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기독교 이야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기독교 이야기

[김지하의 '촛불을 생각한다']

그 엄혹했던 반유신운동 시절 나와 함께 고통받고 나와 함께 서로서로 눈물로 모셨던 신·구 기독교의 모든 선배, 친구, 후배들에게 보내는 편지.
  
  김지하 모심
  2008년 8월 12일 오대산에서

  
  오대산에 와서
  
  나는 지금 오대산에 와 있다.
  
  오대산 월정사에 와 묵고 있다.
  
  오늘 새벽(2008년 8월 12일 오전 5시 정각), 문득 잠에서 깨어 예수 생각을 한다. 신·구 기독교 말이다.
  
  절에서 웬 기독교이야기인가?
  
  풍수지리에 반궁수(叛躬手)란 말이 있다. 일종의 역설인데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무사가 동쪽으로 말을 달리며 서쪽으로 활을 쏘는 것이기도 하다.
  
  요즈음 촛불세대 용어로는 쌍방향 통행이고 동학 용어로는 '아니다ㆍ그렇다-그렇다ㆍ아니다'인데 이것은 다시 컴퓨터 용어이기도 하다. 그레고리 베이트슨 문자로 치면 '이중구속(double bind)'인가? 분열인가? 밥 먹으면서 똥 싸는 생각하고 똥 싸면서 밥 생각하는 건가? 그런가?
  
  아니다.
  
  도리어 그 반대다. 역시 그레고리 베이트슨 문자로 하면 '이중통합(double massage)'이니 바로 참 중도(中道)인 것이다.
  
  내가 지금 여기 이 오대산에 와 앉아있게 된 내력의 저 첫 끄트머리 중 하나가 생각난다. 역시 인터넷세대요 촛불인 내 아들이 서가에서 열심히 화엄경을 찾고 있는 것을 본 것이다. 오대산의 다른 이름이 '화엄성지(華嚴聖地)'다.
  
  오대산은 화엄경을 바탕으로 하는 '일승원교(一乘圓敎)'의 불교가 신라 자장(慈藏) 이후 크게 자리잡은 곳이다. 산 자체가 참으로 원만하고 원융한 덕산(德山)이다. 백두대간 제일로 치는 한국 풍수의 으뜸이요 옛말엔 최고 명승으로서 불교가 크게 일어날 땅이라 했다.
  
  화엄경은 한 마디로 인간만 아니라 우주만물, 온 세계가 세계 자신의 감추어진 부처의 본질을 수천 수만 가지 독특한 방식으로 스스로 깨닫고 그 깨달음을 다양하게 현실적으로 실천하는 참으로 굉장한, 거대한 빛과 생명의 세계다. 세계는 광활한 그물이며 그 수많은 그물코마다 수없이 많은 깨달은 보살들이 일어나 각각 자기 스타일로 그 깨달은 빛의 세계와 생명의 실상을 법문(法問)하며 그 법문이 장엄하게 서로 공명하는 파천황의 광경으로 가득찬 대선정(大禪定), 대해탈(大解脫), 대자유(大自由)의 세계다.
  
  나는 지난 촛불의 '온라인-오프라인 화백(和白)'의 저 시끄러운 쌍방향 통행들과 광장의 직접민주주의에서 희미하게 화엄경을 느꼈다.
  
  또한 그 때 동시에 느꼈다. '우주 만물이 물질의 굴레에 갇힌 채 자기들을 해방해줄 메시아가 올 날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는 성경 구절이다.
  
  메시아는 누굴까?
  
  물질 자신이다.
  
  물질 자신이 물질 자신을 인식하고 해방한다.
  
  사실은 물질 안에 있는 신과 영과 생명이 그 주체로서 물질 자신을 자기조직화하여 해방하는 것이겠다. 이것이 곧 창조적 진화다. 화엄경의 진리와 근본에서는 같다.
  
  동학의 본주문(本呪文)인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의 바로 그 '만사지(萬事知)'가 곧 성경에서의 '만물해방'이요 '화엄' 그것이다. 만사, 즉 인격-비인격, 생명-무생명의 수수억천만 수(數)의 그 많고 많고 또 많은 층층의 경우들이 모두 다 스스로를 알고 동시에 그 앎을 계시받아 크게 열림이니 그렇지 아니한가.
  
  이 '화엄'의 땅에서 그 '만물해방'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상적 귀결이자 실천의 시작을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망사지'로 연속시키고 싶은 것이다.
  
  소망교회
  
  한국 기독교는 소망교회로 인해 한꺼번에 싸잡혀서 인기 대폭락 중이다. 세간에, 특히 불교쪽에서는 MB와 소망교회를 '역행보살(逆行菩薩)'이라고들 부른다. 사사건건 거꾸로 가 역으로 큰 일을 돕는 기이한 역할이란 뜻이다.
  
  소망교회가 촛불을 사탄으로 매도한 것이나 MB정부가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스님을 몰상식하게 검문한 것은 바로 역행 중에도 역행이다. 너무했다.
  
  그러나 거기에 대한 불교 반응 역시 별로 마음에 안 든다는 사람들이 많다. 거의 매일 플래카드를 들고 항의시위하거나 규탄 발언을 일삼는 것 말이다. 심지어 일부에선 '소신공양', 즉 분신(焚身) 이야기까지 흘러나오니 한 마디로 무리수다. 그렇게 해서는 '역행보살론'이 무색해진다.
  
  역시 세간 이야기다.
  
  차라리 조계종과 지관스님이 스스로 부처님 앞에 나아가 삼천배로 크게 마음을 아래로 내리고 '모든 것은 우리의 덕이 없음'이라고 참회하는 것이 도리어 불교다운, 어른스러운 대응이 아니냐는 것이다. 나도 거기엔 찬성이다.
  
  그러나 소망교회의 잔망스러움에 대해서는 도무지 아무 말도 없는 것이 역시 세간이다. 촛불을, 그것도 6월 29일 절정에 오른 좌우 양쪽 폭력의 악순환사태 훨씬 이전의 그 예쁘고 아름답고 평화로운 촛불의 경건함을 두고까지 사탄이라고 매도한 것은 너무해도 정말 너무한 것이다. 그러니 차라리 입을 닫겠다는 쪽이다.
  
  조계종이나 소망교회나 사실은 전혀 성질이 다른 것이긴 하나 이런 반응들은 여떤 의미에서 우리 사회와 역사와 정신계에는 안 맞는 행동이다. 한국의 다종교 사이의 원탁평화는 전통이 있고 정평이 나 있는 우리 민족의 위대성의 하나다.
  
  3.1운동을 잊지 말아야 한다.
  
  강증산 선생이 세계 여러 종교들 간의 통일신단(統一神壇)에 토대한 세계조화정부(世界造化政府)론을 제기한 것도 우리 사회의 이러한 근원적 융합성에서 비롯된 넉넉한 자신감의 일환이었다.
  
  한국 기독교의 현대사
  
  나 자신의 과거도 포함된 이야기다.
  
  지난 유신독재 시절 한국 신·구 기독교의 반유신 민주화운동과 사회개혁운동은 너무나 유명하고 너무나 탁월한 역사다.
  
  지학순 주교의 고통의 힘과 김수환 추기경의 영도력, 정의구현사제단의 신부·수녀·신도들의 그 불철주야의 혼신의 정열로 이루어진 장구한 반독재운동, 그리고 운동 전 진행과정에서 불가침의 성소(聖所)로 승화된 명동성당의 상징성은 6.10항쟁의 성공적 결과 이전에 이미 인간 및 만물해방의 거룩한 한 이정표였다.
  
  물론이지만 한국 개신교에 소망교회만 있는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와 정의, 평화를 위해 분투 노력해온 KNCC, 산업선교회, 농민회, 빈민운동 등 그 성공사례 역시 부지기수다.
  
  유영모, 함석헌의 동·서 친화적 기독교 사상이 항일운동 당시부터 이미 있었고 특히 장공 김재준(長空 金在俊) 목사 및 경동교회와 크리스찬 아카데미의 강원용 목사와 함께 또 서남동·안병무·김경제의 민중신학, 문익환·박형규 목사 등의 헌신으로 앙양된 기독교장로회와 한신대 류의 대운동사는 결코 망각될 수 없는 빛나는 기념비다. 그 역전의 용사들은 지금 어느 지점에서 어떤 거친 꿈을 꾸고 있는지?
  
  나는 그들이 어떤 점에서는 오히려 만물해방과 불교보다 훨씬 더 열정적으로 촛불의 계기를 발전시켜 대화엄과 만사지의 개벽전선에 참다운 생명, 평화의 길을 열어놓고야 말리라는 기이한 확신에 사로잡힌다. 전례 때문일까? 이미 촛불이 꺼진 그 참담한 6월 29일 밤과 새벽, 깊은 절망에 젖어있던 촛불들에게
  
  "외로웠지요. 이제 우리가 위로하러 갈게요."
  
  역시 사제단이다. 이런 신속하고 애틋한 편지구절 쉽게 나오지 않는다.
  
  지난 엄혹한 유신독재 시절 거리에서 매 맞고 지하실로 끌려가고 시커먼 감옥에 투옥되고 군홧발에 짓밟히면서도 줄기차게 저항하던 그 결단과 실천적 지혜의 축적, 그리고 밤마다 촛불 앞에서의 끊임없는 기도에서만 영그는 그 연약하면서도 뜨거운 사랑 없이는 나올 수 없는 빠른 결단이고 아름다운 글귀인 것이다. 그리하여 6월 30일 촛불이 드디어 다시 켜진 것이다.
  
  이들을 이어 생명평화애호기독교 목사들이 엉뚱스럽게도 청와대 쪽을 돌아서 시청 앞으로 들어왔을 때 촛불들은 그 행위 안에 숨겨진 평화적 정치 행동의 새로운 메타포를 읽어낸 것이다. 역순(逆順)이었고 정치적 상상력이었으니 새 문화혁명의 공중 불꽃같은 것이었다.
  
  최근 사제단은 정동 프란체스코 회관에서 촛불 미사를 다시 열고 그 길로 7명의 촛불이 숨어있는 조계사를 향해 행진했다. 역시 정치적 상상력이니 거대한 만물 해방을 부르는 또 하나의 생명평화의 촛불인 것이다. 어떤 독특하고 슬기로운 액션이 숨은 채 자라고 있는 것일까?
  
  최근 한 목사가, 끊임없는 저항과 투옥으로 이름난 한 목사가 내게 전화를 걸어 "나 이제부터 율려와 동학 쪽으로 기독교를 결혼시킬 거요"하고 말했다. 익산 원광대학교 강의 때 만난 역시 긴 저항으로 뼈가 굵은 한 유명한 YMCA 총무 왈.
  
  "앞으로 기독교는 <흰 그늘 기독교>로 발전할 겁니다."
  
  율려! 동학! 흰 그늘!
  
  이 새파란 별들은 무수한 무수한 저 너른 벌판의 이름 모를 꽃들로 장식한 대화엄의 예감이요 압축이다.
  
  기독교가 그 별빛의 인도로 그 꽃밭을 찾아가는 새 예수의 길을 가겠다는 것이다. 그 모습은 과연 미래에 어떤 빛과 삶으로 오실 것인가?
  
  예감의 단계
  
  현대 서구의 거대한 여러 세계 문명사가들 가운데서도 아주 독특한 분인 가톨릭 쪽의 크리스토퍼 도우슨은 이런 말을 하고 있다.
  
  "세계 근대사 가운데 르네상스 이후 최고 최대의 사건은 16세기 마테오 리치의 베이징 상륙이다."
  
  왜?
  
  그때 중국에 도착한 예수회의 마테오 리치는 바티칸과 예수회 본부에 끊임없는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중국에 와 보니 이곳엔 이미 동양 나름의 철학, 과학, 신화와 역사와 예술이 왕성하고 번화하다. 그들 나름의 세계관, 가치관이 거의 완성 단계다. 그들의 개념과 문맥 안에 기독교 신학을 대담하게 격의(格義)시키지 않으면 토착화 선교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답변은 '어림 없다' 한 마디 뿐이었다고 한다.
  
  크리스토퍼 도우슨 왈,
  
  "만약 그때 마테오 리치의 간청이 용납되어 대담한 동서양 문화융합이 이루어졌다면 세계 문명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과연 무엇이 달라졌을까?
  
  지금 우리들 모두, 인격-비인격, 생명-무생명 모두가 앓고 있는 우주적 대혼돈을 뚫고 나갈 혼돈 그 나름의 질서에 의한 만물해방, 화엄적 대해탈, 후천개벽에 의한 만사지의 가능성 같은 것 아니었을까?
  
  훗날 1904년경 전주 모악산 아래 구릿골 광제국 문간방에서 평화적 후천개벽을 위한 천지공사를 집행 중이던 강증산 선생이 세계 모든 종교들의 통일선단을 구축한다고 했을 때 후천개벽 시대의 상징적 기독교 종장에 '리마두', 즉 마테오 리치를 임명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촛불이 막 켜질 무렵 대학생 자살자가 급증하고 있는 현실 때문에 특강을 위해 서강대학교 생명문화연구소를 방문했을 때 만난 몇몇 예수회 신학자들, 그러니까 마테오 리치의 후예들인 그들로부터 놀라운 공부 소식을 듣고 참으로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유불선과 기독교의 통합으로 유명한 동학 공부를, 그것도 아주 깊은 수준으로까지 파들어간 그들의 전혀 새로운 방식의 격의 이야기를 한 시간여에 걸쳐 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것을 격세지감(隔世之感)이라고 하는 걸까?
  
  기독교 쪽으로만 본다 해도 탁월한 신학적 동서 융합의 예감은 바로 예감단계 그 자체로서도 이미 엄청난 영적 확신과 실천적 용기를 촉발시킨다. 본디부터 확고한 신학체계 없이도 희망하고 투신하는 것이 기독교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창조적 진화론 1.
  
  세상이 다 아는 이야기지만 나는 한 때 카톨릭 신자였다.
  
  지학순 주교님과 함께 반유신투쟁 당시 감옥에 들어가 7년여의 길고 긴 독방살이를 경험한다. 그때 거의 성경책도 안 주던 긴 암흑의 시절이 지나고 몇 년 뒤 책이 들어왔을 때 내가 참으로 깊이 탐독했던 책이 저 유명한 예수회 신부요 고생물학자이며 탁월한 진화론자였던 프랑스의 떼이야르 드 샤르뎅의 주저 <인간현상>이다.
  
  나는 그 책에서 우선 신의 창조론과 우주만물의 진화사가 결합되는 것을 보았다. 진화의 3대 법칙 중 앞의 두 가지가 '안으로 의식이 있고 밖으로 복잡화가 있다(inward consciousness, outward complexity)'는 것인데 안에 있는 의식, 영, 신이 밖에 있는 물질을 복잡화, 조직화하는 과정이 곧 진화라는 것이다.
  
  그때 나는 화들짝 놀랐다.
  
  수운 최제우 선생의 동학과 그 기초원리가 똑같았기 때문이다.
  
  동학사상의 핵심은 주문(呪文)에 있고 주문도 본주문(本呪文) 맨 앞에 있는 '시천주(侍天主)'의 '시', 즉 '모심'이란 한 마디에 있다고 널리 알려져 있는데 거기에 대한 선생 자신의 해설에 의하면 그 모심의 세 가지 뜻 가운데 처음 두 가지가 바로 떼이야르의 그것과 똑같았기 때문이다.
  
  '안으로 신령이 있고 밖으로 기화가 있다(內有神靈 外有氣化)'가 그것이다. 기화(氣化)가 곧 떼이야르의 복잡화(complexity) 개념의 동양적 표현인 것이다.
  
  어떤 이는 '놀랄 것까지야 없지 않은가'라고 말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음 세 가지를 생각해보자.
  
  첫째, 동학은 동양 초유의 진화론이다. 선생의 마지막 노작인 '불연기연(不然其然)' 편을 보라!
  
  둘째, 이것은 선생의 단순히 일방적인 공부의 결과가 아니라 전해 1860년 4월 5일 11시에 내렸던 신의 계시 내용이다. 창조적 진화론 그 자체다.
  
  셋째, 1859년에 발표된 찰스 다윈의 '종의 기윈' 바로 일년 뒤의 계시 내용이다. 그런데 다윈 기술을 연이어 뒤집어엎은 두 개의 진화론, 즉 떼이야르 진화론과 에리히 안치 이후의 자유의 진화론 양자가 함께 결합된 것이 바로 동학의 진화론이란 것이다.
  
  앞의 두 마디 뒤에 그 세 번째가 떼이야르의 또 하나의 명제인 '결합은 특수화한다(Union differentiates)'를 뒤집은 '융합의 개체적 인식과 실천(各知不移)'이기 때문이고 한 발 더 나아가 이 세 번째는 현대적인 자기조직화 진화론의 '개체성을 잃지 않는 분권적 융합'보다 개체 문제에 있어 훨씬 더 적극적이라는 점 때문이다.
  
  현대적 삶에 더 가깝다 할 것이고 최근 '통섭'이니 '온생명'이니 하며 다시금 고개 드는 소셜 다위니즘의 에코 파시즘에로의 악용위험을 저지할 수 있는 그야말로 동서융합의 참다운 창조적 진화론이란 점.
  
  더욱이 바로 그 통섭론 쪽이 이에 반발하여 예컨대 개미들의 집단자연 생태는 완전 지리멸렬이지만 결국 그것은 보이지 않는 어떤 커다란 전체적 통섭력에 의해 겨우 그 의미와 목적을 가지는 것을 증거로 들어 자연의 객관적 질서 제일주의를 앞세워오는 역공에 대답의 단초를 이미 마련하고 있다는 점.
  
  자유의 진화론 역시 떼이야르 진화론의 '의식-복잡성' 이론을 대전제로 앞세우면서도 세 번째의 '결합특수화' 이론을 객관적 자연현상에서까지 전면 부정할 수 있고 나아가 통섭이나 온생명 따위 전체주의를 과학적 객관으로서 완전 격파시키기에는 자신들의 '개체-융합'이나 '개체발생선행'론이 불가피하게 가진 우연성, 돌연변이, 다양성, 자유, 돌발성, 창발성 등을 필연성으로까지는 밀어붙이지 못하고 있는 과학사적 한계에 대응하여, 현대의 생태학 논쟁에서와 같이 일종의 '자유자연'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
  
  말하자면 수운 동학이 '모심' 해설의 바로 그 세 번째인 '융합의 개체적 인식과 실천' 앞에 조건적으로 '한 세상 사람(一世之人)'을 전제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 세상 사람, 즉 현대인류가 자각적으로 '각지불이(各知不移)'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오파린 변증법과 같은 외삽법(外揷法)이 전혀 아니다. 바로 신의 계시내용이다. 그러므로 '창조적 진화론' 그 자체라고 내가 감히 언명하는 것이다. 이 점 과학적 객관주의나 실증성에 약간은 더 기울었던 떼이야르 진화론의 한계를 근원적으로 넘어서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그저 그냥 그렇고 그런 신비주의일 뿐인가?
  
  수운 선생은 이 경우에 대해 '앎이란 것은 진리를 스스로 공부해 알면서 동시에 그 앎을 계시로서 받는 것(知其道而 受其知)'이라고 말한다. 혜강 최한기(惠崗 崔漢綺)가 주장하는 '추측(推測)과 신기통(神氣通)의 결합'과 거의 같은 길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동아시아의 일반적 공부 방법이기도 하다.
  
  창조와 진화의 통합적 인식은 현대 유럽문명의 가장 큰 과제이자 전 인류의 문제이며 기독교의 사활적 숙제다.
  
  이른바 지구사와 세계사의 대혼돈(Big Chaos) 자체가 그것을 거의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점은 역시 자유의 진화론 자체의 한계와 함께 통섭론, 온생명론의 (한계라기보다는 도리어 원천적인) 오류를 넘어서는 지름길이 되는 셈이다.
  
  왜냐하면 통섭이니 온생명이니 하는 주장 밑에 만약 그 나름의 신관이 있다면 그것은 전혀 잘못된 망상이거나 극도로 낡아빠진 구닥다리 신학을 못 벗어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감옥에서 그때 나는 바로 이 공부의 결과로 카톨릭이라는 객지로부터 동학이라는 내 고향으로 귀향할 수가 있었다. 동학은 증조부 이래 내 집안의 서럽고 서러운 피투성이 신앙체계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귀향길에서도 카톨릭이 반드시 머지않은 날 유불선 삼교의 현대적 종합인 동학과의 불꽃튀는 파트너십에 의해 16세기 마테오 리치의 전 인류사적인 창조적 격의의 숙제를 해결하리라고 믿고 있었다.
  
  지금 그날들이 바로 눈앞에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 그것은 크게는 불교, 그것도 선(禪)과 화엄학쪽으로 다시 다가가고 있는 듯하다.
  
  오대산에 와 문득 잠에서 깨어 바로 '기독교 이야기'를 쓰기 시작하는 한 이유일 것이다.
  
  창조적 진화론 2.
  
  떼이야르 드 샤르뎅의 오랜 중국 체류는 인상적이다. 그러나 창조적 진화론이라는 과학사상 이외에 독특하게 드러난 그의 동양적 인식체험 같은 것은 아직까지 별로 연구된 적이 없다.
  
  어떤 사상적 거인의 경우 그에 관한 새 시대 나름의 연구에서는 때때로 그의 주류사상의 대체계 말고 쪼각쪼각의 곁가지들에서 오히려 번뜩번뜩 새로운 사유의 촉매들이 나타나기도 한다. 떼이야르의 경우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 것일까?
  
  역시 어려운 시절의 동아시아 카톨릭이었던 이벽(李檗)이나 정다산(丁茶山) 등의 신관과 우주관 또는 역사사회관, 정치관에서 또한 이런 가능성은 없는 것일까? 개신교의 경우는 물론 너무나 유명한 유영모ㆍ함석헌이 있으니 더 다른 할 말은 없다.
  
  서양의 정통 기독교 사상과 동양과의 교섭, 접촉과 융합과정은 어떤 종류, 어떤 형태든 간에 그 자체로서 이미 연구대상일 수 있다. 유럽과 미국 등 서양 사회에 '동풍(East Turning)'이 불고 있는 때이기에 더욱 그렇다. 특히 중국이나 일본이나 인도와는 또 달리 강한 하느님 신앙과 드넓은 불교철학, 그리고 고대 풍류도 이후 지속적인 생명사상의 땅이기도 한 한국이라는 특이한 풍토이기에 또한 그렇다.
  
  지난 반유신운동시절 한국 신·구기독교 전체, 특히 카톨릭의 그 치열하고 장구한 민주·민족·개혁운동의 저류에 오직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결정의 원칙적 카톨릭 세습만이 작동하고 있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한국 민중신학에 대한 진솔한 평가는 아직껏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남미 해방신학과의 관련도 충분히 평가되지 않았다. 지금 와서 문제시되는 생태신학과의 연관 또한 완전히 건성이다. 이것은 개신교쪽도 사정이 마찬가지다. 민중신학은 이제부터라도 다시 촘촘한 평가가 있어야 한다. 물론 생명신학과의 연관 속에서다.
  
  당시 '민중'자가 붙은 여러 학문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고 그것들은 그 무렵의 여러 조건에서이지만 그 나름의 독특한 창의력과 아픈 희망의 결실로서 나타난 것이므로 새 시대에 대한 예상치 못한 어떤 공헌이 숨어있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민중신학과 함께 당시 출현했던 '민주회복국민회의'와 같은 역사상 거의 새로운 형태의 정치조직, 이른바 '전선당'에 다시 눈을 돌릴 필요가 있다.
  
  공산당식으로 전위당이 지하에 따로 있고 그들에게 협조하는 합법적 인사들로 구성된 통일전선이 또 따로 있는 그런 전선, 그런 당이 전혀 아니라, 당 안에 예컨대 신부, 목사, 지식인, 자유주의자, 사회주의자, 민족주의자, 세계주의자, 스님들과 교무들, 온갖 예술가, 신비주의자, 과학자, 여성, 청소년, 노조, 농민과 비정규직 등이 어떤 새 시대 민중의 새 삶을 포괄적으로 원융하게 구상하고 통일하는 끊임없는 상호비판 및 토론과 합의 과정을 줄기차게 지속하고 당과 민중현실 사이에는 실무적 조절위원회가 있어 그때그때마다의 안건에 대해서 통일적, 또는 상호보완적 행동일치를 결단실천하게 하는 그러한 새로운 형태의 <전선당>말이다.
  
  희미하게나마 그 선례가 있다면 간디와 네루의 '인도국민회의'나 알제리 벤 벨라의 '민족해방전선당' 같은 것들이고, 국내에 비슷한 선례가 있다면 해방전 '신간회(新幹會)'의 좌우민족 협동전선같은 것이다.
  
  이것은 사실 이제부터 민중적 삶이 매우 생활생명적이면서도 동시에 매우 우주적 영적이고 복잡해서 근본적으로 중도적일뿐 아니라 아주 커다랗고 심오한 <원융성>을 보장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기 때문이다.
  
  생명은 복잡다기하면서도 원융한 것이다. 여기에 대해 민중신학의 선례를 이어받는 생명신학이 나와야 하고 또 여기에 부응하는 여러 생명운동파들의 원융 포괄적인 전선당이 출현해야 하는 것이다. 나아가 남북 통일도 해야할 것 아닌가!
  
  역사적 실례로는 동학의 포접(抱接)이나 육임제(六任制) 를 철저히 공부하고 활용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내 판단으로는 그때 반유신 쪽의 민중신학 등 '민중'자 붙는 새 학문과 국민회의류의 전선당이 해체되어버린 것은 바로 광주사태 때문이다.
  
  이해는 한다.
  
  그 피바다에서 뒤에 남겨진 젊은이들은 미칠 것 같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를 포함해서 모두들 투옥되거나 숨어있는 조건에서 마땅한 선배들을 찾을 수 없었던 그들의 눈에 민중 운운이 다 우스웠을 것이고 전선이 다 뭐 말라 비틀어진 것이냐였을 것이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이미 시효가 지난, 그러나 과격 일변도인 마르크스, 엥겔스, 스탈린, 부하린들뿐이었고 몸에 와 닿는 것은 해방 전의 저 지독했던 반민중적 엘리트 종파주의 혁명가들의 극소규모의 수많은 지하조직같은 것들 뿐이었던 것 같다.
  
  그 뒤의 저 지루한 행정들을 보면 그 과정과 동기들을 다 알 수 있다.
  
  이제 다시는 그 따위 반복을 허락해선 안 된다. 새 시대의 창조적 실천운동은 그야말로 기독교의 경우 창조적 진화론에 토대를 둔 기초 생활자치면서 동시에 거대한 새 문명창조의 날카롭고도 원융한 생명운동이어야 하고 평화운동이어야 한다.
  
  유럽 생태학과 녹색당은 해체단계다.
  
  나는 독일 현지에서 그 현실을 확인했다. 수십 종류를 헤아리는 분파들이 난립 하여 끊임없는 내부분쟁을 야기하고 거기에 그 분파와 분쟁을 무조건 통합하려는 낡아빠진 공동체주의자들의 효력 없는 시행착오의 되풀이 속에 무원칙한 연정 반복으로 끊임없는 이슈상실, 어젠다 상실로 인해 생태학과 녹색당은 지금 그 자체로서의 권태와 해체위기에 부딪히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내 관찰로는 바로 여기에 복병처럼 스며들고 있는 것이 보편화된 영성 고갈이요 그 고갈에 대한 동방 불교의 거절 못할 매혹의 손짓이 해체 자체를 촉진하고 있는 듯하다. 기독교쪽에서 본다면 창조론과 진화론의 결합이 말만 무성할뿐 실효가 없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 동아시아의 신·구기독교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카톨릭은 강렬한 생명교리를 갖고는 있다. 그러나 그 생명성은 인간에 한정되어 있다. 때문에 광범위한 생태계 오염과 기후변동, 전염병 창궐, 지구 및 우주의 대혼돈은 물론 에코·에티카까지 포함한 포괄적 대안을 못 내놓고 있는 형편이다.
  
  떼이야르 이후 광활한 규모의 생명신학을 추구해 온 토마스 베리 신부 등의 사상적 영향이 구미 사회와 비슷하게 국내에서도 차단 내지는 고립 또는 부옇게 흐려져 있다.
  
  이 가장 중요한 원인은 무엇일까?
  
  거기에 대한 근본주의적 부정 이전에 동쪽의 카톨릭 스스로 무엇인가를 열심히 시도해 봐야하는 것 아닌가?
  
  그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마테오 리치의 고민은 이제 소용 없는 것인가?
  
  하기야 최근에 들리는 바에 의하면 우주와 지구 전 생명계, 아니 누구 말처럼 인격-비인격, 생명-무생명 전체에 확산할 수 있는 교황청 나름의 포괄적인 생명회칙이 곧 발표되리라 한다. 기대해보기로 하자.
  
  그러나 역시 서강대에서 만나 신학자들의 마테오 리치 후계 작업과 사제단의 촛불 미사는 물론 새 회칙을 다 끌어안으면서도 그 회칙보다 필경 더 깊고 더 넓고 더 머나먼, 그리고 훨씬 더 날카로운 새 방향을 찾아가는 새 예수의 길이 되리라는 나의 예감에는 변함이 없다. 인류의 정신사에는 우연이 없는 법이다.
  
  창조적 진화론 3.
  
  개신교 쪽에 관해서 내 나름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한 마디를 꼭 하고 싶다.
  
  창조론과 진화론의 결합을 열정적으로 촉진하고 있는 독일 신학자이자 과학철학자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의 노력의 의미에 관해서다.
  
  <신학과 과학철학>이란 책에서 그는 창조론과 진화론의 상호 연계의 조건을 다음과 같이 나열하고 있다.
  
  ①생명을 향한 끝없는 '목마름', 또는 '비어있음'으로서의 영(靈), 즉 '네페쉬 하야(nephesh hajah)'의 전제
  ②신의 창조에 대한 '우연성'으로서의 창발적 진화
  ③생명진화의 '자발성'
  ④창조적 자기조직화의 '유기성'
  ⑤물질적 부패로부터의 '해방성'
  ⑥생명과 영성의 '충만성'
  ⑦진화의 창조적 단계마다의 '자유성'
  ⑧생명의 영이 '무한정' 주어짐(요한복음 3장 34절)
  
  요컨대 창조와 진화가 만나는 자리는 '빈자리'이어야하고 생기 넘치는 '혼돈의 진리'여야 한다는 것이겠다.
  
  마태복음 제5장이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이다."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다."
  "정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이다."
  
  내가 보기에 갈릴리 전도와 산상 수훈은 예수 가르침 가운데 가장 중요한 대전환의 매듭이다. 그것은 인간사만으로 끝나는 것인가?
  
  그 가르침의 대상들은 곧 '네페쉬 하야(마음이 비어있는 사람)', 다시 말하면 김일부 정역(正易)에서의 '꼬래비' 즉, 기위(己位)다. 물론 가난하고 외롭고 쓸쓸한 사람들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먼저 이 세상에서 천대받고 서 있을 자리를 용납 받지 못한 자들, 이십 세 미만 성인식 이전의 매 맞고 욕 얻어먹기를 밥 먹듯이 하는 십대 청소년과 어린이, 천덕꾸러기며 부엌데기며 성적 노리개에 불과한 여자들이 모두 그 중심부다. 그들이 바로 꼬래비, 즉 기위인 것이다.
  
  동서양 고전 어디를 봐도 똑같은 것은 전쟁 따위 내우외환이나 대재앙이 닥쳤을 때 그것에 대응하는 주체인 중년 군사·정치·종교·문화 전문가와 힘센 남자들이 그것을 맞받아 감당하면서 언제나 보호대상으로 걱정하는 것이 바로 이 어린이와 여편네들, 즉 꼬래비들, 기위다.
  
  그 기위가 임금처럼 정치 중앙 전면에 나서는 '친정(親政)'의 때가 다름 아닌 후천개벽의 때라는 것이다. 바로 그 개벽의 때와 산상 수훈은 직접적 연관이 과연 있는 것인가?
  
  세계 역사에서 바로 이 꼬래비들, 즉 기위인 어린이, 청소년, 여성들이 쓸쓸한 외톨이들과 함께 역사의 중앙 전면 즉 정치 문제에 우뚝 나서서 두 달 석달을 수만 명, 수십만 명씩 떼 지어 야단법석을 한 일은 이번 우리나라 촛불이 처음이다. 나는 그 넓은 광장에 켜진 수많은 촛불에서 텅 빈 마음들이 흘리고 있는 눈물을 보았다. 웬 일인가?
  
  바로 후천개벽의 때가 온 것이다.
  
  그것도 정의니 평등이니 자유니 민족ㆍ민중ㆍ개혁과 같은 정치ㆍ경제의 상투적인 구호가 아닌 먹거리와 생태계 파괴, 물, 건강 문제, 교육 등 생활과 생명을 들고나와 그것도 비폭력 평화 시위로 일관하여 몸과 노래와 축제의 문화로, 유머와 애교와 사랑의 메시지와 함께 몇 달을 지속한 인류사 최초의 일이다. 동서고금 역사 이래 내내 천대받고 괄시당하던 바로 그 그늘 속의 장본인들이 말이다.
  
  아까 이미 물었다. '그런데 그것은 인간사만으로 끝나는 것인가?'
  
  참말 개벽이라면 최근에 어떤 기이한 우주의 움직임이 반드시 있었을 것이다. 과연 있었는가?
  
  있었다.
  
  이상한 별이 떴는가?
  
  그 정도가 아니다. 자! 다시 정리하자.
  
  '정역'은 후천개벽의 때가 시작되면 '기위친정(己位親政)', 즉 맨 꼬래비로 소외되었던 것들이 한때 운이 나빠 산이나 물가에 도망가 숨어 있던 임금처럼 정치의 중앙 전면에 다시 나타난다고 했다.
  
  어린이, 여성들이 광장 민주주의, 직접 민주주의, 이상적 고대 정치인 화백 민주주의의 주역으로 등장했다.
  
  그러나 동시에 정역은 그때 3천년 이상을 서남쪽으로 크게 기울었던, 즉 소외돼 있던 지구자전축(이것이 바로 기위다)이 제자리인 중앙 전면으로 되돌아온다고 했다. 꼭 정치 중심인 그 꼬래비 임금처럼 말이다.
  
  그랬다. 무슨 일이 있었는가?
  
  쓰나미다.
  
  몇 년 전 인도네시아에서 26만 명이 한꺼번에 죽은 대해일이 있었는데 그것은 일부 서구과학자들에 의하면 지구의 대륙판과 해양판이 서로 충돌하여 발생한 일로 이 충돌은 지구자전축 이동에 의한 것이라고 보고되었다.
  
  그러나 서구의 주류과학계는 미신같은 소리라고 일축하였다. 그래서 아직도 라틴어 학명이 아닌 일본말 '쓰나미'로 그냥 그대로 있는 것이다. 공식 인정이 안 됐다는 뜻이다.
  
  또 있다.
  
  지구자전축이 중앙으로 복귀하면 바로 그 중앙인 북극에 이상 변화가 온다고 했는데 과연 몇 년 전 우주와 지구의 얽힘이요 연결고리인 북극을 형성하는 지리극(geographic pole)과 자기극(magnetic pole)이 서로 이탈하기 시작하며 대빙산이 대해빙을 시작하고 아득한 시간 동안 시베리아 동토대 밑에 묻혀있던 메탄층이 폭발하여 남반구 해수면이 기후과학계의 예상을 훨씬 초과하는 이상 상승의 변화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정역에 모두 예언된 사태들이다. 바로 '기위친정'이다.
  
  그렇다면 산상 수훈의 확장인 예루살렘 입성 이후 네페쉬 하야를 위해 십자가에 매달려 죽고 다시 무덤에서 부활한 예수의 사랑의 기적은 우주적으로 무슨 사건인가?
  
  예수가 죽었을 때, 다시 살아났을 때, 그리고 드디어 하늘로 사라졌을 때 이상한 지구의 변화를 말하는 사람들을 미쳤다거나 삼류 신비주의자 따위로 몰아세우는 속류 유물론자들은 지금 우리가 다루는 문제의 심각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다. 예수 사건을 모두들 '우주 진화사의 초과 달성'이라고 부르는 까닭이 그것이다. '초과 달성', 기위친정의 초과 달성이라면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 이제 촛불 이후 해야 할 일은 과연 무엇일까?
  
  정역은 '기위친정'을 '십일일언(十一一言)'과 '십오일언(十五一言)'으로 나눈다. 십일일언은 이십대 미만의 어린이, 청소년과 여성들이 정치 전면에 나서는 무위정치(無爲政治)의 시작이라는 뜻이고 십오일언은 이제껏 교양과 문화와 수양과 정치를 담당했던 선각자, 지식인, 종교인, 기성 전문 정치가는 한발 뒤로 물러나 십일일언의 무위정치를 위해 조용히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듯한 겸손한 태도로 그저 소리 없이 돕는다는 것이다. 전문 정치인의 이 경우는 물론 십일일언의 중심인 직접민주주의를 보조적으로 배합하는 어른스러운 대의민주주의로 후퇴하는 것이겠다.
  
  바로 이때에 단하(壇下)와 단상(壇上) 사이의 합좌(合坐)인 '팔여사율(八呂四律)'. '팔정사단(八政四壇)'의 화백(和白)이 이루어진다. 단 밑에서는 백성이 시끄럽고 단상에서는 성인이 고요하다는 것이다.
  
  이때 양자 뒤에 붙어있는 '일언'이 또 무엇일까?
  
  바로 이 일언 즉, '한마디'가 다름 아닌 노자의 '무위이화(無爲而化)', 고대 이상 정치의 비밀인 '아무위 이민자화(我無爲 而民自化)'. 설명하자면 '성인(聖人)인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데 백성이 스스로 정치를 다 한다'는 뜻이다. 이것이 바로 '한마디'인데 이것은 더 나아가 또 무엇을 뜻하는가?
  
  기독교 쪽에서 본다면 물론 '창조 질서'일 터인데 이 역시 창조적 진화론의 그윽한 비밀로부터만 짐작될 수 있을 뿐이다.
  
  '함이 없으면서 하지 아니함이 없음'이요, '하지 아니함이 없으면서 결국 함이 없음'이니 이른바 '하느님 정치'로 이것을 동학에서는 '역사의 진화에 일치하면서 동시에 마음을 비우고 이를 초월하는 것(合其德 定其心)'으로 정의한다.
  
  기독교 신학에서 이를 민중신학이나 국민회의 등 전선당 등과 관련시켜 본다면 역시 창조적 진화론으로서만 그 역사 신비적 상관관계를 비로소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실천 문제로 구체화하면 지난 4월 말부터 6월 중순까지의 첫 촛불과, 6월 29일의 폭력의 악순환을 끊고 나온 4대 종단의 지혜로운 새 촛불 사이의 기이한 역사 속에 압축된 '십일일언'과 '십오일언' 사이의 신비인 진화와 창조 사이의 관계가 된다.
  
  이 양자 사이의 실천적 연관은 역시 초기 동학사에서 그 탁월성이 입증된 '포(包-유불선 삼교 명망가들의 조직 아닌 모임으로 민중에 대한 큰 지혜와 도움과 보호의 소쿠리)'와 '접(接-일반 동학 민중의 생활운동으로서 '개체-융합'의 원리에 따른 계와 품앗이)' 즉 '포접제'의 이중적 생명성에 있다 하겠다. 옛말대로 '소쿠리 메고 품앗이 간다'는 실천 방식이 되는 것이다.
  
  지금 촛불은 국면 전환이 절실한 때다. 지금과 같은 피동상태를 자꾸만 질질 끄는 것은 전혀 지혜롭지 못하다.
  
  어찌해야 하는가?
  
  종교계, 특히 불교와 함께 카톨릭과 생명평화 애호 개신교의 평화의 대 문명사 창조의 보호막인 소쿠리를 메고 어린이, 청소년, 여성을 주체로 하여 가난하고 쓸쓸한 다수대중과 함께 한 사람을 위해 여럿이 힘을 몰아주는 생명가치의 구체적 실현인 여러 형태의 품앗이, 한 사람의 몫돈 마련을 위해 여럿이 돌아가며 공동저축하는 계로서 경제 토대를 만들어가는 새로운 생명경제운동에 나서는 것이다.
  
  이것이 문명과 삶을 바꾸는 전 지구적인 생명평화운동의 시작이다. 신시, 화백, 풍류. 이것을 경제적으로는 '호혜시장'이라 한다. 즉 이미 나타난 신시 그리고 영적인 생명의 문화인 풍류. 이것 역시 촛불의 축제 속에 그 단초가 있다. 그쪽으로 구체적인 방향을 잡아야 한다.
  
  하늘나라와 대화엄
  
  인간해방만 아니라 인격-비인격, 생명-무생명 모두를 우주의 공동주체로 거룩하게 모시는 새로운 영적 문화혁명만이 예수를 따르는 길일 것이다. 그리고 그 길만이 '만물해방'의 날을 당길 것이다.
  
  만물해방, 그것이 곧 '대화엄'이다. 대화엄이 다름 아닌 하늘나라다.
  
  그러므로 우주는 거대한 그물망이며 그 무수한 그물코마다 깨달은 보살 인간들이 각각 진리를 외치며 그 외침이 만물을 보편적 깨달음으로 네트워킹해가는 대자유, 대해탈이 곧 하늘나라일 것이고 태극·무극·황극 즉 삼태극의 지극한 성스러움일 터이다.
  
  동아시아의 신·구 기독교 신학은 아마도 화엄천국, 천국화엄의 비전을 선(禪)적 개벽(開闢), 또는 개벽적 선의 실천으로 이루어내는, 매일매일 여기저기 무수무수한 강물 속에 제 나름으로 하늘나라의 둥근 달이 비추고 드러나는 바로 그 후천(後天) 새 세계를 모두들 제 나름나름으로 집중적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나는 이것을 '화엄개벽'이라 명명하고 있지만 마테오 리치의 꿈과 떼이야르의 오메가 포인트가 결코 이것과 무관할 것 같지 않다.
  
  그러나 떼이야르의 마지막 진화점, 그 커다란 베흘림 수렴의 꽃은 단 한 송이로 너무 외롭다. 최후의 12만 몇천 만의 영적 행성의 승객명단 역시 너무 쓸쓸하다.
  
  수천만 우주, 수억천만 중생의 저마다의 꽃들이 수렴만이 아닌 확산, 확산만이 아닌 수렴, 그리하여 '대확충(大擴充, grand amplification)'의 역동적 균형의 장관 속에 슬그머니 피어나는 지극히 혼란스러우면서 지극히 아름다운 '네 개의 극단' 속의 천 떨기 꽃, 만 송이 푸른 별들이 땅과 하늘에 가득히 피고 뜨는 대개벽이 좋다.
  
  그러나 그것을 자기 조직하는 우주적ㆍ영적 네트워크의 주체인 신(神)은 반드시 판넨베르크 명제처럼 조건이 있다. 인간과 우주 만물이 제 안에 신을 모셔야한다는 조건이 있다.
  
  모심. 이것이 조건이다.
  
  모심. 이것은 그러나 신의 조건이기도 하다. 우리가 모시는, 모셔야 하는, 앞으로 모시게 될 수밖에 없는 신은 그 안이 절대적으로 텅 비어야 한다. 텅 빈 신만이 철저한 모심의 대상이요, 동시에 그 모심의 주체인 것이다.
  
  그래야만 하늘나라는 대화엄, 대자유가 된다. 그래야만 대화엄, 대자유는 하늘나라가 된다. 하늘나라에는 변증법이 없다. 컴퓨터에만 변증법이 없는 것 아니다. 후천개벽에도 없다.
  
  없다. 이 없음이 생생히 살아 있어야만 비로소 생명이고 영성이다.
  
  동학의 하느님은 무(無)다
  
  다시 16세기 마테오 리치로, 마테오 리치의 꿈을 쫓는 서강대 예수회 신학자들이 공부하는 그 동학으로 간다.
  
  어제는 서학의 충격을 흡수함으로써 동학이 성립한 것처럼, 오늘은 동학의 지혜를 터득함으로써 화엄기독교가 성취될 것을 예감한다.
  
  동학의 브랜드는, 그 오늘의 브랜드는 본디의 태극궁궁(太極弓弓)을 전복한 궁궁태극(弓弓太極)이다. 지극한 기운(至氣)이니 혼돈의 질서(渾元之一氣)다.
  
  최초에 서학은 태극의 지배 아래 사는 동학에게 궁궁으로 다가왔다. 오늘의 태극인 서학에게 동학은 오늘 그러나 단순한 궁궁이 아닌 전복된 동학 즉 '태극궁궁 아닌 궁궁태극'으로 다가간다. 다시 말하면 생명평화의 후천개벽으로 간다.
  
  동학은 창조적 진화의 주체인 한울을 모신다. 모심으로써 그 한울을 주체로 하여 창조적 진화를 각각 나름대로 자기조직화 한다. 모시는 그 한울을 '님'이라 부르며 부모처럼 친구사귄다. 높여 거리 두고 섬기면서 동시에 친구로 하나 되어 함께 창조한다(稱其尊而 與父母同事者也).
  
  그 님은 어떤 분일까?
  
  님은 수운에게 계시를 내렸지만 수운은 님을 단 한 번도 무엇이라고 규정한 적 없다. 단 한 번도 없다.
  
  없다.
  
  무(無).
  공(空).
  허(虛).
  
  동학의 한울님은 텅 빈 자리다. 주문 전체의 해설 가운데 주문 전체의 모심을 받는 그 주인공인 한울을, '님'이라 부르면서까지도 수운 최제우 선생은 동학의 가장 핵심사상인 그 '천(天)', 그 한울을 전혀 설명하지 않는다.
  
  어떤 개신교 신학자는 우연의 누락이라고 했다. 배고픈 이가 밥을 누락하는가?
  
  어떤 개신교 신학자는 고의적 침묵이라 했다. 한울님에 관해서도 고의가 통하는가?
  
  그렇지 않다. 전혀 그런 것이 아니다.
  
  왜냐면 그 없음은 곧 있음이 아닌 살아있음이요, 존재가 아닌 생존이기 때문이다. 생명과 영의 그 끝 없는 생성활동의 기초는 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울님을 가리켜 간혹 '활동하는 무'라고도 부른다.
  
  우리가 온갖 몸부림과 함께 공부할 때 선뜻 가슴에 다가오는 한 깨달음. 그것이 '살아있는 없음'이다.
  
  이제 한국의 기독교는 이것을 생각할 때가 되었다. 이것이 바로 촛불이다.
  
  이제 한국 기독교는 촛불을 바라볼 때가 되었다. 이제껏 자기가 해 온 촛불 바라보기를 바라볼 때가 된 것이다. 모심이 곧 촛불이다.
  
  그리하여 그것은 개벽이고 대화엄의 시작이며 드디어 하늘나라다.
  
  이 글을 마치고 나는 오대산을 내려가기 시작한다. 육수각 밑의 저 웅장한 물소리가 오늘 웬 일로 칭얼대는 아기울음소리 같다. 시뻘건 사천왕들이 미소짓는다. 전나무 숲들, 금강송이 노래부르기 시작한다. 광장의 젊은 촛불들처럼 '아침이슬'을!
  
  떠날 때가 된 것이다. 그래서 떠나는 것이다. 나는 이제 떠난다. 안녕!
  
  추신
  
  2008년 8월 14일 아침
  
  일산이다. 나는 이미 떠났다.
  
  나의 생각은 '아침이슬'을 부르며 떠났다.
  
  아침에 우체국으로 간다. 오는 (8월) 21일 홍성에서 열릴 한국 최초 유기농 공동체 정농회 특강 '새로운 생명운동의 길' 원고를 부치러 간다. 우체국에서 두 분의 여성 직원을 만나 인사한다. 내 몸 안에 살아 생동하는 '모심'의 잔잔한 물결을 느낀다. 두 분은 여러 차례 나의 최근 원고들, <프레시안>에 지난 몇 달 간 계속 게재되었던 촛불 관련의 '줄탁을 생각한다', '촛불을 생각한다', '나를 향한 제사와 내 마음이 네 마음', '육임제의 의미와 세 번 숨고 세 번 드러남', 운하에서 바다로! 횃불에서 촛불로! 마당극에서 마당굿으로!', '촛불과 생명 평화' 등 적지 않은 원고뭉치들을 사방으로 보내주신 분들이다.
  
  스스로 아시든 모르시든 그 분들 노고 안에 숨은 커다란 영적이고 우주적인, 생명운동과 문명사적인 의미를 가슴에 깊이 모시며 먹으로 정성스레 매화 두 점을 쳐서 선물한 바 있다.
  
  화제는 '팔여사율(八呂四律, 혼돈질서와 여성성이 주도하고 남성성이 보필하는 새 우주시대의 음악원리)'과 '여율시풍(呂律時豊, 여성성ㆍ혼돈성 주도의 남녀평등과 혼돈적 질서가 올 때 시절은 풍요한 낙원이 되리라)' 두 가지였다.
  
  우체국을 나서며 탈춤과 마당굿에서 쓰는 표현방식 중 '사방치기', '사방뿌리기'를 생각한다.
  
  나는 지금 마당 위에서 춤추며 노래부르고 있다. 촛불들처럼. 그리고 그 춤과 노래를 두 분 여성들이 사방을 치고 사방에 뿌려주고 있다.
  
  이것이 무엇일까?
  
  나는 '기독교이야기'를 복사집에 맡기고 왔다. 그 원고 또한 두 분 여성에 의해 사방치기, 사방뿌리기로 둥근 마당가에 둥글게 모여 앉은 여러분, 여러 여성들, 여러 어린이와 청소년, 쓸슬한 중년 대중들, 딴따라와 지식인, 종교인, 수련자들, 생명 운동가와 수많은 촛불들, 한울 믿는 사람들에게 퍼져나갈 것이다.
  
  이것이 무엇일까?
  
  동학에는 '명명기운 각각명(明明其運 各各明)'이란 말이 있고 또 '명명기덕 념념불망(明明其運 念念不忘)'이란 말도 있다. 이 역시 거대한 후천개벽의 운수와 그 실천적 현실을 사방에 뿌리고 각각 제 스타일로 보수한다는 것이고 그 확산은 반대로 끊임없는 마음 공부, 몸 공부로 수렴하는 '대확충(大擴充, grand amplification)'한다는 것이다. 동학의 '만사지(萬事知)'나 '대화엄'이겠다. 그러니 하나의 치료다.
  
  그런데 이것은 또 이 기독교 이야기의 문맥 속에서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나는 오늘 오후 원주에 가야 한다.
  
  돌아가신 박경리 장모님의 <토지> 완간기념일을 축하하는 '토지의 밤' 행사에 참가한다. <토지>는 한 마디로 '생명의 문학'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민족의 '흰 그늘', 그 어두운 한(恨)과 그로부터 솟아나는 눈부신 신명(神明)을 천지에 널리 사방치기, 사방뿌리기 하며 치료하는 확충의 진리다.
  
  이것은 오늘의 이 편지에서 무슨 뜻일까?
  
  내일은 8월 15일.
  
  누구네 억지처럼 건국절이 천만 아니다. 독립기념일이요 광복절이다. 지금 나는 우체국에서 복사집으로 가는 길 자그마한 커피 집에 앉아 이 추신을 마무리하고 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가?
  
  나는 이 편지를 내일엔 못 보낼 것이다.
  
  나의 좋은 신ㆍ구 기독교 벗들에게, 특히나 내가 좋아하는 무수한 수녀님들, 신부님, 목사님, YMCA, YWCA 간부들, 여성 목회자들, 부인들, 그 숱한 청년들, 어린이들, 비정규직 노동조합과 빈민운동가, 농민들에게 8월 15일 날짜로 모레 16일 또는 내주 월요일 17일에 보낼 것이다.
  
  왜?
  
  미리 전제한다. 시비 없기 바란다.
  
  나는 천만에 12사도가 아니다. 그럴 까닭도 없다.
  
  다만 기독교의 경우 그렇다는 것 뿐. 오해 없기 바란다.
  
  도대체 무슨 말 하자고 이리 뜸을 오래 들이는가?
  
  이제 됐다. 말하자.
  
  2008년 8월 15일 12시 날짜로 말하자.
  
  오스카 쿨만 이야기다.
  
  이 이야기 편지의 마지막이야기다.
  
  오스카 쿨만은 내 기억이 맞다면 금세기의 개신교 신학자일 것이다. 그는 서양의 일반적인 선형(線形)적 시간관, 즉 크로노스를 거부하고 그렇다고 '아이온'도 아니고, 또 고대의 '우로보로스'도 아닌, 꼭 대라면 그야말로 오늘 '기독교 이야기' 속의 '대화엄'이나 '만사지'에나 비교될법한 사방팔방 땅 끝까지, 그리고 시방(十方), 즉 상하(上下)인 영적 하늘의 빛(신명)의 세계와 죄체험의 그늘(한)의 세계인 지옥에까지도 계속 복음을 사방치기, 사방뿌리기하는 새로운 시공간적 확충의 선교론을 제기하였다.
  
  산상 수훈과 예루살렘 입성,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음(캄캄한 그늘, 恨)과 그로부터의 부활(눈부신 흰 빛, 神明).
  
  아, 그렇다!
  
  익산에서 만난 내 친구 YMCA의 유희영 총무가 입버릇처럼 말하는 '흰 그늘 기독교 복음', 그 아름다운 '촛불'을 우리 민족의 흰 그늘의 날 8월 15일 날짜로 사방팔방으로 밝혀보내고 동시에 안으로는 생각하고 생각하여 잊지 않는 촛불 공부를 계속하리라는 것이다.
  
  오늘 부디 오스카 쿨만을 잊지 말자!
  
  이 추신의 글이 100페이지가 아닌 99페이지에서 끝나는 걸 확인하며 나는 또 다시 숨 죽여 운다.
  
  왜 기독교 이야기는 눈물이 많은가?
  
  이제 희미하게 떠오른다. 오대산, 그 원만히 사방팔방 시방으로 퍼져나갈 푸른 별빛이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안녕.
  
  8월 14일 10시 40분. 모심.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