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박인귭니다. 우리에게 '섬진강 시인'으로 잘 알려진 김용택 시인에게는 또 하나의 직업이 있습니다. 바로 전북 임실군 덕치면 덕치초등학교 선생님인데요 김용택 시인이 지난 8월30일 수업을 끝으로, 자신의 모교이자 삶의 터전이었던 이곳에서 38년 동안의 교사생활을 마무리했습니다. 또, 정든 학교를 떠나면서 아이들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로 동시집 '너 내가 그럴 줄 알았어'를 출간하기도 했는데요. 오늘 박인규의 집중인터뷰에서는 김용택 시인을 초대해 아이들과 함께 행복했던 지난 38년, 그의 교사생활을 되돌아보고 그의 시에 대해 얘기 나눠봅니다.
오늘 박인규가 주목한 이 사람은 김용택 시인입니다. 김용택 시인은 1948년 전북 임실 출신으로 1970년 전북 임실군 청웅면 청웅 초등학교 옥석 분교에 부임해 교사생활을 시작했고 이듬해 덕치초등학교로 전근해.. 지난 8월 말까지 38년 동안 교직생활에 몸담았습니다. 1982년 창비 21인 신작 시집 <꺼지지 않는 횃불로>에 「섬진강 1」외 8편을 발표하면서 시인으로 데뷔했으며 주요 저서로는 시집 <섬진강>, <맑은 날>, <누이야 날이 저문다>, <그 여자네 집> 등과 산문집 <작은 마을>, <그리운 것들은 산 뒤에 있다>, <섬진강 이야기> 등이 있습니다. 제6회 김수영문학상과 제12회 소월시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김용택 시인이 지금 KBS 전주 총국에 나와 계신데요.
전주 연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박인규 : 반갑습니다. 저희가 사실 웬만하면 덕치초등학교까지 가서 인터뷰하고 싶었는데 못 가서 안타깝습니다. 요즘 가을답지 않게 덥긴 합니다만 섬진강은 가을맛이 납니까?
김용택 : 여기도 굉장히 날씨가 더워요. 덥더라도 가을을 누가 막습니까. 가을 들판과 강변, 산천이 햇볕으로 노래지면서 가을 색깔들이 서서히 드러나는데 가장 먼저 작은 들판에 있는 논가랑의 벼들이죠. 흘러가는 강물과 샛노란 벼가 노랗게 잘 어울리고, 또 섬진강가에는 억새가 많아요. 그 억새가 하얗게 피어나고 있죠.
박인규 : 8월 30일에 마지막 수업 하시고 38년간 다니던 학교를 그만 두셨는데요. 매일 출퇴근하시다가 출퇴근 안 하시면 이상하실 것 같은데
김용택 : 퇴직하신 분들이 다 너도 한번 당해봐라, 그런 얘기들 했는데. 나는 안 그런다 했는데 9월 1일이 돼서 아침에 약간 허둥댔죠. 겁이 또 나요. 어딘가 캄캄한 어떤 국면이 있어요. 그런데 어떻게 9월 1일을 잘 지내고 보니 견딜 수도 있겠구나. 우리가 또 언젠가 한 번은 직장에서 벗어나 누구나 다 견디는 일이기 때문에, 요즘은 조금 안정돼가는 편입니다.
박인규 : 제가 알기론 선생님들 정년이 62세인가로 알고 있는데 조금 빨리 퇴임하셨어요.
김용택 : 제가 조금 복잡한데, 집나이는 본래 태어난 나이는 48년생입니다. 그런데 호적이 잘못돼서 51년생으로 뒤로 물러났어요. 호적을 누가 잘못 기재했죠. 5년 빨리 퇴임했죠.
박인규 : 38년간 주로 덕치초등학교에서 가르치셨고, 지금 가르치는 학생들의 아버지 어머니도 가르치셨다는데 퇴임하신다고 하니까 학생들이나 학부모들이 굉장히 말렸을 것 같은데요?
김용택 : 초등학교 어린이들은 선생님 오고 가는 것에 별 관심이 없죠. 그런데 저는 정이 많이 들었잖아요. 그 마을에서 태어나서 자라면서 거기서 아이들과 같이 지냈고, 지금 가르쳤던 아이들의 아버지 어머니도 가르쳤기 때문에, 아이들이 내가 학교를 안 온다 하니까, 어떡해요... 할 정도의 반응을 보였고. 학부형들은 제가... 대체적으로 다 친구들이잖아요. 제자들이고 친구들인데. 나이가 다 됐으면 김선생 애썼으니까 잘됐다. 그만 나와서 자유롭게 살아라. 이런 얘기도하고 좀 더 있지 그래, 이런 이야기도 하고
박인규 : 본인이 덕치초등학교를 나오셨고 거기서 38년간 선생님을 하셨고 참 보기 드문 경우 같은데 8월 30일에 마지막 수업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김용택 : 전교생을 모아 놓고 하는 건 좀 그렇고. 일주일 동안 3학년 4학년, 5학년 하루하루 수업을 했죠. 마지막으로. 작년에 제가 가르쳤던 2학년 어린이들... 지금 3학년이 됐는데 그 어린이들을 제 앞에 앉혀 놓고, 11명인데... 마지막 수업이라고 칠판에 쓰고 수업을 했죠 한 10분간. 그런데 2, 3학년 어린이들이 깊이 있는 말을 알아듣겠어요? 저는 마지막으로 사람하고 친하게 지내자. 우리 주위에 있는 자연하고 친하게 지내자. 이런 말을 했죠
박인규 : 전 학년을 상대로 마지막 수업을 하신 건데, 선물을 하나씩 줬다고 해요.
김용택 : 의도된 건 아닌데 마침 그때 제 동시집이 나왔어요. 그 동시집이 한 3년 정도 써 모은 건데, 그 책 내용들이 우리 학교... 덕치초등학교 어린이들 이야기가 내비치는 게 많아요. 그래서 아이들에게, 아이들 이름도 제대로 나오고. 뭔가 아이들에게 마지막으로 손에 쥐어주고 나와야 서운하지 않을 텐데, 그렇게 생각했는데 마침 동시집이 나와서 한 권씩 사인을 해서 나눠줬죠.
박인규 : 동시집 내신 건 이번이 처음이신가요?
김용택 : 아닙니다. 이번에 세 권쨉니다.
박인규 : 그렇군요. 그 학교 학생들 이름이 다 나오니까 학생들 참 좋겠어요.
김용택 : 어떤 아이가 보더니, 선생님 그런데 내 이름은 왜 없어요? 하더라고요
박인규 : 정년퇴임하신 것 관련 언론보도를 보니까 마지막 수업 하는 날 동네 학부모들이 마지막 선물이라고 사과, 복숭아 보내주시고 그랬던데...
김용택 : 그 날 제가 시골집 왔다갔다 하는데, 사과를 기르시는 분이 있어요. 그 분은 지금은 학부형이 아닌데 그 분의 아들과 딸을 가르쳤죠. 그 분이 마침 학교에 선물로 사과를 많이 가져오셨어요. 그래서 내가 수업을 한다고 하니까 우리 교실에도 좀 보냈죠.
박인규 : 선생님은 처음 70년도에 선생님이 되셨는데 어떻게 해서 선생님을 하시게 된 겁니까?
김용택 : 그 무렵에, 참 웃기죠. 1969년, 68년, 70년 그 무렵에 초등학교 교사가 전국적으로 굉장히 모자랐어요. 너무 모자라서 교사 수급을 할 수 없으니까 고등학교 졸업한 사람들에게 시험 볼 자격을 줬습니다. 시험을 봐서 합격이 되면 4개월 동안 강습을 시켜서 바로 교사로 내보내는 제도가 잠깐 있었어요. 그때 제가 시골에서 고등학교 졸업하고 오리를 키우다가 망해서 서울로 갔다가 서울에서 한 달 동안 낭인 생활을 하다가 집에 들어왔는데, 놀고 있는데 친구들이 와서 시험 보러 가자. 난 안 간다고 했더니 사진만 찍으라고 해요. 그랬더니 원서도 자기들이 학교 가서 쓰고 광주 교대에 가서 원서도 접수해 왔죠. 시험을 봤죠. 그런데 시험에 돼서 생전 생각지도 않은 교사생활을 시작하게 된 거죠.
박인규 : 처음 시작은 꼭 선생님이 돼야겠다는 것보다는 그야 말로 생업 차원에서
김용택 : 그렇죠 우연히 그냥. 친구들 따라서 강남 간다고 하잖아요. 그런 식이었죠
박인규 : 그렇게 시작하신 초등학교 선생님을 38년이나 하셨고 더 중요하게는 주로 덕치초등학교에서 보내셨어요. 한 학교를 고집한 특별한 이유가 있었습니까?
김용택 : 특별한 이유는 없고 제가 집이 거기기 때문에 걸어다니는 게 굉장히 좋았죠. 제일 첫 번째는 그거고 시골에 사는 게 편했어요. 걸리적거리는 게 별로 없잖아요. 바쁠 필요도 없고 농사 짓는 사람들 옆에 살면 굉장히 재밌어요. 그래서 시골에 살게 됐죠. 단 그거죠. 시골에 사는 게 편했고 교사기 때문에 다른 데로 멀리 갈 필요가 없잖아요. 서울로 전주로 가고 다른 데로 간다고 해서 월급 많이 주는 것도 아니고. 그냥 자연스럽게 거기 머물러서 살아야겠다 생각한 거죠.
박인규 : 예전엔 남자들은 야망이 있어야 된다고 가급적 도시로 가려고 하는데 선생님은 약간 시골 체질이신가봅니다.
김용택 : 촌놈이죠
박인규 : 70년도에 처음 덕치초등학교 부임하셨을 때는 학생이 많았겠네요
김용택 : 그렇죠. 내가 거기 졸업할 당시에는 전교생이 150명 정도 됐어요. 그런데 내가 선생님이 돼서 들어갔더니 전교생이 700명이었습니다. 굉장히 많았죠. 교정이 바글바글하죠.
박인규 : 거기도 3부제하고 그랬습니까?
김용택 : 시골엔 그런 건 없었죠.
박인규 : 최근에는 몇 명이에요?
김용택 : 정확히 잘 모르겠는데 전교생이 45,46명 정도 됩니다.
박인규 : 한 학년에 열 명 안 되네요
김용택 : 그렇죠. 어떤 반은 3명, 5명도 있죠.
박인규 : 처음 선생님 하실 때하고 지금을 비교하면 그야 말로 격세지감을 느끼시겠습니다.
김용택 : 그렇죠. 제가 시골에서 오랫동안 고향에서 선생 하면서 가장 가슴 아팠던 건 학교에 아이들이 점점 줄어드는 것. 그리고 어떤 마을에는 아이들이 하나도 없어요. 그래서 그게 가장 가슴 아팠죠. 서너 명이 될 때까지 제가 거기 있었기 때문에 정말 가슴 아픈 일이 많았죠.
박인규 : 엄마 아빠가 없고 할아버지 할머니가 키우는 아이들이 또 그렇게 많다면서요?
김용택 : 조손가정이 덕치초등학교뿐만 아니고 전국적으로 그런 현상이죠. 농촌학교에서 가장 큰 문제 중 하나가 조손가정이죠
박인규 : 엄마 아빠들은 돈 벌러 가신 건가요 도회지로?
김용택 : 시골 살다가 아버지를 따라 이농해서 거기서 학교를 다니다가 경제적 기반이 없는 사회적 기반이 없잖아요. 시골에서 가난하게 산 사람들이 여러 어려움이 많겠죠. 그래서 아이들을 자기들이 책임질 수 없어서 시골 어머니한테 보낸 거죠. 할머니한테 느닷없이 오게 된 거죠.
박인규 : 도시에서 못 키우니까 할머니가 좀 키워 주시오.
김용택 : 그런데 초등학교 1,2학년들이 느닷없이 환경이 시골로 바뀌면 굉장히 충격적이죠.
박인규 : 우리가 농촌 하면 뭔가 서정적이고 시골의 정취 이런 것만 생각하는데 그런 사회 경제적 어려움이 있군요.
김용택 :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정말 농촌사회가 우리 사회의 모든 문제를 종합적 복합적으로 안고 있는 아주 힘든 것이죠.
박인규 : 그런데 선생님, 주로 초등학교 선생님 하시면서도 2학년 담임을 고집하셨다고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김용택 : 처음에 2학년을 2,3년 가르쳐 보니까 2학년이 재밌어요. 2학년 아이들은 자기들 생각을 정말 거침없이 표현합니다. 1학년과 조금 다르죠. 그리고 진지하고 진정성이 있고. 또 거짓말을 뻔한 거짓말을 해요. 중요한 건 2학년 아이들은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모든 도구, 모든 생활에 필요한 도구들을 다 빼앗아버려도 빈손이 돼도 뛰어 놀 땅만 있으면 굉장히 행복합니다. 2학년 어린이들은 뛰어 놀 땅만 있으면 행복한 인간이죠. 또 그들은 진실하죠. 내가 진실할 때 다가오고 진실하지 않으면 그 아이들은 다가오지 않습니다. 영혼이 깨끗한 풀잎 같은 인간들이 2학년이죠.
박인규 : 1학년은 뭘 좀 모르고 2학년은 발랄하고 3학년 되면 약간 노숙해지나요?
김용택 : 그렇죠. 약간 닳아지고 눈치보고 약간 거짓말도 하게 되죠
박인규 : 38년 선생님 하시면서 26년 동안 2학년 담임을 하셨다고 하는데, 그동안 아이들 가르쳐오면서 선생님만의 교육철학이라고나 할까요?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김용택 : 교육철학이라기보다 저는 교육이라는 건 가르치면서 배운다는 거죠. 가르치면서 동시에 내가 배우는 게 교육이죠. 가르치다 보면 나무가 아니고 돌멩이가 아니고 감정이 없는 것들이 아니고 감정이 있는 인간을 상대로 하루를 산다는 건 굉장히 행복한 일이에요. 특히 영혼이 깨끗한 어린이들과 지낸다는 건 행복한 거죠. 그러다 보니 내가 아이들에게 뭘 가르쳤다기보다도 그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아이들이 내게 수많은 것들을 가르쳤죠.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행복하다는 것도 가르쳐줬고, 또 끊임없이 세상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눈을 저한테 갖게 해줬죠. 저는 굉장히 큰 공부를 했습니다.
박인규 : 어린이는 어른들의 스승이란 말도 있는데 정말이군요. 어떤 인터뷰를 보니까 38년 동안 선생님이 교사생활을 하면서 덕치초등학교 안에 있는 살구나무처럼 살아왔다. 이게 무슨 얘깁니까?
김용택 : 어디 신문에 그런 게 쓰인 기억이 나는데, 제가 초등학교 1학년 들어왔을 때 그 살구나무가 청년이었죠 말하자면. 막 자라는, 거의 다 자란 청년이었는데 그 살구나무에 꽃이 굉장히 많이 피어서 살구가 굉장히 많이 열려요. 그 살구들을 따서 아이들을 나눠줬는데 늘 살구나무 꽃이 피면 주위에서 제일 먼저 살구나무 꽃이 피잖아요. 그 꽃이 피기 시작하면 마음이 설레기 시작하죠. 그 꽃을 보면서 여선생이 한 명 있었는데 그 여선생에게 편지를 썼죠. 연애편지를. 그 살구나무와 같이 제가 평생 살았다고 하는 그 글이, 제게는 아주 실감있는 글입니다.
박인규 : 38년 동안 몸담았던 교정을 떠나시니까 생각이 많으실 텐데, 요즘의 아이들 교육환경 보시면 어떤 생각 드세요?
김용택 : 초등학교 어린이들에게 경쟁을 제일로 치는 경쟁교육을 시킨다는 건, 제가 봤을 때... 저는 좀 격하게 표현하면 끔찍한 일이죠. 적어도 초등학교 때는 정말 더불어 살아가는 아이들과 친하게 재밌게 노는 시간을 갖게 해줘야지요. 요즘 어린이들 놀 줄을 모릅니다. 특히 도시 아이들은 시골에 갖다 놓으면 전혀 뭘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요. 시골 친구들과 도시 친구들이 만나면 어떻게 뭘 해야 할지, 놀 줄을 모릅니다. 그건 무슨 말이냐면 상대가 없는 거죠. 대상이 없는 삶. 나 홀로, 공부는 잘 하고 시험은 잘 보겠지만 더불어 사는 삶의 빈 공간이 너무 커요. 저는 지금 경쟁제일주의 교육이 우리 어린이들의 아름다운 싹, 그러니까 인성교육이 빠져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박인규 : 요즘 어린이들이 남들과 경쟁은 정말 잘 하는데 남들과 더불어 살거나 더불어 노는 법은 잘 모르는군요.
김용택 : 노는 건 잘 몰라요. 이게 간단한 문제, 소소한 것 같아도 가장 큰 문제가 놀 줄 모르는 거죠.
박인규 : 걱정입니다.
여기서 김용택 시인의 낭송으로 최근 동시집 '너 내가 그럴 줄 알았어'에 수록된 동시 '나는 안 운다'를 직접 들어보겠습니다.
- 나는 안 운다. 김용택 지음
여치가 운다.
귀뚜라미가 운다.
지렁이가 운다.
개구리가 운다.
먼 산에서 소쩍새가 운다.
나는 안 운다.
절대 안 운다.
박인규 : 네. 방금 들은 이 시는 어떻게 보면 슬픈 내용도 있을 것 같은데 어떤 사연입니까?
김용택 : 제 동시집 속에 들어 있는 주된 내용들이 도시에서 시골로 와서 엄마 아빠 없이 할머니와 사는 아이들의 안타까운 마음들을 동시로 많이 썼죠. 그 중 한 편인데, 어린이가 느닷없이 어느 날 시골로 왔죠. 시골에 대개 할머니 혼자 사시는데, 할머니와 같이 살면서 어느 날 자연에 눈을 뜨기 시작합니다. 처음엔 자연을 몰라요. 그런데 서서히 나무에 바람 부는 것, 물 흘러가는 모습이라든가 콩, 벼가 자라는 모습들에 서서히 눈을 떠가기 시작하죠. 그런데 이때는 아마 어린이가, 9월 쯤 됐겠죠. 그때는 주위의 여치 울음소리라든가 자연의 소리를 듣기 시작하죠. 그때 여치가 울고, 적막한 밤에 여치가 울고 귀뚜라미, 지렁이, 개구리도 우는데, 전부 다 우니까 나도 사실은 울고 싶겠죠. 울음이 머리 꼭대기까지 찼죠. 그렇지만 나는 이제 안 운다는 강한 삶의 의지를 보이는, 그런 어린이의 마음을 쓴 겁니다.
박인규 : 자연도 알아가면서 의지도 다지는. 선생님은 많은 분들이 섬진강 시인이라고 하는데 문단에 등단하신 걸 보니 조금 늦깎이신 것 같아요. 어떻게 시를 쓰시게 됐습니까?
김용택 : 초,중,고등학교 때는 책을 접할 기회가 없었어요. 시골이기 때문에. 그런데 중학교 가서 영화를 굉장히 많이 봤어요. 저만큼 많이 본 사람이 드물더라고요. 순천 극장이 하는데 거기 들어오는 모든 영화는 거의 다 봤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선생을 한 지 한 3,4개월 지났는데 그 산골 학교까지 월부책을 가지고 왔어요 책 파는 사람이. 도스토예프스키 전집을 샀죠. 그 책을 단 심심해서 읽어봤더니 그 책 속에 수많은 세상이 있고 수많은 인간들이 살아 숨쉬고 있었죠. 책이 이렇게 수많은 인간들이 사는 세상을 보여주는구나. 차츰 책에 빠져들기 시작했죠. 책을 보다가 더 보고 더 보고 하다 보니 생각이 많아지는 거죠. 그건 나를 생각하게 되면서, 처음에는 내 자신이 뭘까, 인생이 뭐냐, 어떻게 살아야 되냐, 이런 생각이 들었는데, 나를 생각하다가 또 점점 책을 많이 읽다 보니 우리 마을이 보였죠. 우리 어머니 아버지의 삶, 우리 마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이 인류를 생각하게 된 거죠. 그렇게 생각이 너무 많아지니까 머리가 복잡하잖아요, 그래서 글을 쓰게 된 거죠. 생각들을 정리하다 보니 시가 됐어요. 그때 제가 시를 쓸 때는 내 주위에 시를 쓰는 사람이나 시에 대해서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 전혀 없었죠. 그러다 보니 스스로 모든 문제를 풀어가고 깨달아가고 뉘우쳐가고 절망하고 좌절하면 다시 일어서는 것들을 반복하다 보니 문단에 나가는 것이 굉장히 더디고 늦어졌죠.
박인규 : 그럼 등단하신 나이가 우리 나이로 35인가 그러시던데 그 전에 많이 써놓으셨다가 발표하신 겁니까?
김용택 : 그렇죠. 글을 쓴다는 게 시를 써서 친구나 선생님에게 보여주면서 이게 시입니까? 이렇게 물어볼 사람이 없잖아요? 그러다 보니 시를 써가면서 끝까지 간 거죠. 그러면서 섬진강1을 써놓고 보니 이게 시인가보다. 그런데 또 써져요. 써지고 또 써져서 열댓편을 모아서 출판사로 보냈죠.
박인규 : 섬진강을 처음 발표했을 때, 시인으로 데뷔했을 때 평단의 평은 어땠어요? 기억나십니까?
김용택 : 그때 저는 시골에 있어서 잘 모르는데 문단에 대해서. 신문에 월평이 있었는데, 농촌 현실을 제대로 표현하고 있구나, 이런 칭찬의 말을 들은 것도 같고. 오랜 후에 시집을 내고 문인들을 만나봤을 때 도대체 이 사람이 어디서 뭘 하는 사람인가 굉장히 궁금했다지요.
박인규 : 82년도면 사실 5공 치하기 때문에 이른바 민중시라든가 전투적인 시가 많을 때였는데 거창한 시도 많고
김용택 : 그때 제 시들도 그런 민중들, 농민들의 삶의 아름다움과 기쁨을 노래한 게 아니고 그들이 어떻게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면서 살고 있는가. 그들이 어떻게 국가로부터 제도권으로부터 많은 핍박과 억압을 받고 살았는가. 그런 역사적인 이야기들이 담겨 있죠.
박인규 : 섬진강 주변의 사람들을 보고 쓰셨군요.
김용택 : 그렇죠. 제가 살고 있는 우리 마을 사람들의, 마을에 있는 여러 가지 삶의 모습들이 자연스럽게 글로 옮겨왔죠.
박인규 : 최근 한 강연을 하시면서, 요즘에는 너무 크고 거대한 것만 중요하게 여기는데 작은 것에 대한 감동이 없다.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김용택 : 그렇죠.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삶 자체를 가만 들여다보고 있으면 우리가 정말 제대로 살고 있는가 의심이 들 때가 많죠. 왜냐면 우린 너무 거대하고 화려하고 위대한 것만 찾죠. 크고 거대한 것들은 결국 사람들을 유혹하고 갈등을 불러일으키는데 작고 사소한 것들을 보면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거죠. 예를 들어 길가에 피어 있는 풀꽃 한 송이를 보면 굉장히 신비하고 신기하잖아요. 하늘에 떠 있는 달을 보면서 와 정말 달 좀 봐라 하는 감동이 없는 거죠. 우리가 서울에 있는 높은 빌딩을 보면서 야 굉장히 아름다워, 이런 말 안 하잖아요. 겁나게 높다. 겁이 나는 거죠. 우리가 살고 있는 건 사실 크고 거대하고 위대하고 화려하고 찬란한 것들은 겁나는 것들이에요.
박인규 : 행복은 작고 사소한 것에 있다. 선생님을 그만 두셨으니까 앞으로 시를 많이 쓰실 건가요? 앞으로 계획은 어떠십니까?
김용택 : 그동안 시간에 쫓겨서 못했던 게으름을 약간 피우고, 책을 좀 많이 읽고 싶죠. 또 그동안 못했던 제가 하고 싶은 공부가 두어 가지 있는데 그 공부를 좀 차근차근 하고 싶고. 또 글을 많이 쓰고 싶죠.
박인규 : 저희가 예전에 신영복 선생님을 한 번 모신 적이 있는데, 사람도 나무 같아서 한 군데서 자라야지 자꾸 왔다갔다하면 안 좋다고 하시더라고요. 김선생님은 정말 한 군데서 나무 같이 사셔서 어떻게 보면 행복하시겠다는 생각이 들고요. 마지막으로 김용택 시인의 팬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김용택 : 그동안 저에게 베풀어줬던 사랑이 사실은 너무 과분했죠. 삶은 그러하지 않은데, 어떻든 그게 그렇게 비춰져서 제게 많은 사랑을 주셨습니다. 그 사랑에 충분히 보답을 못했죠. 남은 삶도 여러분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진실을 좇아가면서 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동안 참 행복했습니다.
박인규 : 그동안 섬진강 선생님 겸 섬진강 시인이셨는데 앞으로 섬진강 시인으로 남으실 것 같습니다. 앞으로 좋은 글 많이 부탁드리겠습니다. 오늘 말씀 고맙습니다.
김용택 : 감사합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 오늘은 최근 정년퇴임을 한 김용택 시인을 초대해 아이들과 함께 행복했던 지난 38년, 그의 교사생활을 되돌아보고 그의 시에 대해 이야기 나눴습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는 매주 월-금요일 오후 2시30분부터 3시까지 KBS 1라디오97.3MHz)에서 방송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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