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 장애인 선수들의 축제이자, 인간승리의 장인 제13회 베이징 장애인 올림픽이 지난 주 그 열전의 막을 내렸는데요, 특히 이번 장애인 올림픽에서는 '한국 장애인들의 대모' 황연대 전 한국장애인복지진흥회 부회장이 수여하는 '황연대 성취상'이 폐막식 공식 행사로 치러져 더 큰 의미가 있었습니다. 개인 이름으로 주어지는 시상식이 장애인 올림픽 폐막식에 공식 행사로 치러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하는데요, 오늘 박인규의 집중인터뷰에서는 황연대 전 부회장을 초대해 '황연대 성취상'의 의미와 장애인 복지를 위해 헌신해 온 그녀의 삶에 대해 얘기 나눠봅니다.
오늘 박인규가 주목한 이 사람은 황연대 전 한국장애인복지진흥회 부회장입니다. 황연대 전 부회장은 1963년 이화여자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했고, 세브란스병원 소아재활과 당직의사로 재직했습니다. 이후 사단법인 한국 소아마비 아동 특수보육협회를 설립해 상임이사로 활동했고, 서울장애인올림픽 조직위원회 위원과 장애인 복지 대책위원회 위원을 지냈습니다. 1988년 서울 장애인 올림픽 당시 그녀의 공헌을 인정받아 황연대 극복상이 제정됐으며, 이후 장애인 고용촉진공단 이사장과 한국중앙장애인복지위원회 위원, 재단법인 한국장애인복지체육회 이사와 재단법인 한국장애인복지진흥회 상근부회장을 역임했습니다. 제1회 '서울 교육상'과 국민훈장 석류장과 동백장, 그리고 이화여대 개교 100주년 아펜셀러상, 5.16 민족상, 국제 장애인 조직위원회 훈장 등을 받았습니다.
박인규 : 이번 베이징 장애인 올림픽에서 황연대 성취상이 폐막식의 공식 행사로 됐다고 해요. 본인 이름이 들어간 상이 올림픽 공식 행사가 됐기 때문에 소감이 남다르실 것 같습니다.
황연대 : 이 상이 시작된 지 20년 만에 상의 위상이 많이 격상 됐고 그만큼 우리나라 국가 수준이 많이 격상된 그런 기분이 들어서 좋습니다.
박인규 : 공식 행사라고 하면 언제 이게 진행된 겁니까. 선수가 입장한 바로 다음에 됐다던데?
황연대 : 그전에 96년부터도 공식 행사로 채택이 됐지만 식전 행사 5분이었어요. 5분 동안 식전행사였고, 이번 베이징서부터는 정식 개회식 시작하면서 오피셜 타임에 이 계획이 들어가서 시작 했습니다.
박인규 : 베이징 장애인 올림픽위원회 측에서 공식 행사로 격상시킨 그런 이유를 설명 하던가요?
황연대 : 이건 베이징 위원회에서 하는 게 아니고 IPC, 국제장애인 올림픽 조직위원회에서 작년에서부터 그런 말이 있었습니다. 이걸 격상 시키고 아주 화려하게 하겠다고 그런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박인규 : 그럼 황연대 성취상이니까 메달이라고 하던데, 그 상을 황연대 선생님이 직접 주시는 겁니까?
황연대 : 그렇습니다.
박인규 : 이번에 상을 받은 선수는 어떤 선수들이었습니까?
황연대 : 먼저 여성 선수는 나탈리 선수라고 2001년에 오토바이 사고로 한 다리를 절단한 선수에요. 수영 선수인데, 일반 올림픽에도 참가 하고 또 장애인 올림픽에도 참가를 했어요. 의지도 대단하고 모든 면에 굉장히 상을 받을 만한 수상자가 선정이 됐고요, 남자 선수는 아주 굉장히 가난한 나라인데, 파나마의 고메스 선수는 자기가 어떤 조직체가 없으니까 개인적으로 여비랑 준비해서 올림픽에 출전해서, 92년 바르셀로나 때부터 자기의 13년 동안 세계 신기록을 가지고 있는 그런 선수입니다. 시각 장애인이구요.
박인규 : 장애인 올림픽에 참여하는 선수들이 다 나름대로 장애를 극복하고 나온 선수들일 텐데, 그 중에서 이 두 분을 골랐을 때는 특별히 어떤 의미에 중점을 둔 걸까요?
황연대 : 솔직히 말씀 드려서 각 나라에서 장애인 올림픽에 참여하는 그 자신들도 다 이런 상을 받은 사람들이지만 제한 상 남자 1명, 여자 1명으로 하는데, 우선 자기의 육체적인 조건을 인간 한계를 극복하고 정신적인 승리를 이루고 모든 일에 도전하고, 극복하고, 성취하고 또 사회를 위해서도 공헌을 하는 성향을 선수들이에요. 그리고 선출 방법은 IPC에 부회장 세 분이 계실 때는 그 세분이 심사위원이고, 지금은 한 분이 부회장으로 계시니까 부회장 한 분과 집행위원 두 분, 그러니까 세 분이 최종 결정을 하는 그런 상입니다.
박인규 : 이 상이 처음에는 1988년도 서울 장애인 올림픽 당시, 그 당시에 제정이 됐다던데, 어떻게 해서 이 상이 생기게 된 겁니까.
황연대 : 솔직히 88년에 제가 언론 매체에서 상을 받았어요. 그런데 제 자신이 그 당시에 50세였는데, 내가 죽기 전에 내 나라 땅에서 세계의 장애인들이 모이는 이런 축제가 이뤄진다는 거, 이걸 내 망막에 지니고 내가 죽어도 한이 없겠다, 그런 심정이 들었어요. 그런데 마침 그 상을 받아서 조금의 돈이지만 그걸 조직위원회에 기증을 했어요. 그래서 한국에서 이뤄지는 올림픽이니까 저에 대해서 서베이가 되면서 장애인을 위해서 일한 공을 치하하는 그런 명예스러운 상으로 황연대 극복상이라고 처음엔 됐었어요. 그런데 어느 상이든지 재정이 기반이 되는 거지만 이 상은 저 개인의 공적이랄까, 그런 걸 치하하는 상이다, 그렇게 IPC에서 발표를 했었어요.
박인규 : 일반 사람들이 보기에는 황연대 선생님이 한국의 장애인들을 위해서 많은 역할을 하고 서울 올림픽이 한국에서 열렸기 때문에 줄 수도 있지만 그 다음에 바르셀로나 올림픽이나 애틀랜타 올림픽 까지 계속 이어진 건 어떻게 보면 쉽지 않았을 텐데요.
황연대 : 그 당시만 하더라도 92년 바르셀로나에서는 이사회에서 황연대라는 사람이 한국의 장애인을 위해서는 헌신 봉사한 일이 있지만 세계 장애인을 위해서 한 일이 뭐기에, 우리가 올림픽 마다 이런 상을 계속 줘야 하느냐, 이런 논란이 있어서 취소당할 뻔 했어요. 그런데 거기에서 몇 분이 적극 주장해서 이 상은 지속 되어야 한다, 이런 가치의 기준을 한 상이다, 그래서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96년 애틀랜타에서는 정식 공식 행사로, 아까 말씀드린 대로 식전 5분 행사였어요. 그랬는데, 12년 흐른 뒤에는 정식 식전 행사로 그렇게 위상이 격상된 상태입니다.
박인규 : 이번 베이징 올림픽에서 폐막식 공식 행사로 채택 됐으니까 앞으로도 계속 공식 행사로 계속 치러지겠죠.
황연대 : 그렇습니다.
박인규 : 그런데 원래는 황연대 극복상이었는데, 이번 베이징 올림픽부터는 황연대 성취상이 됐어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황연대 : 일반 올림픽도 발전 하지만 장애인 올림픽도 해가 지나면서 많이 발전했습니다. 88 서울 올림픽이 장애인 올림픽의 효시라 할 정도로 모던한 장애인 올림픽의 근본을 이룬 게 서울 올림픽입니다. 우리가 88 서울 올림픽 한 획을 그어서 장애인 올림픽 역사에 있어서는 88 서울 올림픽이 굉장히 대두 되고 회자되고 그렇습니다.
박인규 : 그 당시에는 극복상이라고 붙었는데, 성취상이라고 이름을 바꿨어요?
황연대 : 바꾼 것이 이 IPC도, IPC 위원장이 IOC 위원이고, IOC와 IPC가 함께 협조해서 이 IPC 장애인 올림픽을 치루거든요. 그러니까 모든 것이 IPC의 위상도 격상이 됐고 모든 비전도 옛날에는 도전하자, 극복하자, 그런 투쟁적인 거였는데, 지금은 모든 것을 성취하고, 성공하고, 이뤄내는 게 중요하고, 이런 긍정적인 이런 사고의 세대에 이르렀으니까 이걸 오버컴이라는 말보다 성취상으로 바꾸자, 그렇게 한 1년 전서부터 요구가 있었어요.
박인규 : 이게 제가 알기로는 동계 올림픽, 하계 올림픽, 매번 남 녀 한 명씩 해서 뽑는다던데, 이번에는 남아공과 파나마 선수가 상을 받았어요. 어쨌든 한국에 계신 황연대 선생님 이름을 딴 건데, 한국 선수가 상 받은 적은 업습니까?
황연대 : 98년 나가노 동계 올림픽 때 김미정 선수가 받았습니다. 여자 선수입니다.
박인규 : 김미정 선수는 어떤 이유로 상을 받게 되었습니까?
황연대 : 스키 선수인데, 굉장히 불편한 몸이면서도 대학원에 다니면서 후배들을 감독하는 감독일도 하는 그런 선수였습니다.
박인규 : 이번 베이징 올림픽 물론 시상을 하러 가셨겠지만 그 전에 장애인 올림픽에서 선수들 경기하는 모습도 보셨죠. 언제 갔다 오셨습니까.
황연대 : 그럼요. 지난 12일에 갔었습니다.
박인규 : 처음부터 가신 건 아니었군요. 어떻게 보세요, 저희가 단장님도 모시고 인터뷰를 했지만 금메달 13, 14개였는데, 목표는 못 했지만 이번 선수들의 성적에 대해서는 만족 하십니까?
황연대 : 조금 금메달에는 목표치에 미치지 못했는데, 그때 현장에서도 보니까 너무 양궁에서도 중국과 우리나라가 금메달 경쟁할 때 보면 버스 몇 대가 들어와요. 응원 부대가. 그러는 게 눈에 띄었고요. 그리고 박종철 역도 선수도 금메달감인데, 아쉬운 판정으로 해서, 그런데 다른 선수들은 똑같은 경우인데, 왜 그 사람은 제지 안 하고 우리 선수만 이러느냐, 그래서 굉장히 아픈 기억이 있습니다.
박인규 : 장애인 선수들이 스포츠를 한다는 거, 그건 일반 비장애인들이 스포츠를 한다는 것과 좀 다를 거 같은데요, 장애인들에게 있어서 체육, 스포츠의 의미는 어떤 거라고 볼 수 있을까요?
황연대 : 한 마디로 생의 환희죠. 육체적으로 모든 걸 기능을 잃고, 낙담하면서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섰다가 재활이라는 기회를 통해서 조금 활동하게 되면서 이런 체육을 접하고 또 자기가 잔존 기능을 갖고 할 수 있는 종목에 최선을 다해서 국가 대표에서부터 올림픽까지 나갈 수 있는 선수로 키워진다는 게 자기 생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박인규 : 어떤 여가활동이기 보다는 삶의 존재를 느낄 수 있는, 그런데 저희가 이번에 13위를 하지 않았습니까? 일반 비장애인 올림픽에서는 7등인가 했는데, 약간 아쉬운 것 같아요. 그러니까 비장애인 체육에 비해서는 장애인 체육이 조금 떨어지는 것 같은데..
황연대 : 솔직히 말해서 88 장애인 올림픽에서는 4위 했습니다. 그리고 2000년도에도 7위, 9위 이렇게 했는데, 일본이나 중국은 굉장히 젊은 선수들을 양성했어요. 20년 동안. 나가보면 때마다 변화되는 선수 모습이랄까, 역동적인 걸 느꼈어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88때 선수도 아직 있고.
박인규 : 하긴 5, 6회 출전하는 선수들이 많이 있더라고요.
황연대 : 그리고 선수 교체해서 육성할 만한 여건이 안 됐었어요.
박인규 : 그러니까 88 올림픽 때 활약하시던 분들이 아직도 활약하는 그런 형상이군요.
황연대 : 주를 이루면서 신인 선수 발굴에 그런 차질이 있었고, 또 능력이 안 됐고, 국가나 사회적으로.
박인규 : 신인 선수 발굴이 왜 이렇게 안 됐을까요?
황연대 : 얼마나 어렵습니까. 신인선수 발굴 자체에서부터 발굴 했으면 그걸 뒷받침해서 길러야 하는데, 일반 선수들은 태릉선수촌이란 걸 활용하죠. 그러나 아직 우리 장애인 선수들은 그런 전용 시설이 없습니다. 지금 기공식 한 지 1년이 지났고 내년 정도에는 이천에 장애인을 위한 체육관이 지어 지지만 아직까지는 올림픽에 나갈 때에도 아주 열악한 시설에서 해야 되고, 잠자야 하고, 먹어야 하고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발전할 기회를 다 놓쳤던 거죠. 그래서 13위라지만, 뭐 국력도 13위인데, 잘 한 거라고 저는 생각 합니다. 하하.
박인규 : 경제적으로 따지면 그런데, 비장애인들 성적에 비하면 아쉬운 점도 있고.
황연대 : 사실 비장애인들의 관심은 매스컴을 비롯해서 대단하지 않아요? 그러나 장애인들에 대한 일반의 관심은 솔직히 말씀 드려서 격차가 심한 거죠.
박인규 : 장애인들에게 스포츠는 단순한 여가 활동 이전에 본인들의 존재의 의미를 깨닫게 해 준 활동이라면 국가 됐든 기업이 됐든 장애인 스포츠를 활성화 시킬 수 있는 여러 가지 지원을 많이 해 줬으면 좋겠는데, 황 선생님 보기에는 국가나 기업이나 지역 사회에서 어떤 지원을 해 줬으면 좋겠다는 그런 게 있습니까?
황연대 : 사실 10년, 20년 전에 비하면 장애인들에 대한 복지라든가 모든 면에서 괄목할 만한 변화, 인권적인 측면, 어떤 기회균등. 대학 입시에서 떨어뜨리고 뭐 어디에서 떨어뜨리고, 이런 일들은 이제는 없어졌죠. 장애인의 지위가 많이 향상은 됐죠. 향상은 됐는데 우리 선수들을 놓고 보면 일반 선수들은 어떤 기업에 소속돼서 생활이 유지되는 그런 입장이지만, 우리 장애인 선수들은 예를 들면 청주시청 같은 데는 사격을 일상 공무원으로 뽑아서 운영을 하고 그래요. 그러니까 사격 성적이 좋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우리나라에 우선 사기업부터 종용할 게 아니고 공공기관에서도 관심과 배려만 있으면 선수 몇 명씩 팀워크 이뤄서 상비로 기를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국력으로 보아서 전 그래줬으면 좋겠고. 중국 같은 데는 메달을 딸 때, 아파트에 뭐에, 말도 못해요. 그러니까 선수들이, 쟤네들은 그런데, 일본에서는 이런데, 이러면서 이건 뭐야, 따고 가도 뭐 그만인데. 태극기 한번 올리고 나서 일반 선수들이 금메달 따서 올라가는 애국가나 태극기나, 우리 장애인 선수들이 금메달 따서 올라가는 태극기 다 똑같은 한민족인데 우리는 왜 이렇게 찬밥이냐, 이런 절규를 들을 때 장애인 선배의 입장에서 참 마음이 아프죠. 그런데 다행이도 2년 전에, 장애인 체육이 정식으로 문화체육관광부가 체육의 일부로 장애인 체육이 들어갔기 때문에 그래도 이번에 베이징에서 코리아 팀 하우스 그런 것도 운영도 하고 아주 많이 돋보이는 그런 운영으로 이어졌다는 것에 대해서 장애인의 한 사람으로 굉장히 감사드립니다.
박인규 : 재능 있는 장애인 선수들이 생활에 신경 쓰지 않고 스포츠에 전념할 수 있는 그런 환경을 기업이나 정부에서 만들어줬으면 좋겠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 오늘은 2008 베이징 올림픽 폐막식에서 '황연대 성취상' 시상식을 가진 황연대 전 부회장을 초대해 '황연대 성취상'의 의미와 장애인 복지를 위해 헌신해 온 그녀의 삶에 대해 얘기 나누고 있습니다.
황 선생님은 장애인으로는 최초의 여의사라는 타이틀을 갖고 계시고요, 또 소아마비 아동이라든가 장애인들을 위한 활동가로도 활동 많이 해오셨는데, 본인의 지난 삶을 돌아볼 때 의사라고 생각하십니까, 활동가라고 생각하십니까.
황연대 : 사실은 의사보다 활동가죠.
박인규 : 굉장히 일찍, 한국소아마비아동특수보육협회라는 것을 만드셨을 때가?
황연대 : 1965년입니다.
박인규 : 실례지만 그때 연세가 얼마셨어요?
황연대 : 제가 스물일곱? 여덟?
박인규 : 그럼 굉장히 젊으신 나인데, 협회, 사회단체를 만든다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해서 그런 협회를 만드실 생각을 하게 된 겁니까?
황연대 : 사실 저는 고3 때 문과반이었어요. 그런데 제 남편, 고등학생 동급생인데 고3 때 만나게 됐어요. 그런데 첫 번 만남에서 저를 앞으로 무슨 과를 하겠냐고 해요. 그래서 저는 몸도 약하고 해서 문과 쪽이라고 했더니, 자기는 우리나라 상의 군인들을 위해서 재활촌을 구상중이니까 자기 하는 일을 돕기 위해서 의학이나 약학을 해서 도와달래요. 그러면서 앞으로 공부하고 기반 잡고 10년 후에 만나재요. 그래서 제가 같은 동급생으로 저 사람은 성한 사람이고, 나는 소아마비 사람이고, 어릴 때부터 그런 마음을 가졌지만 실제로는 의사라는 건 생각도 못 해봤어요. 그러고 10년 후에 만나자고 하니까, 아, 부끄럽다, 재활이라는 단어를 그 사람한테서 처음 들었어요.
박인규 : 그분은 비장애인이시고?
황연대 : 비장애인인데, 나중에 얘기로는 625사변 후에 중상, 그분도 중상. 그래서 저한테 상의 군인들이 그렇게 멸시 받는 걸 받은 거예요. 상의 군인들이 오면 물도 끼얹고 그런 걸 봐서 거기서 굉장히 울분을 느꼈대요. 그래서 상의 군인들을 위해서 재활촌을 구상중이래요. 그래서 이 사람은 생각하는 사람, 같은 동급생으로 내가 저 사람보다 정신연령이 10년이 뒤졌네, 제가 부끄러운 걸 느꼈어요. 그래서 두 달 후에 입시하는데 마지막 날, 담임선생님한테, 저 그냥 의과대학 넣어주세요. 마지막 판에 의과대학을 가게 됐어요.
박인규 : 그 당시에 이화여대 의과대학에 갈 때 장애인이 어렵지 않았습니까?
황연대 : 지금도 참 면접에서 학장 선생님이 공부 열심히 해라, 그러셨던 게 그렇게 잊혀지지가 않아요. 잊혀지지가 않고, 그렇게 관심, 사랑 가져주신 거 잊혀지지가 않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의과대학을 하면서 너무 너무 힘이 들어서 내가 왜 이 사람을 만나서 내가 의과대학을 왔나. 성격부터가 체력부터가 이겨내지를 못하니까. 그래서 본과 1학년 때 시체해부 첫 시간에 놀라서 만 3일을 식음을 전폐하고 그런 적이 있었어요. 그랬더니 아버지께서 네가 예과 2년 마치고 본과 와서 네가 이렇게 이러면 너는 인생 낙오자다. 그런데 낙오자 소리에, 내가 왜 낙오자가 돼? 네가 지금 전과를 해도 남보다 2, 3년은 뒤지고 그러는데. 내가 왜 낙오자가 돼, 그럼 나 다시 메스 사게 아버지 돈 줘, 그래서 의료용품점에 가서 사고 그 다음 번에 시체해부시간에 들어갔는데 한 며칠 동안은 구경만 하다가, 그 정도로 심하게 홍역을 치르면서 견디기 힘든 6년을 견뎠습니다.
박인규 : 오히려 적성으로는 의사보다는 활동가가 맞으시군요.
황연대 : 아니죠. 문과 쪽이었겠죠. 그래서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나부터가 사회적으로 서는, 그런 장애인이라야 내가 어디 가서 남을 설득할 수 있는 입장이다. 그러니까 내가 의사 노릇하면서 나 혼자, 내 가족하고 잘 산다는 그걸 떠나서 내가 나서야겠다. 그러면서 그때 그렇게 시작을 했습니다.
박인규 : 선생님이 크실 때만 해도 소아마비 환자들이 많았는데, 요즘은 많이 줄었습니까?
황연대 : 지금은 거의 발생 안 합니다. 벌써 20년 전부터.
박인규 : 상의 군인 재활시키겠다는 그분하고는 결혼을 하신 겁니까?
황연대 : 만 10년 후에 했습니다.
박인규 : 약속을 지키신 거네요.
황연대 : 그럼요. 그리고 협회 만들 때도 제가 세브란스 병원에 있을 적이었는데, 와서 전관 만들고 뭐 만들고 그런 거 함께 하고 그랬습니다.
박인규 : 어떻습니까. 30년 넘게, 40년 가까이 장애인들을 위해서 활동을 해오셨는데, 아까도 말씀하셨습니다만 예전보다는 여러 가지 편견이라든가 차별이 없어졌는데, 그래도 여러 가지 어려운 점이 있을 것 같아요. 황 선생님이 보시기에 우리 사회에서 장애인들을 위해서 일반적으로 필요한 게 어떤 거라고 보십니까. 가장 중요한 게.
황연대 : 우선 각자가 자기 삶을 살 수 있게끔.
박인규 : 장애인들이 자활할 수 있도록.
황연대 : 네. 기회 주어지는 거. 그게 참 필요한 일이죠. 왜냐하면 사회에 세금을 내면서 살 수 있는 그런 인생으로 뒷바라지 해주는 어떤 사회 구조가 되면 참 좋겠습니다.
박인규 : 제가 알기로는 각 대기업 같은 데 무슨 장애인 고용 의무가 있다고 들었는데, 그게 아직 부족한가 보죠?
황연대 : 그 숫자가 너무 적고, 중증 장애인은 제외되고. 그런 문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또 장애인 자신도 자기가 적성에 맞고 능력에 맞는 일을 찾아서 자격을 높이 갖춰서 그 기업으로 하여금 쓸 수 있게끔 그렇게 노력을 해야 되는데 그렇지 않고, 덮어놓고 들어갔다가 나랑 맞지 않아, 그러고 나오는 경우도 있을 거고요. 그래서 여러 가지가 쌍방의 문제 같습니다.
박인규 : 최근 약간 현안이긴 한데, 시각 장애인들께서 안마사 부분 때문에 데모도 하시고 잡혀도 가시고 그러는데, 그거 보시면 어떻게 풀어야 될까요.
황연대 : 장애인 입장에서 장애인들의 그런 모습을 보면 제일 가슴이 아프고 한편으론 부끄러운 사회의 단면이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나오기 전까지 서로, 쌍방이 설득하고 대화하는 기회를
많이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박인규 : 대화를 통해서 했으면 좋겠다. 어쨌든 베이징장애인올림픽에서도 황연대 성취상이 지정이 됐고, 장애인들의 권익 향상, 지위 향상을 위해서 할 일이 많을 거 같은데요, 혹시 못 다 하신 말씀 있으시면 앞으로 계획이라든가 정리의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황연대 : 저는, 우리나라 동계 올림픽 유치가 두 번 실패했거든요. 88서울장애인올림픽 때 만들어진 상이 동계 올림픽 우리나라 평창에서 이뤄지면서, 북한 선수도, 장애인 선수도 참여하고, 이러는 게 살아서 제가 보는 게 꿈인데요, 우리나라에서 한번 동계가 더 유치가 된다면 내 나라, 내 땅에서 이런 일이 이뤄지게끔 했으면 좋겠다는 꿈이 있습니다.
박인규 : 평창이 두 번이나 고전했다가 정말 아깝게 떨어졌는데.
황연대 : 그럼요. 그것도 너무 아슬아슬하게.
박인규 : 평창 동계 올림픽이 유치가 돼서 황연대 성취상을 우리나라 장애인이 받는,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말씀 고맙습니다.
황연대 : 감사합니다.
박인규 : 박인규의 집중 인터뷰, 오늘은 2008 베이징 올림픽 폐막식에서 '황연대 성취상' 시상식을 가진 황연대 전 부회장을 초대해 '황연대 성취상'의 의미와 장애인 복지를 위해 헌신해 온 그녀의 삶에 대해 얘기 나눴습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는 매주 월-금요일 오후 2시30분부터 3시까지 KBS 1라디오97.3MHz)에서 방송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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