 버티고 피살 혹은 변사하여 부여의 중흥이 매우 어려운 상황에서 곤지왕은 477년 4월 내신좌평(內臣左平)에 취임하였으나, 그해 7월에 살해당하고 맙니다. 여기서 보면 유라쿠 천황의 서거 연도가 곤지왕의 서거연도와 거의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우연의 일치로 보기는 어렵죠. 이상하죠?

뿐만 아니라 『일본서기』에 따르면, 유라쿠 천황은 개로왕의 아들(문주왕)을 백제왕으로 임명하고, 곤지왕의 아들(동성왕)을 반도부여(백제)의 왕으로 만들어 반도로 보내고 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이 시기 열도는 열도의 정비와 야마토 왕조의 안정화에 정신이 없는데 어떻게 반도부여(백제)의 왕을 임명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만약 그것이 가능하려면, 이 두 왕가는 하나의 혈통일 수밖에 없죠. 당시 부여계에서 생존한 가장 큰 어른은 곤지왕입니다. 그러니까 곤지왕이 부여왕가를 이끌 수밖에 없는데 『일본서기』에는 부여계의 어른으로 유라쿠 천황을 지목하고 있습니다. 만약 유라쿠 천황과 곤지왕이 일치하지 않는다면, 이 문제는 영원히 풀리지 않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일본서기』에 나타난 천황에 의한 반도부여왕의 임명 등을 반도사학계에서는 역사의 날조(捏造)라고 일축하고 있지만, 그 내용을 좀더 들여다 보면 매우 구체적인 사실들이 열거되어 있어 날조로만 몰아 부치기엔 문제가 있습니다. 제가 보기엔 날조라기 보다는 일부가 왜곡된 것입니다(물론 일부는 없는 사실을 만들어 놓은 것도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이 내용들을 이 두 왕가가 하나의 혈통으로 두 지역을 담로와 같은 형태로 다스려 나갔다고 가정하고서 『일본서기』나 『삼국사기』「백제편」을 읽어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들은 고도의 일치성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이시와타라 신이치로(石渡信一郞) 교수에 따르면, 곤지왕이 일본으로 건너와 일본의 시조왕이 되었으며 5세기경부터 많은 백제인들의 열도로의 이동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곤지왕이 왜국왕이 되었던 5세기 말에는 자신의 아들인 동성왕(479~501)이 백제의 왕이었기 때문에 백제인들의 열도에로의 이동은 원활히 이루어질 수가 있었던 것이라고 합니다.18) 동성왕(마다 왕자 : 末多王子)은 유라쿠(雄略) 천황의 총애를 받으며 왜 왕실에 살고 있었으며 귀국 길에는 쓰끼시(築紫 : 규슈지역)의 병사 5백 명의 호송을 받았다고 합니다.19) 곤지왕의 아들이 성질이 사납기로 유명한 유라쿠 천황의 총애를 받았다는 대목도 '이상하게도' 신경이 쓰이는 부분입니다.

다시 문제의 본질로 돌아갑니다. 이시와타라 신이치로 교수는 곤지왕을 오우진 천황(應神 天皇)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본대로 이것은 시기적으로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곤지왕은 분명히 오우진 천황이 아닌 것이죠. 그러면 곤지왕의 일본에서의 정체는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곤지왕 = 유라쿠 천황'이라는 가설이 입증될 수 있을까요? 이제부터 좀 다른 각도에서 곤지왕에 대해 좀 더 깊이 알아봅시다.

필자 주

(12) 『日本書紀』雄略紀5年 夏4月條
(13) 平野邦雄 『大化前代政治過程の硏究』(1980) 43쪽.
(14) "義熙十二年, 以百濟王餘映爲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鎭東將軍、百濟王. [一二]高祖踐阼, 進號鎭東大將軍. … <중략> … 二年, 慶遣使上表曰:「臣國累葉, 偏受殊恩, 文武良輔, 世蒙朝爵. 行冠軍將軍右賢王餘紀等十一人, 忠勤宜在顯進, 伏願垂湣, 並聽賜除.」仍以行冠軍將軍右賢王餘紀爲冠軍將軍. 以行征虜將軍左賢王餘昆、行征虜將軍餘暈並爲征虜將軍. 以行輔國將軍餘都、餘乂並爲輔國將軍. 以行龍驤將軍沐衿、餘爵並爲龍驤將軍. 以行寧朔將軍餘流、麋貴並爲寧朔將軍. 以行建武將軍於西、餘婁並爲建武將軍. 太宗泰始七年, 又遣使貢獻."(『宋書』卷97 「列傳」第57 夷蠻) 여기서 말하는 여곤(餘昆)을 일반적으로 곤지왕으로 보고 있다.
(15) "夏四月。百濟加須利君〈盖鹵王也。〉飛聞池津媛之所燔殺〈適稽女郞也。〉而籌議曰。昔貢女人爲釆女。而旣無禮。失我國名。自今以後不合貢女。乃告其弟軍君〈崑攴君也〉曰。汝宜往日本以事天皇。軍君對曰。上君之命不可奉違。願賜君婦而後奉遺。加須利君則以孕婦。旣嫁與軍君曰。我之孕婦旣當産月。若於路産。冀載一船。隨至何處速令送國。遂與辭訣奉遣於朝。"(『日本書紀』卷14雄略天皇5年(辛丑461)4月)
(16) 『日本書紀』雄略紀23年 夏3月條, 同 是歲條.
(17) 『日本書紀』欽明紀9年, 11年, 12年, 14年條.
(18) 石渡信一郞『百濟から渡來した應神天皇』(2001)
(19) 『日本書紀』雄略 23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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