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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최초의 국보는 조선의 사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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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일본의 최초의 국보는 조선의 사발"

박인규의 집중인터뷰[10/14] 역사소설 '신의 그릇' 써낸 사기장 신한균 씨

안녕하십니까, 박인귭니다. 일본의 역사 연구자들 중에는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임진왜란에서 정유재란에 이르는 기간 동안 왜병들이 조선의 수많은 도공과 도자기를 약탈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그 당시 왜병들이 눈에 불을 켜고 찾았던 것은 서민들의 생활도자기였던 사발이었다고 하는데요 이런 임진왜란 당시의 역사적 상황들과 조선 도공들의 삶을 그린 역사소설이 있습니다. 특히 이 소설은 문인이 아닌 직접 도자기를 빚는 사기장에 의해 쓰여져 더욱 관심을 모으고 있는데요 오늘 박인규의 집중인터뷰에서는 이 역사소설 '신의 그릇'의 저자인 사기장 신한균 씨를 초대해 그가 소설을 쓴 이유와 흙과 불로 빚은 사기장들의 예술혼, 그리고 조선 사발의 가치에 대해 얘기 나눠봅니다.

오늘 박인규가 주목한 이 사람은 사기장 신한균씨입니다. 신한균 사기장은 전통 조선사발을 가장 먼저 재현한 고 신정희 옹의 장남으로 태어나 현재 양산 통도사 옆에서 신정희 요를 운영하며 사기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한국 공예대전에서 특선과 동상을 수상했으며 신정희 옹과 함께 출연한 KBS 한국의 미, 그리고 일본의 NHK를 비롯한 여러 방송과 신문에 작품세계가 소개된 바 있습니다. 매년 세계 유명 화랑에서 초대받아 작품전을 열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우리 사발 이야기>가 있으며 이 책의 일본어판 <이도다완의 수수께끼>가 올해 일본에서 출간됐습니다. 또, 올해.. 일본에 있는 국보급 조선사발을 한국인 입장에서 해설한 <고려다완>을 일본에서, 역사소설 <신의 그릇>을 한국에서 각각 출간했습니다.

박인규 : 양산 통도사에서 여기까지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역사소설 '신의 그릇' 두 권을 주말에 다 읽어봤는데 재밌고 공부도 많이 됐습니다. 저는 보통 도자기를 굽는 분들을 도공이라고 하는 줄 알았는데 이 책을 보니 사기장이란 말을 많이 쓰시고, 도공은 일본에서 쓰는 말 같더라고요. 차이가 있습니까?

▲ ⓒ프레시안

신한균 :
한 가지 물어봅시다. 물건을 만드는 사람을 장인이라고 합니까 공이라고 합니까? 일본은 공이라고 합니다. 만드는 사람이란 뜻이죠. 한 가지 말하겠습니다. 일제 식민지 이전에 우리나라 사람이 만든 우리나라 책에 사기장을 도공이라고 쓴 글을 찾아오신다면 제가 없는 돈이지만 상을 내리겠습니다. 단 한 자도 본 적이 없습니다.

박인규 : 그렇다면 사기장이라는 게 정확한 표현이군요.

신한균 : 네. 경상도 말로 하면 사기장이

박인규 : 잘 모르고 있었네요. 제가 기자긴 합니다만 기자는 기사로 말하고 법관은 판결로 말한다, 사기장이시면 도자기로 말하시면 되는데 이번에 소설을 내셨어요.

신한균 : 저는 저를 그릇장이라고 부릅니다만, 분명 그릇으로 말해야 되는데 왜 글쟁이가 됐느냐. 그러나 제 본 직업은 그릇장이입니다. 소설을 쓴 이유가, 그 소설 자체가 나에게는 그릇이었습니다. 그릇도 국민이 몰라주면 아무 소용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릇 빚듯이 글을 빚었습니다. 그래서 내게 소설은 도자기입니다.

박인규 : 국민들이 몰라준다는 표현은 우리 사기장 또는 우리 도자기의 가치랄까 이것을 제대로 평가 안 해주고 있다는 건가요?

신한균 : 평가를 안 해준다기보다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왜곡된 사실을 일본인들에 의해서 전해진 걸 진리인 양, 그리고 도자기를 이론적으로 조금 아신다는 분들이 그 잘못된 일제 식민지 시절에 쓰인 책이라든지 우익들이 쓴 책을 좀 봤다고 앵무새처럼 떠들고 자랑하고 다닙니다.

박인규 : 모른다기보다 잘못 알고 있다. 그럼 우리 국민이 우리 도자기에 대해 가장 잘못 알고 있는 게 어떤 겁니까?

신한균 : 우리나라 사발 하나가 일본 가서 국보가 됐습니다. 그걸 우린 막사발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일본인들 바보 아닙니다. 왜 그걸 국보로 정해요. 한 번 생각을 해봐야 되는 거 아닙니까?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박인규 : 우리나라에서 만든 그릇이 일본에 가서 국보가 됐는데

신한균 : 그것도 가장 먼저 국보가 됩니다. 왜 국보로 삼았을까요? 일본 우익들이 억수로 반대했습니다.

박인규 : 그게 유명한 이도다완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신한균 : 네. 그 이도다완이 뭔지도, 왜 그런 이름이 붙었는지도... 우리나라에서 태어나서 건너갔지 않습니까? 우리 조상이 빚은 거 아닙니까. 그런데 어느 누구도 조사 안 해놨더라고요

박인규 : 막사발이 아니라면 일본에서 국보가 된 것. 뭐였습니까 그게?

신한균 : 옛날 우리 조선시대에는 제기를 엄청나게 소중히 여겼습니다. 제기였습니다. 진주 지방. 왜냐면 일본에 건너가서 국보가 된 이도다완 흙은 진주 지방 것입니다. 미학가는 형태나 그런 걸 보고 연구하지만 그릇장이는 흙을 보고 연구합니다. 어느 흙인지 보면 압니다. 지리산 동쪽에만 나는 흙입니다.

박인규 : 우리 경상도 쪽의 민간용 제기인데 일본에 가서 국보가 됐다. 그렇다면 우리 민간용 제기가 조선에서는 평가를 못 받았던 겁니까?

신한균 : 제기는 신주단지라 아주 중요시 여겼죠. 그러나 일본에 건너간 이도다완이, 만든 시간이 억수로 짧았습니다. 그거 하고 나서 우리나라 전 조선이 백자만 만드는 나라로 변해버립니다. 만드는 과정도 짧았고, 제기는 많이 전해 내려오지 않습니다. 제기는 몇 번 제사를 지내면 생명이 다해서 분쇄해서 따로 묻었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막사발은, 밥그릇은 사람이 죽으면 같이 묻어준 적이 많았습니다. 제기는 땅 속에서 나오는 게 적습니다.

박인규 : 생활요기처럼 매번 쓰는 게 아니라

신한균 : 생활용기는 죽을 때 묻어주니까 많이 발견되지만, 제기는 전시회 아니면... 분쇄해서 따로 묻기 때문에 무덤에서 나오는 건 거의 없습니다.

박인규 : 한 번 제사 지내고 바로 깨버립니까?

신한균 : 아니죠. 할아버지를 죽 모시다가 내가 죽으면 내 아들은 새로운 제기를 만들게 되죠. 망자를 위해서 빚은 겁니다.

박인규 : 신한균 선생님 말씀대로라면 우리나라 민간에서 쓰던 제사용 그릇인데 일본 사람들은 그걸 차를 마시는데 쓰고, 최고다... 왜 그랬을까요? 나름대로 가치가 있었을 거 아닙니까?

신한균 : 이야기하자면 아주 깁니다. 그래서 그걸 재밌게 설명하려고 신의 그릇이란 소설을 썼습니다. 왜 일본인들이 그 그릇을 택했고 우리나라에서 엄청나게 중요한 물건이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어렵게 이야기하면 아무도 몰라요. 재밌게 이야기하고 사건 속에 있으면 알지 않나 싶어서 글을 썼습니다.

박인규 : 제가 알기로, 우리나라는 고려청자, 조선백자, 이렇게 알고 있는데 이도다완에 대해서는 황도라는 표현을 쓰셨어요. 누를 황자. 누런 그릇입니까?

신한균 : 그 전에 먼저 설명하겠습니다. 우리나라 도자기는, 신라시대 토기가 있었지만, 크게 나누면 고려청자, 청자가 조선 가서 바뀐 분청사기, 백자 세 가지로 나눕니다. 그리고 이도다완이 활동할 때는 우리나라에 분청사기와 백자가 판을 치고 있을 땝니다. 그 중 이도다완은 백자에 해당합니다. 얘기하자면 아주 어렵지만, 그 당시 일본과 무역을 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일본에 건너가서, 일본에서는 섬 하나와도 바꾸지 않는 그릇이 이미 임진왜란 기록에 의하면 1만석에서 5만석에 거래된다는 기록이 나와 있습니다.

박인규 : 그것을 황도라고 하셨는데,

신한균 : 그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도 이름을 지어 놓지 않았습니다. 그냥 막사발이라고 하고, 일본식으로 이도라고 한 사람, 일본식 한문을 한글로 풀이해서 부르는 사람. 그러나 저는 우리 민족이 만든 것이기에 우리 그릇을 만드는 사람이다 보니 일본식 이름은 절대 거부합니다. 그래서, 이름은 안 정해졌으나 우선 노란 게 가장 큰 특징입니다. 그래서 황도라고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그렇게 부르자고

박인규 : 조선시대에 만든 이도다완, 신한균씨 표현대로는 황도가 일본에 몇 개나 있습니까?

신한균 : 문화재 등록된 게 한 150개로 알고 있습니다. 국보로 된 건 한 점이지만 보물이 여러 점 있고, 문화재가 있습니다. 중요 미술품이죠.

박인규 : 국내에는 몇 개 있습니까?

신한균 : 우리나라에는 일본 사람이 좋은 이도라고 못하는 거, 평범한 이도다완이라고 할 수 있는 걸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한두 점 갖고 있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우리나라에선 연구를 할 수 없습니다.

박인규 : 저서를 보니 이 소설을 쓰기 위해서 10년 동안 자료조사, 2년 동안 집필했는데 2년 집필하는 동안 몸무게가 15kg 빠졌다. 굉장히 고생하셨어요

신한균 : 저는 본래 글 쓰는 사람이 아니라 써 놓고 수백 번 고쳤습니다. 그리고 겁이 났습니다. 문법이 틀렸나 안 틀렸나 싶어서 온 사람들에게 보내서 글자 바로 맞나 고치고, 또 고치다 보니 새 아이디어가 떠오르고. 아침에 일어나서 잡으면 밥 먹는 시간도 잊어버리고 글을 썼습니다.

박인규 : 조선 사발에 관해서만 쓴 게 아니라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넘어간, 또는 끌려간 사기장에 대한 글도 쓰셨어요. 실제로 일본을 다니면서 찾아보셨다면서요?

신한균 : 예. 왜냐면 우리 조상들이 저에게는 선배 아닙니까? 그 사람들 끌려간 삶들을 조사해 보니 그 자체가 드라마더라고요. 놀라운 기록을 봤습니다. 백파선이나 이참평 같은 사람은 그 당시 분명 사기장은 조선에서 높은 신분이 아니었는데 일본 기록 보니까 옮길 때마다 밑에 천 명의 수하를 거느렸더라고요. 본명 일본 기록에 나타났습니다.

박인규 : 다시 말하면 일본에서는 사기장을 상당한 대우를 했다는 거네요

신한균 : 그런데 몇 사람만 그랬습니다. 끌려간 많은 사기장은 몇 명을 임명한 사무라이도공 밑에 수하로 있었습니다. 다 대우해 줄 수가 없었습니다.

박인규 : 그래도 소설을 보면, 일본이 사기장들을 상당히 잘 대접한다고 해서 자발적으로 넘어간 사람도 꽤 있다고

신한균 : 그렇습니다. 부끄럽지만 그게 일본의 전략이었습니다. 몇 명을 사무라이도공으로 임명해 놓고 소문을 내면 일본 가면 양반이 된다고 소문을 내놓으니까 제 발로 많이 건너오도록 유도했습니다.

박인규 : 끌려갔던 자발적으로 갔건 우리나라에서 일본으로 넘어간 사기장들이 대략 몇 명이다...

▲ ⓒ프레시안

신한균 :
몇 명인지 알 수는 없지만 나데시마에 이참평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 분 밑에 8백몇 명... 그리고 또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사기장들이 도자기를 만들어서 백자를 발견해서 큰 성공을 하자 일본 사무라이들이 도자기를 하려고 엄청나게 몰려옵니다. 그래서 소나무를 가지고 불을 때야 해서 그 지역에 소나무가 다 떨어집니다. 그때 그 지방 영주가 결단을 내립니다. 일본인들을 싸그리 몰아치고 조선 사기장들만 그대로 도자기를 빚게 놔둡니다.

박인규 : 그건 조선 자기장들이 훨씬 실력이 우수하다

신한균 : 그때 중국인들도 와 있었습니다. 그들도 다 내치고 우리 조선 사기장들만 보호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박인규 : 대단히 실력이 우수한 사기장들이 조선에 남아서 활동을 못하고 일본으로 넘어갔어요. 그리고 이 책 신의 그릇을 보면 일본이 네덜란드나 포르투갈과 교역하면서 중국에서 만든 청화백자를 만들어라. 그것이 굉장히 일본의 주요한 수출품이 됐다. 그 당시의 도자기 기술은 요즘으로 치면 반도체 기술 같은 첨단기술이었다... 라고 했는데 그게 왜 우리 조선에선 안 되고 일본에서는 됐을까요?

신한균 : 지도자라든지 미래를 내다보는, 비전을 보는

박인규 : 도자기를 굽거나 만드는 기술은

신한균 : 부끄러운 역사지만 우리나라에서 산업은 아주 천대받는 거 아니었습니까? 그리고 또 세계를 보는 눈이 조금 적었겠지요

박인규 : 장인들은 분명 실력이 있었는데 그걸 산업화하거나 국부로 이어지기엔 지도자들의 안목이 좀 없었다. 참 안타깝습니다.
아까 이참평이나 백파선... 그런 조선인 출신 사기장들이 일본에서 활동하셨다고 했는데 이 분들의 후손은 아직도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나요?

신한균 : 이참평 후손 아니고는 다들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고 아주 존경받고 있습니다
성이 고려자이몽이라든지 심수관이라든지, 일본 성이 아니라 한국성을 그대로 쓰고 있지 않습니까.

박인규 : 그렇지만 조선 사기장들의 우수한 실력이 일본에 가서 일본 발전에 기여한 거로군요

신한균 : 한 예로 일본이 명치유신에 성공합니다. 그리고 나서 근대화가 되니까 유럽과 미국하고 무역을 해야 돼요. 그때 일본이 팔 수 있는 건 비단과 도자기밖에 없습니다. 비단은 중국도 잘 만들어요. 도자기는 운 좋게 중국이, 만드는 데서 변란이 일어나서 도자기 가마터가 폭동이 일어나서 불타버립니다. 그때 명치유신 이후 일본이 돈 번 것의 90%가 도자기 수출이었습니다. 그 돈 벌어서 러시아 치고 중국 치고 우리나라를 식민지 만듭니다.

박인규 : 그 일본 사람들이 그렇게 애지중지하는 이도다완, 신한균 선생님 표현으로 하면 황도라는 것이 우리가 알기로는 조선시대 아무 데나 쓰던 막사발인데 일본 사람들이 가치를 발견해서 그렇게 됐다. 그 얘기를 야나기 무네요시라는 분이...

신한균 : 그 이야기를 하기 전에, 일본 사람 중에 한 사림이 있었습니다. 무네요시. 그 사람이 우리 황도를 보고, 우리나라에서 건너간 제기를 보고 잡기란 말을 했고, 잡스런 그릇. 그걸 잡기라고 번역하니까 우리나라 사람은 잘 몰라요. 그래서 막사발로 어느 누군가 번역했고, 유독 야나기 무네요시 책이 우리나라에서 많이 팔리고 히트를 쳤어요.

박인규 : 그렇죠. 조선시대 예술품의 가치를 처음 인정해준 학자다 그래서

신한균 : 그런데 알고 보면 아주 문제 많은 이론인데 그렇게 해서 잡기, 막사발이 됐지만 분명히 아니고, 제기였습니다.

박인규 : 잡그릇이 아니다. 막사발도 아니고. 기본적으로 상당한 예술적 가치가 있었다는 신한균 선생님의 주장에 대해서 일본의 도자기계나 국내 역사학계에서도

신한균 : 아주 반응이 좋습니다. 그걸 일본말로 번역해서 출판했는데 책 보고 너무너무 감탄했다고 편지는 한국보다 일본 사람에게 훨씬 많이 받았습니다. 그리고 일본 학자들이, 이건 논리적으로 맞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잡기라고 했을 때 논리가 하나도 없었다고 자기들도 그래요. 그건 자기 감정이라고 써놨어요.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은 그 말을 빼고 번역했더라고요. 자긴 그렇게 느낀다고 했지, 자기는 도자기학자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박인규 : 사기장으로서 황도, 또는 이도다완의 멋이랄까 아름다움의 비결은 어디 있다고 보십니까?

신한균 : 우선 도자기는 쓰는 그릇입니다. 그림은 보는 예술이고. 황도는 쓰면 쓸수록 맛이 납니다. 그 다음에, 우리 어머니가 지금 살아 계시는데, 우리 어머니는 나보고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분명 나는 우리 어머니께서 나를 사랑한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릇도 쓰다 보면 그릇에 사랑이 갑니다. 가장 사랑이 많이 갈 수 있는 그릇입니다. 처음 볼 때 화려하지는 않습니다. 외국에 나가면 김치 먹고 싶고 뚝배기 그립습니다. 그런 맛이 있습니다.

박인규 : 사기장으로서 또 하나 여쭤보고 싶은 건, 일본의 도자기산업이 산업적으로 굉장히 발달됐다. 돈도 많이 번다고 알고 있는데, 일본 도자기하고 우리 도자기를 비교했을 때 우리것의 장점이랄까, 우수한 점은 어떤 걸까요?

신한균 : 지금 산업도자기, 회사에서 만든 건 솔직히 일본에게 밀립니다만 제가 말하는 건 도예를 말합니다. 축구 하면 우리가 이기죠. 우리에게는 뭔가가 있습니다. 일본은 우리에게 싸움이 안 됩니다. 소더비나 크리스티 경매장에 내보면 알거든요. 일본인들 것은 예쁘고 화려해도 안 사요

박인규 : 우리가 도예 수준에서 일본을 앞서 있다면 산업 수준에서도 앞서면 좋겠는데

신한균 : 우리 국민들이 그 사실을 알고 사랑해줘야 됩니다.

박인규 : 분명 도예인 개개인의 실력은 일본보다 우수한데 하나의 산업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국민적 평가, 국가적 지원이 필요하다

신한균 : 당연히 국가적 지원도 필요하지만 다시 한 번 말하겠습니다. 그걸 쓰는 사람들의 사랑. 그리고 그릇을 소장하는 분들의 눈이 높아져야 합니다. 그래야 좋은 걸 만들어요. 눈이 낮으면 사기장은 간단히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내가 신의 그릇을 쓴 이유이기도 합니다.

박인규 : 이번에 발간하신 신의 그릇을 계기로 해서, 국민들이 우리 그릇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해 줬으면 좋겠습니다.
황도, 이도다완... 이걸 현대에 와서 가장 먼저 재현해내신 분이 선친이신 신정희 옹이라고 들었습니다. 아버님께서는 어떻게 황도에 관심을 가지게 되신 겁니까?

신한균 : 아버님이 워낙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집에서 도망쳐서 먹고 살려고 취직한 데가 골동상 점원으로 갔습니다. 그래서 아버님은 고미술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지금 우리 것을 재현하고 있는 일본 사람들이 엄청나게 대우도 받고 그런 걸 많이 보셨습니다. 그 당시 산 같은 데 가면 사금파리가 쌓여 있었습니다. 만들자, 내가 만들어 보자 해서 시작했습니다.

박인규 : 68년도에 처음 재현했다고 들었는데 그 당시 국내에서 반응이 어땠습니까?

신한균 : 어렸을 때 기억인데 귀신그릇 만든다고 전세방도 안 주고 그랬습니다. 밭 같은 거 갈다 보면 사금파리 많이 나오지 않습니까? 부숴버려야 되고 귀찮거든요. 그러다가 일본의 사진작가가 아버지가 미쳐 있는 걸 보고 사진을 찍어서 일본 요미우리 신문에 발표를 합니다. 그러다가 일본NHK도 찾아오고 일본의 TV, 신문에 많이 난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나중에 우리 아버님은 완전히 완성했다고 하신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여기 KBS기자라든지, 한국의 이도다완의 완성, 기사도 많이 났지만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전에도 덜 완성했노라 하고 돌아가셨습니다.

박인규 : 아직도 우리나라보다는 일본에서 황도에 대한 관심이 많군요

신한균 : 지금은 우리나라에도 황도에 관심 가지신 분이 많이 있습니다.

박인규 : 아드님이 여러 분이시라고 들었는데 4형제 모두 도자기를 하십니까? 황도를 아직도 만들고 계신가요?

신한균 : 그렇습니다. 자기 나름대로 빚고 있습니다.

박인규 : 신정일요 말고 다른 데서도 이런 걸 하고 있나요?

신한균 : 많이 있죠. 문경, 김해, 전국에 황도를 안 만드는 데 가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박인규 : 많이 나오고는 있군요.

신한균 : 네. 한국 분들도 황도를 가지고 차를 마시거나 하는 분도 상당히 많습니다.

박인규 : 지금 요가 양산 통도사 안에 있다고 해요.

신한균 : 통도사 옆에 있습니다.

박인규 : 특별한 인연, 이유가 있습니까?

신한균 : 아버님께서 문경에 계시다가 산세가 좋다고 절 있는 데에 지어서, 문제가 있었습니다. 절 옆은 문화재니까 함부로 집을 못 짓는데 그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우리나라 사발을 외국에 많이 알렸다고 특별 허가를 내줬습니다.

박인규 : 신한균 선생 보시기에 좋은 그릇이란 어떤 겁니까?

신한균 : 가장 좋은 건 부모님이나 조상님이 쓰던 걸 물려받아서 쓰는 게 가장 좋은 그릇이라고 생각합니다.

박인규 : 제가 아는 분은 이런 얘길 해요. 일본 가보면 음식점에서도 전부 도자기를 쓰고 있다. 그릇을 조심스럽게 다루고, 도자기는 살아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데 우리나라 식당에 가보면 전부합성수지를... 도자기산업에도 문제가 있지만 음식을 다루는 데도 문제가 있지 않느냐고 지적하던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신한균 : 중국보다 우리가 조금 더 잘 살죠. 중국도 플라스틱에 밥 주면 기분 나빠할 거예요. 멜라민을 수출한 나라기도 하지만

박인규 : 우리도 좀 일상생활에서 도자기를 많이 쓰는...

▲ ⓒ프레시안

신한균 :
쓰다 보면 심성이 맑아집니다.

박인규 : 이번에 황도에 관한 소설까지 내셨는데 그것을 알리는 작업은, 글로는 끝이 난 건가요?

신한균 : 그렇습니다. 저는 그릇장이로서 소설을 빚었지 소설가는 아니니까요. 그러나 신의 그릇을 읽어보시면 우리 한국인으로서 자부심이 생길 겁니다. 한 예로, 피에르가르뎅, 크리스찬디오르. 그 브랜드 때문에 프랑스에 얼마나 많은 돈을 갖다줍니까. 우리나라는 도자기 종주국이고 가장 내세울 수 있는 브랜드는 도자기입니다.

박인규 : 사기장으로서 활동도 하시고, 그동안 우리나라 조선 사발의 가치에 대한 책, 소설을 많이 내셨는데 사기장으로서 앞으로 하시고 싶은 일도 있으실 것 같고. 또 우리나라 도자기산업 관련해서도 마지막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을 것 같은데...

신한균 : 사기장으로 가장 하고 싶은 것은 도자기 미니 대학을 만들어서... 도자기 가마 있는. 그런 걸 하고 싶고. 그리고 나이 들어 힘 빠지면, 물레 잘 못 차면, 우리나라가 도자기 종주국인데 한국인이 쓴 도자기 사전이 없습니다. 일본, 중국, 미국도 있습니다. 그래서 도예사전을 마지막으로 하고 바람처럼 사라지고 싶습니다.

박인규 : 분명 우리 한국사람들은 도자기에 관련해서 상당히 실력이 있었는데 많이 잊혀지고 있는 것 같아요. 신의 그릇 발간을 계기로 우리나라 도자기에 관한 실력을 발굴하고 도자기 산업이 발전됐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말씀 고맙습니다.

신한균 : 감사합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 오늘은 조선시대 도공들의 삶을 그린 역사소설 '신의 그릇'을 쓴 사기장 신한균씨와 함께 그가 소설을 쓴 이유와 흙과 불로 빚은 사기장들의 예술혼과 조선 사발의 가치에 대해 얘기 나눴습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는 매주 월-금요일 오후 2시30분부터 3시까지 KBS 1라디오97.3MHz)에서 방송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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