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졌으니, 핵무기가 처음으로 실전에 투입된 지 벌써 63년의 세월이 흘렀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전쟁지휘부는 도대체 어떤 생각을 품고 핵무기를 사용했을까. 신무기가 실전에서 어느 정도 파괴력을 보이는지 너무나 궁금해서였을까?
미국 쪽 설명은 "미군의 일본 본토 진공작전이 벌어질 경우 생겨날 숱한 미군 희생을 줄이려고 원자폭탄 투하를 결정했다"는 것이다. 태평양전쟁 말기 1945년 2월 유황도 전투에서 미 해병대는 6천8백명의 전사자와 2만2천명의 부상자를 냈었다. 일본 본토상륙작전이 벌어진다면, 그보다 훨씬 많은 사상자가 나올 게 뻔했다.
바로 그런 미국의 우려 때문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살던 수십만명의 비무장 민간인들이 생목숨을 잃어야 했는가는 의문점으로 남는다. 그때 일본 전쟁지휘부는 "미군의 일본 본토 상륙을 위해 결사항전을 하겠다"고 큰소리를 쳐 미군을 긴장시켰지만, 일본의 패망은 시간문제였다. 미 군함을 겨냥한 자살폭탄공격을 위해 전투기를 띄우려 해도 휘발유가 동나서 못 띄울 형편이었다. 한마디로 일본열도는 패전의 그림자에 덮여 있었다. 사정이 그러했기에 평화를 사랑하는 지구촌 사람들은 "그때 미국이 원폭을 사용하지 않고 외교적인 노력으로 일본의 항복을 받아냈어야 했다"는 아쉬움을 품기 마련이다.
2만6천개 핵탄두가 터진다면...
핵무기의 무서운 파괴력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본 강대국들은 제2차 세계대전 뒤 저마다 핵무기 개발 경쟁에 나섰다. 소련(1949년), 영국(1952년), 프랑스(1960년), 중국(1964년), 인도(1973년), 파키스탄(1998년)이 차례로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했다.
여기에 두 나라가 더 있다. 이스라엘도 공식적으로는 핵무기 보유를 갖고 있다고 시인하진 않았지만, 적어도 2백개의 핵탄두를 개발해놓았다. 스웨덴의 스톡홀름 국제평화연구소 분석자료에 따르면, 2006년 처음으로 핵실험을 한 북한은 6개 정도의 핵탄두를 지닌 것으로 짐작된다.
1945년 이후 지구상에서 만들어진 핵탄두는 모두 12만8천여 개에 이른다. 이 가운데 미국이 7만여 개를, 옛 소련·러시아가 5만5천여 개의 핵탄두를 만들어냈다. 냉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86년, 그러니까 지금부터 20년전에는 세계 각국이 보유한 핵탄두는 7만여 개에 이르렀다. 지금의 핵무기 숫자는 많이 줄어들었지만, 아직도 지구상엔 2만6천개가 넘는 핵탄두가 남아 있다. 그 하나하나가 모두 히로시마-나가사키에 떨어졌던 것보다는 파괴력이 훨씬 큰 것들임을 떠올리면 몸이 오싹해진다.
NPT는 불평등조약
주먹 센 놈이 뒷골목 패거리들을 제압하고 목에 힘주는 게 세상 이치다. 국제질서도 크게 다를 바 없다. 미 정치학자 한스 모겐소 교수는 국제정치를 '힘을 위한 투쟁'이라고 규정했다. 모겐소 같은 현실주의 정치학자들에게는 힘이 바로 국제정치를 풀이하는 주요 분석단위다. 힘이 있느냐, 힘의 균형이 이뤄져 있느냐로 국제정치를 풀이한다. 핵무기는 21세기 국제정치를 읽는 핵심용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국제정치관계의 본질이 파워, 즉 힘에 바탕한 이해관계의 조정이라면 핵무기를 가졌느냐 못 가졌느냐는 매우 중요해진다. 1970년부터 시행돼온 핵확산금지조약(NPT)은 이미 핵을 개발한 강대국 중심의 전형적인 '불평등조약'이라 비판을 받긴 하지만, 지금까지 각국의 핵무장 유혹을 막는 데 나름의 억지력을 보여 왔다. 그럼에도 여러 국가들이 핵무기를 갖고 싶어 하는 것도 군사강국으로 인정받으려는 처절한 노력으로 풀이된다.
20세기 중반에 만들어진 핵무기는 19세기 나폴레옹 시대 때처럼 병력 숫자로 힘겨루기를 하던 고전적 '힘의 균형' 개념을 깨뜨렸다. 그것은 곧 '공포의 균형'이다. "핵전쟁이 일어나면 국가끼리 서로를 파괴하는 까닭에 핵무기가 전쟁을 막는다"는 것을 국제정치학에서는 상호확증파괴(Mutual Assured Destruction, 줄여 MAD) 논리라고 설명한다. 핵전쟁이 일어나면 전쟁의 승패를 떠나 핵공격으로 서로를 파괴해버릴 것이다. 이른바 '상호확증파괴'의 공포는 전쟁광들이 불쑥불쑥 느끼는 핵전쟁 충동을 그나마 눌러 왔다.
운명의 날 앞당길 피해망상증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대목이 있다. 인간은 완벽한 존재가 아니다. 핵무기의 전쟁억제론이 언제나 통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만에 하나다. 동서냉전이 한창이던 1964년에 스탠리 큐브릭 감독이 만든 영국영화 '닥터 스트레인지러브'(Dr. Strangelove)가 좋은 보기다.
이 영화는 피해망상증에 사로잡힌 미국의 한 공군 장성이 "소련이 먼저 미국을 공격해올지 모른다"며 핵폭격기를 출격시킴으로써 핵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을 잘 보여준다. 영화 '스팔타커스'(1960년), '풀 메탈 자켓'(1987년)으로 잘 알려진 큐브릭 감독은 이 흑백영화에서 "핵전쟁이 벌어진다면 지구의 모든 생명체가 죽음을 맞는 '운명의 날'(doomsday)이 오리라"는 준엄한 경고 메시지를 전한다.
1962년 쿠바 핵미사일 위기를 비롯해 그동안 핵무기를 둘러싼 여러 번의 위기가 있었지만, 핵전쟁으로 번지지 않은 것은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핵폭탄의 무서운 파괴력은 전투원은 물론이고 수많은 민간인들의 생명을 앗아가고 하나뿐인 지구촌 환경을 파괴할 것이다. 제아무리 전쟁광이라 하더라도 핵전쟁만큼은 피해야 한다는 데는 딴소리가 있을 수 없다.
핵강국에 둘러싸인 한반도
우리의 현실적인 고민은 한반도의 평화와 생존이다. 한반도 주변은 핵강대국들인 미국, 중국, 러시아, 그리고 미일동맹의 한 축인 미국의 양해 아래 보유중인 40톤의 플루토늄과 재처리시설로 언제라도 핵탄두를 개발해낼 능력을 갖춘 일본, 이렇게 4개국이 둘러싸고 있다. 이들은 하나같이 핵강국들이고, 국제사회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실전에 투입이 보다 쉬운 소형 핵폭탄 제조에 큰 관심을 갖고 있다.
이들 4개국의 또다른 공통점은 모두 한반도 통일을 바라지 않고 현상유지를 바라면서, 자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한반도 분단과 긴장을 이용한다는 점이다. 한반도 평화를 사랑하는 이들에겐 북한 핵폐기만이 아니라, 한반도 주변국들의 핵폐기-비핵화를 짚고 넘어가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위의 글은 '참여연대'가 발행하는 월간지 <참여사회> 최근호에 실린 글을 수정 보완한 것입니다.)
필자 이메일 kimsphot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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