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계는 장기간 토착화되어 고대국가를 만들어간 신라와는 달리 여기저기로 이동하였기 때문에 토착민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기는 어려웠던 것으로 판단됩니다. 이 점들을 기록이 많이 남아있는 반도부여를 중심으로 좀 더 살펴보고 갈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반도부여의 정치제도는 토착적인 성격이 약하고 대신 중국식의 세련된 제도에 기반을 하고 있습니다. 즉 토착적인 고구려나 신라의 제도와는 달리, 반도부여(백제)의 관제(官制)나 군제(軍制)는 중국 고전인 『주례(周禮)』를 바탕으로 하여 한식(漢式)의 우아함을 기조로 하고 있습니다.22) 이것은 다른 한편으로는 토착세력과 부여계 사이에 위화감을 조성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둘째, 부여계는 반도부여 지역의 지역세력들이나 호족들을 흡수 · 통합함에 있어서 적극 대처하지 못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반도부여의 조정은 각 지역 세력의 수장층(首長層)을 통해 성과 읍을 통제하는 간접지배방식에 만족했습니다. 후에 전국에 22개의 담로를 설치하여 왕족(王族)을 보내 다스리다가 538년 사비(부여)로 천도한 뒤 비로소 전국을 5방으로 나누어 방(方) - 군(郡) - 성(城) 체제가 확립되게 됩니다. 이 분야의 연구가들은 백제의 체제가 대체로 "군사적 성격이 현저하게 강한" 군정(軍政)에 가까웠을 것으로 진단합니다.23) 따라서 지방의 호족들이나 토착민들과의 관계가 원만했다고 보기 어려운 측면이 있습니다.
셋째, 반도부여는 대륙에서의 역사적 경험과 전통을 바탕으로 국제정치의 역학관계나 외교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 반면, 내정에는 다소 소홀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즉 부여계는 한편으로는 對중국 외교에 많은 공을 들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반도나 열도의 개척으로 잃어버린 만주대륙을 대신하는 거대한 제국을 꿈꾸었기 때문에 지역적인 개발이나 토착화는 소홀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반도부여의 제왕들은 시해(弑害)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한성시대에도 여러 왕들이 천수를 다하지 못하고 고구려군이나 첩자들에 의해 시해되었으며, 토착민들과도 상당한 갈등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설화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웅진시대의 다섯 분의 국왕 가운데 무령왕이 천수를 누린 거의 유일한 분이었습니다. 문주왕과 동성왕은 각각 권신들에 의해 시해되었고, 문주왕의 어린 아들인 삼근왕(477~479)도 의문사를 당합니다.
결국 부여는 고구려와의 대립과정에서 한족(漢族)과의 통교를 통하여 쥬신의 고유문화에 보다 발전된 문화를 습득하는 한족화(漢族化) 정책을 시행한 반면, 고구려는 까오리의 전통을 중시하여 반한족적(反漢族的) 정책을 시행합니다. 그래서 이 두 나라는 결코 화해할 수 없는 길로 가고 있습니다. 이제 그 끝없는 동족상잔의 비극(悲劇)도 태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도쥬신(한국)의 사학계에서는 백제가 3세기 중엽 고이왕 때에 연방제의 성격을 지닌 초기 고대 국가를 성립시키고 4세기 후반 근초고왕 때에는 중앙집권화에 성공하여 성숙한 고대 국가로 발전했다고 보고 있습니다.24) 그러나 이 같은 논리의 문제점은 고이왕과 근초고왕을 전후로 한 역사적인 단절성을 무시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마치 백제라는 나라가 자체적인 권력을 바탕으로 강대국으로 성장해갔다는 것인데, 앞서 보았듯이, 이 점은 역사적 사실로 보기 어렵습니다. 근초고왕이 활약하던 4세기 한반도와 열도의 상황을 보면, 한반도 남부는 반도부여(백제), 신라, 가야(가라) 등으로 분열되어있었고, 일본 열도 특히 기나이(畿內) 지역에는 강력한 정치권력이 형성되어있지 못하였습니다. 이 틈을 비집고 들어간 것이 바로 근초고왕 계열로 추정됩니다. 당시 근초고왕계는 가야계와의 연합을 통하여 일본 열도로 진출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이 『일본서기』에 나타난 진구황후(神功皇后)의 실체이자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 교수가 말하는 '기마민족'의 실체입니다. 그리고 이 점은 앞으로 지속적으로 상세히 분석하고 검토할 것입니다.
이제 부여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봅시다. 우리가 '주몽'을 소재로 한 소설이나 드라마에서 주몽이 부여왕자들에게 일방적으로 당하고 쫓기는 장면을 보면서 분노하는 것에 대하여 좀 더 냉정하게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부여의 입장에서 보면 고구려의 건국은 용납하기 힘든 요소가 있습니다. 그리고 부여는 긴 시간을 한족과의 연합을 통하여 국가의 생존전략을 모색하였는데 이것은 부여로 봐서는 불가피한 선택일 수도 있습니다.
부여는 한족과의 연합을 통하여 국체를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 나라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한족(漢族)으로 동화하려고 했던 것은 분명히 아닙니다. 이후 반도부여가 중국대륙의 한족 정권과 끊임없는 교류를 통하여 이루고자 했던 목표는 바로 고구려의 남하를 저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하여 부여의 정체성을 사수하는 것, 그것이 바로 국가의 목표였던 것입니다(이 점은 앞으로 지속적으로 분석할 것입니다).
부여는 어떤 의미에서 한국인들 가운데 쥬신의 하이테크(귀금속 및 청동 제련술) 문화를 기반으로 한족의 고급 농경문화를 가장 효과적으로 받아들여서 한국인들 가운데 가장 찬란한 문화를 이룩한 국가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이들이 한족(漢族)의 국가나 문화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려 하지 않았다는 것은 결국 당나라와의 연합을 끝내 거부한 사실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신라와 당나라의 친연성이나 또는 신라의 외교적 승리라는 부분을 간과할 수는 없지만 반도부여(백제)의 멸망의 과정에서 우리가 인식해야하는 것은 반도부여(백제)의 궁극적인 목표는 찬란한 부여 문화와 정체성의 유지라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부여의 문화를 좀 더 깊이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부 학자들에 의해, 부여가 쥬신(범한국인)의 나라였던 은(殷)나라의 문화를 그대로 계승하였다는 연구 결과가 책으로 발표되기도 하였습니다. 부여의 문화는 찬란한 한국인의 금속문화와 고도의 한족 농경문화의 결합체임을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범부여사 즉 한일고대사 이해를 위한 가장 기본적인 내용들이 간략하게 정리되었습니다. 이 글 전체의 서론은 끝이 난 셈이지요. 이제부터는 부여계가 어떤 식으로 한반도와 일본열도에 정착해 갔는지를 살펴볼 것입니다. 먼저 부여계의 정착과정을 통시적으로 살펴보고 난 뒤, 구체적인 사항들을 하나씩 면밀히 분석할 것입니다.
필자 주
(22) 백제문화사 대계 연구총서 1『백제사총론』(충청남도 역사문화연구원 : 2007) 15쪽.
(23) 백제문화사 대계 연구총서 1. 앞의 책, 50쪽.
(24) 김태식 「4세기의 한일관계사」『한일역사 공동연구보고서 1』(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 2005) 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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