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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본가, 한국은 분가

[김운회의 '새로 쓰는 한일고대사'] <4> 다시 보는 일선동조론 ①

제 1 장. 다시 보는 일선동조론
- 여기서 한국이 보이니까 좋네 -


들어가는 말

우리 역사에서 이완용만큼이나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된 사람은 이광수 선생과 최남선 선생입니다. 이 두 분 모두 민족의 선각자로 큰 족적을 남겼으나 친일행각으로 인하여 반도쥬신(한국인)을 실망시켰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역사적 평가에 있어서는 공과(功過)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 허물은 이미 많이 드러난 상태이므로 이제는 우리 민족의 기원과 관련하여 최남선 선생의 생각을 들어봅시다.

최남선 선생은 1920년대 일본의 일방적인 일선동조론(日朝鮮同祖論)에 맞서고 다른 한편으로는 유교문화 속에서 형해화(形骸化)된 단군신앙을 부활시키려고 애썼습니다. 식민지 지식인으로서의 많은 고뇌와 번민이 있었으며 한편으로는 제국주의 일본에 협력하였지만, 단 한 가지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 바로 불함문화론(不咸文化論)입니다. 최남선 선생은 일본의 신도(神道)와 조선의 고신도(古神道)는 같은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여기서 한발 나아가 일본과 조선뿐만 아니라 몽골과 만주, 중앙아시아, 터키에 이르는 넓은 지역의 사람들이 태양을 신성시하고 일본의 신도와 대동소이한 신앙형태를 가지고 있다고 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불함문화권 이론입니다.

최남선 선생은 알타이 산맥, 사얀 산맥, 싱안링 산맥, 조선, 류우큐우 등의 광대한 지역은 [Pârk = 태양] 중심의 신앙과 사회조직을 숭배하는 만족들이 분포되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종족적인 상호관계는 알 수 없으나 문화적으로는 확실히 하나의 연계성을 가지고 있으며 단군이라는 것은 하늘을 대표하는 통치권자의 호칭이라는 것입니다.(1)

최남선 선생에 따르면, 단군이란 ''이라고 불리던 집단이 대륙에서 동으로 이동하여 신산(神山)을 정하고 그 주위에 '불' 또는 '나라'라는 이름의 취락을 만들었던 시대의 최고 지도자라고 합니다. 그리고 조선은 초기에는 송화강, 요하 유역에 있다가 남하하여 대동강 유역까지 왔고 도읍을 평양으로 정했다는 것입니다.(2)

일선동조론과 관계된 부분만 다시 검토한다면, 최남선 선생은 조선의 고유 신앙과 일본의 신도가 내용적으로 일치한다고 주장했는데 이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조선의 ''의 신도는 태양을 신으로 하고 군장(君長)을 신의 혈통으로 하는 신앙체계를 세우고 모든 생활은 이에 따르며 각 부족들은 1년에 한번 국중대회를 열어 하늘에 제사하고 큰일들을 합의하여 처리하였다고 합니다. 부여의 영고, 예의 무천, 한(韓)의 불구내(弗矩內) 등이 그들입니다.(3) 결국 이 같은 내용이 일본의 신도와 거의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최남선 선생은 불교와 유교에 의해 조선의 고유 신앙이 큰 타격을 받아서 조선의 본래의 모습이 사라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최남선 선생을 비판하지만 최남선 선생의 논리는 당시 일본 제국주의자들을 다른 식으로 크게 압박하는 이론입니다. 왜냐하면 한국의 고대신앙이 일본의 신도와 동일한데 이것이 일본에서 건너온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한국의 신도가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라는 논리이기 때문에 이것은 만세일계로 대변되는 일본 군부의 제국주의 논리와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지요. 최남선 선생의 이론과 논리는 극단으로 치닫고 있던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논리와 일맥상통하는 부분도 있었고 정치적으로 자의반 타의반 악용되기도 합니다.

아이러니한 말이지만 불함문화적 전통을 가장 오래 지속시킨 나라는 일본이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적인 행태가 많은 피해와 범죄적 행위를 낳았지만 1930년대 후반 일본은 만주국을 건국하면서 신정일체(神政一體)의 불함문화적 전통을 부활시킵니다.

1940년 7월 15일 만주국에서는 건국신묘를 창건하는 조서(詔書)가 발표됩니다. 새로이 건국된 만주국의 황제 부의(溥儀)는 건국신묘 진좌제(鎭坐祭)를 집행하였습니다. 당시 이 행사에서는 제사부(祭祀府)를 설치하여 천조대신(天照大神) 즉 아마테라스를 모시고 국가제사를 주관하게 합니다.(4) 특이한 일이죠. 근대국가를 건설하는 마당에 웬 국가제사부가 만들어지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것은 열도쥬신(일본)이 반도쥬신처럼 유교를 국가적 민족적 이데올로기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최남선 선생이 주장하는 불함문화권은 『대쥬신을 찾아서』와 관점상 유사한 부분이 많습니다. 다만 저는 그 이후의 많은 연구성과들과 이를 비교하여 좀더 친연성이 강한 특성에 주목하여 그 범위를 몽골 - 만주 - 반도 - 열도 등으로 한정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에 비하여 최남선 선생은 불함문화권을 인디아의 브라마(Brahma), 셈족의 바알(Baal), 바빌로니아의 벨(Bel), 로마의 불칸(Vulcan), 북구의 프리가(Frigga), 과테말라의 후라칸(Hurakhan) 등까지도 관련이 있다고 합니다. 제가 보기엔 이 범위가 지나치게 넓고 구체적이지 못해서 좀더 구체적인 차별성을 찾아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보는 것이죠.(5)

(1) 일선 동조론 : 일본은 본가, 한국은 분가

일선동조론(日朝鮮同祖論)이란 일본 제국주의 시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이론으로 일본과 조선(한국)의 조상이 같다는 것입니다. 이 말만 보면 제 생각과 꼭 같습니다. 그런데 결론부터 말하면 일선동조론과 제 생각은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가장 큰 차이는 일선동조론은 정치적인 목적으로 정교하게 설계된 데 반하여 제가 주장하는 한일동족론(韓日同族論)은 과학적이며 사실에 기반을 둔 분석이라는 점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볼까요?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이란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정치적 목적으로 일본과 조선인들이 같은 민족이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즉 일본과 한국은 태고 이래로 피로 맺어진 근친성을 가진 동문동종(同文同種)으로 불가분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다만 그 주 내용은 일본은 본가(本家)이고 조선은 분가(分家)라는 것입니다. 본가인 일본은 형편이 넉넉하고 문화국가가 되어있는 데 반하여 분가인 조선은 아직도 야만의 상태에 있고 가난하기 때문에 본가가 분가를 흡수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라는 것입니다.

한국과 일본이 동족이라는 말이 본격화된 것은 19세기 말부터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한국의 개화기 『독립신문』을 보면 일본에 주재하는 영국 공사 샤토의 견해를 소개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샤토 공사는 일본사람들은 외국에서 들어온 인종으로 일본 열도의 원주민과는 다르고 남쪽으로 처음 와서 점차적으로 원주민을 북쪽으로 몰아내었고 일본말과 조선말의 문법도 동일하고 사고방식이나 풍속도 같은 것이 많아서 결국은 한국인과 일본인은 같은 종족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일본제국주의 시대 당시 일선동조론은 과학적 사실에 입각해서라기보다는 정치적인 도구에 불과했고 일정한 원칙이 있어 이를 거역하면 호된 고초를 당해야 했습니다. 역사의 흐름이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가는 방향은 성립되지 않았으며 일본의 천황의 신성성을 부정하는 어떤 연구도 부정되었다는 점에서 학술적이고 과학적으로 볼 수 없는 것이지요.

예를 들면 구메쿠니 다케(久米邦武) 교수는 일본의 신도(神道)는 일본에서 전수되는 특유의 종교가 아니라 동아시아의 공통된 풍속인 하늘을 모시는 것의 하나라고 함으로써(6) 제국대학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일선동조론이 얼마나 정치적이었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논리는 천황이 하늘의 최고신이 아니라 많은 천손족의 무리들 가운데 하나의 제후(諸侯)에 불과하다는 의미로 해석된다고 하여 당시 신도가(神道家 : 신도학자들)들의 극렬한 비판을 받았습니다. 정치성을 띤 예가 아닌 비과학적인 경우로 이노우에 테츠지로(井上哲太郞)의 견해를 들 수 있습니다. 이노우에 테츠지로에 따르면, 일본은 혼성민족인데 북방 몽골 계통은 이즈모(出雲)이며 남방민족인 천손족이 이들을 정복하였다고 하였습니다.(7) 이것을 입증하는 근거도 제대로 없으며 사실과는 아무 연관이 없는 것이지요.

두 개의 나라의 민족이 같다는 근거로 들 수 있는 것은 주로 생물학적인 일치성과 언어·문화의 일치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생물학적인 일치성을 밝혀내려고 하면 생물학이나 생명공학의 상당한 발전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언어는 비교하기가 쉽기 때문에 많은 연구들이 있었습니다.

일선동조론 초기에 있어서 대표적인 언어관련 연구자는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와 가니자와 쇼사부로(金澤庄三郞 : 1872~ 1967)였습니다. 시라토리는 한국어와 일본어를 비교하여 서로 통하는 말로 이 두 언어가 분명히 우랄 알타이어라고 확신했습니다.(8) 그러나 후에 시라토리는 한국과 일본의 언어적 혈통적인 공통점을 인정했으나 국민은 그 밖의 환경 즉 외부세계에 대한 적응의 결과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였습니다. 따라서 후에 시라토리는 오히려 일선동조론을 거부합니다.(9) 즉 외부환경에 우수하게 적응된 일본 민족과 무지몽매한 한국인들이 하나의 민족이라고 볼 수는 없다는 것이죠.

가니자와는 일본의 언어학자로 일본어와 동양의 여러 언어를 비교 연구하여 『한일 양국어 동계론(同系論)』을 발표하였고, 사전 『광사림(廣辭林)』을 편찬하였습니다. 그런데 가니자와는 조선의 언어는 일본어의 하나의 분파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10)

다음으로 인종과 같은 생물학적인 문제를 살펴 봅시다. 선두주자는 요시다 도오고(吉田東伍)입니다. 요시다 도오고(吉田東伍)는 한국의 인종을 한반도 북부에 정착한 대륙계[陸種] 인종과 남부에 정착한 해안계 인종으로 유형화하고 이 해안계[島種] 인종이 일본과 동일한 인종이라고 주장합니다.(11) 일본 정부는 1910년대에 이르러 한국을 강점하는 논리로 한국과 일본은 완전히 같은 인종으로 볼 수는 없어도 그 신체적 특성이 유사하고 조선인들의 대다수는 일본인들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식으로 논리를 슬쩍 바꿔버립니다.(12)

1910년대 일선동조론의 논리의 주된 개발자는 도리이 류조(鳥居龍藏)와 야기 쇼사부로(八木獎三郞)입니다. 도리이는 주로 인종적인 분석을 통하여 야기는 주로 유물과 유적을 통하여 일선동조론의 논리를 폅니다. 도리이는 한국인들의 신체를 조사하여 북부아시아형과 남부인종으로 나누고 이 남부 인종의 근거지가 바로 일본이라고 하였습니다.(13) 그리고 야기는 토기의 손잡이의 유사성으로 한국의 남부, 규슈와의 유사성을 주장하였고 일본의 남양민족 기원설을 주장합니다.(14)

이것을 보면 이때까지 열도쥬신(일본인)들은 스스로를 북방의 쥬신계열로 보지 않고 남방계로 보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들이 일관되게 한반도 남부인과 일본 열도의 동질성을 강조한 것은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와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들의 논리는 대체로 유사하지만 분명한 것은 열도(일본)의 우위성을 강조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아끼야마 데쯔타로오(秋山鐵太郞)는 일본과 조선은 인종도 같고, 고대로부터 깊은 관계를 맺었고 피도 섞여있고 문자로도 대부분 통용이 되며 언어도 같은 계열에 속하고 풍속과 관습도 유사하여 조선과 일본은 하나로 융합할 소지를 갖추고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15)

대표적인 일선동조론의 이론가인 기타 사다키치(喜田貞吉)는 민족학이나 언어학의 연구 성과들을 기반으로 진구황후(神功皇后) 이전부터 일본과 한국은 근본이 동종(同種)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진구황후는 한국을 정벌한 대표적인 일본의 황후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원래 하나의 민족이었다가 잠시 흩어진 것을 영명한 진구황후가 이들을 다시 정벌하여 하나로 만들었듯이 일본이 한국을 병합한 것은 당연하다는 논리가 되는 것이지요(진구황후는 앞으로 상세히 분석할 것입니다).

기타 사다키치는 1920년대 일선동조론의 최고의 이론가로 한국인들의 생활양식과 일본의 헤이안 시대(平安時代 : 794~1185)의 생활양식이 비슷하다고 지적하고 역사상 차이가 있지만 한국과 일본은 같은 계열이라는 점을 주장합니다. 따라서 민족구성이 동일하니 '조선인 = 일본인'이고 오랜 기간 떨어져 살다가 본래대로 결합하는 것뿐인데 어찌 조선이 일본으로부터 독립해야 하는가 하는 논리지요. 물론 기타의 견해는 평등하고 확고한 정체성을 가진 동종이라는 의미는 아니지요. 이들의 주장들은 그 근저에 본가(本家)와 분가(分家), 순수와 잡종(雜種)의 개념이 들어있기 때문에 정치적이면서 비학문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시 열도쥬신(일본)은 스스로는 문명국, 반도쥬신(조선)을 비문명국으로 간주하고 일본의 식민 지배를 비문명지역에 대한 문명화로 바꾸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일선동조론은 문명화론과 결부하여 형제국인 한국이 미개한 상태이기 때문에 문명화시켜서 하나의 가족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것이죠. 동문동종(同文同種)의 형제가 떨어져 살다가 다시 하나의 집안을 만드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리하여 시마 사부로다(島三郞田)는 한국과 일본의 차이라는 것은 지리적 위치로 인하여 별개의 사회를 형성한 데 불과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16) 이 같은 인식은 일제 하의 한국에서도 상당히 널리 퍼진 것으로 생각됩니다. 예컨대 매일신보사(每日新報社)가 1917년 일선동화론이라는 주제로 신년문예를 개최하였는데 당시의 기사에는 한국인들 가운데 시마 사부로다와 거의 같은 견해를 펴는 한국인들도 있습니다. (17)

당시의 일선동조론에 대해 신채호 선생은 거부합니다. 신채호 선생은 아시아 인종을 선비족, 부여족, 여진족, 말갈족, 지나족(支那族 : 한족), 토족(土族) 등으로 나누고 일본인들의 근원으로 추정되는 몽골이나 인디아 등을 제외합니다.(18) 무엇보다도 신채호 선생은 일선동조론이 한인의 동화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거부한 것이죠. 물론 신채호 선생의 견해도 사실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 독립운동을 위한 정치적 목적을 띤 것이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차라리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지 않았더라면 한국과 일본은 비슷한 나라, 나아가 한국인과 일본인은 같은 뿌리라는 생각이 더욱 견고해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다보니 적개심이 커져서 차이가 더욱 부각된 것으로 보입니다.

필자 주



(1) 崔南善 「不咸文化論」『朝鮮及朝鮮民族』(朝鮮思想通信社 : 1927) 56쪽, 30쪽.


(2) 崔南善 『古事通』(三中堂 : 1943) 6쪽.


(3) 崔南善 『古事通』(三中堂 : 1943) 8~9쪽.


(4) 滿洲國民生部厚生司敎化科『國本奠定詔書謹話集』(滿洲國政府 : 1940) 8~9쪽.



(5) 崔南善 『朝鮮及朝鮮民族』(朝鮮思想通信社 : 1927) 35~37쪽.


(6) 久米邦武 「神道は祭天の古俗」『史學會雜誌 第23號』(1891)


(7) 井上哲太郞 「日本民族の起原に關する考證」『史學會雜誌 第21編 第10號』(1910) 47쪽.


(8) 白鳥庫吉 「日本書紀に見えたる韓語の解釋」『史學雜誌 第8編 4·6·7號』(1891)


(9) 白鳥庫吉의 견해에 관해서는 미쯔이 다카시(三ツ井崇)「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의 학문적 기반에 관한 시론」『韓國文化 33 (2004)』를 참고.


(10) 金澤庄三郞『韓日 兩國語 同系論』(三省堂書庫 : 1901)



(11) Peter Duus 『The Abacus and the Sword』(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 1995) 414쪽.



(12) 小熊英二 『單一民族神話の起源』(新曜社 : 1995) 73∼79쪽.


(13) 鳥居龍藏 「朝鮮民族에 取하야」『每日新報』(1915.9.5)



(14) 八木獎三郞「朝鮮의 先史民族」(13)『每日新報』(1916.1.8)



(15) 秋山鐵太郞「朝鮮人より見たる日鮮同化觀を讀みて」『朝鮮及滿洲』(1913.2)


(16) 島三郞田 「日鮮同種同根論」『新朝鮮』(朝鮮硏究會編 : 1916) 154쪽.


(17) 『每日新報』(1917.1.28)


(18) 신채호 『讀史新論』1. 人種 『丹齋申采浩全集』上. 474∼4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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